91.
“어서 오세요!”
여인은 어제와 같은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알렌 역시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인
사했다.
“손님은 기사님이신가 봐요.”
여인의 눈이 흘끔, 알렌이 갖고 있는 검에 향했다. 혹시 몰라 오늘도 기사단 마크가 없는
검을 허리춤에 차고 왔다. 알렌은 둘러댈 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렇구나. 일하신 지 오래되셨어요?”
그녀는 손뼉을 짝 치며 반가워했다.
“이삼 년 정도….”
“그렇구나. 기사 일은 많이 고되고 힘들다던데 대단하세요. 저도 그렇게 강해지고 싶어요.”
적당히 대답한 알렌의 말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 호선을 그리며 애틋한 표정이 되었다.
“꼭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그렇게 덧붙인 여인은 얼른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주문을 받았다.
알렌은 어제처럼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알렌은 그녀를 보고만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것을 할 때보다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극이나 연극을 볼 때도 느껴지지 않던 반짝이는 생동감이 그녀의 온
몸에 흘러넘쳤다. 마치 눈부시게 커다란 조명이 그녀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술에 취한 걸까. 맥주 한두 잔에 취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를 보고 있으면 몽롱하
고 어지러울 정도로 기분이 고조되었다.
알렌은 입 속 여린 살을 깨물어 보았다. 정신 차려, 넌 에른스트 공작가의 사람이고 저 여
인은 이 거리에서 사는 아가씨야. 우린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고.
쾅,
알렌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
지 않았다.
우선 찬바람이라도 쐬면서 정신을 가다듬어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밖으로 나왔다.
“기사님, 가시려고요?”
뭔가가 가득 담겨있는 종이봉투를 끌어안고 사샤가 알렌에게 말을 걸었다.
“아….”
“급하신 거 아니면 잠시만 있다 가세요!”
여인은 알렌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 담겼다. 사샤의 손에 이
끌려 다시 자리에 앉은 알렌은 맥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맥주 나왔습니다, 이건 서비스예요!”
“이건?”
“오늘 단골인 손님의 생일이라고 해서 간단하게 케이크를 만들어서 돌리고 있거든요.”
그럴싸한 장식 하나 없이 접시마다 큰 수저로 푹푹 퍼 담은 케이크였다.
꾸덕꾸덕한 크림치즈 위에 코코아 가루를 듬뿍 올려 싸구려 럼으로 향을 냈다. 공작가나 시
내의 레스토랑에서 후식으로 가끔 나오는 케이크였다. 맛은 생각 이상으로 훌륭했다.
한 입 입에 넣는 순간 달콤하고 쌉쌀한 맛이 잘 어우러져 감탄이 나왔다. 소박한 재료에서
그 이상의 깊은 맛이 났다. 맛을 제대로 낼 줄 아는 솜씨를 가진 사람이었다.
“맛이 어때요?”
잠시 여유가 생겼는지 여자는 알렌의 맞은편에 앉아 말을 걸었다.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기
대하고 있는 표정이 알렌의 칭찬을 기다리는 듯했다.
“정말 맛있어요.”
“진짜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다. 오랜만에 하는 케이크라서 긴장했거든요.”
알렌의 말에 여자는 마치 꽃이 만개한 것 같은 미소를 띠며 좋아했다.
“사실 전 디저트보다는 다른 요리를 더 잘해요. 다음에 오면 간단한 거라도 만들어 드릴게요
."
알렌을 배웅할 때 했던 여자의 말이 그날 밤늦게까지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뒤로 알렌은 매일 저녁 가게를 방문했다.
언제나 그녀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다정하게, 너무 친근하진 않게.
다만 다른 손님보다는 아주 조금 더 가깝게.
알렌이 오면 일부러 소소하게나마 직접 만든 요리를 내온다든가 하는 식으로.
알렌은 함부로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인 데다, 원래 말수가 적은 성격 때문에 먼저
그녀에게 말을 붙이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다지 개의치 않으며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갔다.
알렌이 그녀가 있는 가게에 발을 들인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맥주를 주문하면서 툭, 한 마디를 덧붙였다.
“부탁이 있습니다.”
“아, 네. 뭔가요?”
알렌이 말을 먼저 붙인 건 거의 처음이었다. 여자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이름을 알려 주세요.”
“아, 알렉산드라예요.”
갑작스러운 알렌의 물음에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하는 빛이 감돌더니 이내 쑥스러운
듯 붉어졌다.
“알렉산드라.”
알렌은 아주 소중한 이야기를 들은 듯 빙긋 웃음 지으며 한 음절씩 소중하게 내뱉었다.
“주변 사람들은 다 사샤라고 불러요.”
하지만 이내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은 여인은 장난스럽게 입매를 올리며 첨언했다.
“저도 사샤라고 불러도 되나요?”
“네, 그럼요! 부디 그렇게 불러주세요. 저, 그, 그런데.”
여인은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앞치마를 매만졌다.
“다, 당신은요?”
“네?”
“기사님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알렌은 고민에 빠졌다. 이름을 가르쳐 줘도 될까. 차라리 가명을 대는 게…….
잠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알렌이라고 합니다.”
