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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잘난 공작 양반도 봉인석이 있으니 옴짝달싹도 못 하는구만.”
로브를 쓴 사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 놈의 마력뿐만 아니라 생명력까지 빼앗기고 있는 기분이 어떠한가.”
사내가 주문을 외우자 알렌의 팔과 다리는 점점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초까지 의지가 전달
되지 않았다.
검을 쥔 손이 제멋대로 덜덜 떨려오고 점점 다리에 힘이 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 역시 흑마법의 일종인가. 시어도어에게는 자신 같은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용자만을 노린, 자신을 노린 공격임에 틀림없었다.
요한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를 계획한 것인가.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트리기 위해. 자신의 모
든 것을 빼앗기 위해.
열 명이 넘는 사내가 형형한 살의와 극도의 희열을 감추지 않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이대로 무릎 꿇어선 안 돼. 나의 아버지가 쌓아 올린 에른스트의 공적, 나의 사람들, 그리
고.
사샤, 사샤.
알렌은 이를 꽉 깨물고 검을 고쳐 쥐었다.
절대 질 수 없다, 의지만이 남은 다리가 지반에 박힌 듯 꼿꼿하게 서 있었다. 검을 든 사내
가 히죽거리며 알렌을 향해 무자비하게 팔을 휘둘렀다.
“크윽!”
그때 시어도어가 달려들어 알렌의 앞을 막아섰다. 날카롭게 벼린 칼이 시어도어의 가슴을 스
치고 지나가자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더니 힘없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프레데릭…!”
“바보, 같은 자식.”
시어도어에게 목을 졸린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러라고 1등을 넘겨준 줄 알, 아?”
그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듯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있
었다.
“대단한 우정이 감동적이네. 걱정하지 말라고, 사이좋게 보내줄 테니까.”
그들은 이런 상황을 가장 즐겼다. 저보다 높은 걸 찾기 힘들 만큼 오만한 사내가 죽음을 목
전에 두고 보이는 가장 무기력하고 비참한 모습.
이게 얼마나 즐거운지, 마약을 끊어도 살인은 끊을 수 없다니까. 사내들 중 우두머리에 해당
하는 사람이 입을 쩌억 벌렸다.
“둘 다 죽여버려.”
봉인석의 힘이 더욱 강해지자, 어깨에서부터 짓누르는 엄청난 압력에 알렌은 결국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윽고 서 제국의 젊은 공작을 살해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남자들이 칼을 번뜩이며 뛰어들
었다.
- 일어나라, 알렌 폰 에른스트.
죽음이 코앞에 왔을 때 귓가에 울린 것은 우습게도 자신의 목소리였다.
알렌이 다시 눈을 뜨자 안개가 짙게 깔린 듯 뿌연 사위 속에 ‘그’가 있었다. 알렌 폰 에른
스트. 자신이었다.
눈앞의 알렌은 결연했으나, 몹시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는 으르렁대듯 말했다.
- 내가 어떻게 만들어 낸 기회인데, 이제 제발 자각해라.
- 그녀를 지키지 않을 건가? 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않을 거냐고.
-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을 거냐.
- 정신 차려, 넌 이미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넌 …수 있어.
그때 알렌의 오른손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며 그의 몸속으로 선연한 광채의 빛이 순식
간에 스며들었다.
다시 어둠이 찾아오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조용히 선언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끝내자.”
* * *
알렌 폰 에른스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서 제국 수도 외곽에 있는 작은 시장 앞에서였다
.
가판마다 제철 과일을 늘어놓은 노점의 상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손님을 끌어모으고, 온 가
족이 함께 외출해서 시간을 보내는, 떠들썩하고 기운 넘치는 가을 주말의 아침이었다.
가주이자 아버지인 공작의 명에 따라 그는 평복 차림으로 시내에 잠행을 나와 있었다.
평민들이 많이 있는 곳에 오는 일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야 잦아졌다.
게다가 오늘같이 평복 차림의 잠행은 처음이었다.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이 시작되고 공작령
의 영지에 자주 다녔지만, 항상 소공작의 신분으로 사찰을 다녔을 뿐이지, 이렇게 신분을 감
추고 일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은 보좌관이나 사용인도 없이 혼자였다.
혹시 몰라 기사들이 들고 다니는 검을 차고 왔다. 알렌의 실력으로 이 정도면 큰일이야 있겠
냐마는, 그래도 그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때 골목길을 꺾어오던 마차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들었다. 말이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마부가 말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어 보였다.
알렌 자신은 가볍게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옆을 지나가고 있던 여인은 갑자기 일어난 상황
에 놀랐는지 완전히 얼어붙어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말이 여인을 덮치려 할 때, 알렌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꺅!!”
알렌이 여인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자, 여인은 그의 품에 안기다시피 파고 들어왔다.
그녀가 들고 있던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며 사과 몇 개가 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알렌이 없었으면 여인은 마차에 크게 다칠 뻔했다. 당혹스러운 목소리의 마부가 마차를 세우
고 허둥지둥 내려와 그들에게 사과했다.
“아이고, 아가씨. 괜찮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놈이 갑자기 뭘 보고 놀랐는지….”
여인은 정신이 들었는지 알렌의 품을 벗어났다.
그리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부에게 괜찮다는 듯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기….”
알렌은 여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괜찮으세요? 저 때문에 다치신 건…?”
알렌은 아무렇지 않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큰일 날 뻔했어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며 흙이 묻은 치마를 툭툭 털어냈다.
입고 있는 치마는 오래되었는지 색이 바래있었고 군데군데 덧댄 흔적이 있었지만, 잘 관리하
는 듯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다. 여자는 얼른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바닥에