“알렌 씨.”
“네.”
알.렌, 눈앞의 남자가 가르쳐준 이름을 되뇌며 환한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샤를 보며 알렌
역시 눈매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 * *
“맥주를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몰랐습니다.”
가게를 나오니 칼라일이 불이 켜지지 않은 가로등 밑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뒤를 밟았나.”
“매일 같이 임무가 끝나기 무섭게 사라지시니 걱정이 되어서 당신의 뒤를 쫓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칼라일은 진중한 목소리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알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은 엄연히 임무 중이고, 서 제국의 귀족이며,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가문을 이끌고 갈 예비 가주이다. 그런 위치를 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공작이 맡긴 일은 며칠 안에 마무리된다. 다시 공작가로 돌아가면 그녀를 만날 일은 없다.
“겨우 며칠이잖아.”
“그렇죠, 겨우 며칠이죠.”
“…가자.”
알렌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사샤가 있는 가게로 갔다.
그는 몰랐지만 사샤 역시 매일 알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반사
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알렌이 아니면 조금 실망했다.
나, 그 기사님을 기다리는 건가? 저도 모르게 붉어진 볼을 더운 실내 탓을 하며 손부채질
했다.
알렌이 저녁 늦게 오자 사샤는 애써 반가운 마음을 감추며 여느 손님 대하듯 웃으며 맞이했
다.
“어서 오세요!”
너무 들뜬 걸 들키지 않게, 심장 뛰는 소리가 설마 들리진 않겠지? 얼굴이 빨개져 있진 않
겠지? 사샤는 알렌이 앉은 자리에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으며 다른 일을 했다.
“저기 손님이 주문하려는 것 같은데?”
주방장이 사샤에게 알렌 쪽을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 네네! 갈게요.”
사샤는 그제야 알렌에게 갔다.
“기사님, 안녕하세요.”
사샤는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무의식적으로 흘
러내린 머리카락을 잡고 발그레해진 볼을 가렸다.
“안녕하세요.”
알렌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음 지었다. 눈이 반달같이 곱게 접히자 사샤의 가
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울려왔다.
“뭐, 뭐 주문하시겠어요?”
사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며 앞치마에서 허둥대며 펜을 꺼냈다.
“오늘도 맥주로 하시겠어요?”
“음, 네.”
알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주방에 돌아온 사샤는 다리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 테이블 뒤에 숨어서 쪼그려 앉
은 사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평소 같지 않은 사샤의 모습에 주방장이 주방에서 나와 걱정스레 물었다.
“아, 죄송해요. 잠깐 배가 아파서 그런데 저쪽에 있는 은발의 젊은 남자 손님께 맥주 한 잔
만 갖다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정말로 괜찮은 거지?”
주방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능숙한 솜씨로 맥주잔을 집어 맥주를 가득 부었다. 그리고는 알렌
이 있는 자리에 가서 맥주를 내려놓았다.
“맥주 나왔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알렌은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사샤가 가져다줄 줄 알았는데 예상하지 못한
얼굴에 조금 놀란 빛이 띠었다.
“사샤는 잠깐 쉬러 갔수.”
주방장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이 녀석도 사샤의 팬인가 보다, 눈치챘다.
싹싹하고 일 잘하고, 주방장 눈에는 영 어린애 같긴 하지만 그래도 예쁘장한 사샤를 보기 위
해서 가게에 오는 녀석만 양손으로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반반하게 생긴 남정네도 우리 사샤한테 빠졌나 보군. 이 녀석이 불편해서 나한테 대신 서
빙을 맡긴 건가. 쯔읏, 주방장은 혀를 차며 마뜩잖은 시선을 알렌에게 던졌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라.”
바 테이블로 돌아온 주방장은 아직도 쭈그려 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사샤에게 퇴근을
종용했다.
“네? 아, 아니에요. 아픈 것도 아닌데.”
“한동안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손님도 별로 없으니 내가 마무리해도 돼.”
“아, 그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대로 알렌을 못 보고 일찍 가버리는 게 아쉬우면서도 그를 피해서
도망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함께 들었다.
“그럴 땐 그냥 가는 게 상책이다.”
주방장의 큼지막한 손이 사샤의 머리 위에 턱 얹어졌다. 그는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사람이
었지만 사샤를 예뻐하고 아꼈다.
기사님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는 도망치고 싶은 거지.
사샤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왠지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기사님이
가게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가 웃는 걸 봤을 때부터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정말로 몸이 안 좋은 걸지도 몰랐다.
“그럼 들어가 봐도 될까요.”
사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 번도 조퇴한 적이 없었는데. 웬만큼 아파도
참고 일했던 자신이다. 이런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이불 덮고 자버리고 싶어.’
주방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꾸벅 감사 인사를 한 뒤 앞치마를
의자 위에 올려 두고 뒷문으로 퇴근을 했다.
힘없이 뒷문을 열고 나오며 사샤는 이마를 짚어보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정말로 아픈 걸지도 몰랐다.
‘기사님께 인사도 못 하고 그냥 와버렸네….’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기사님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닌데.
“사샤 씨.”
“……기, 알렌 씨.”
그때 뒤에서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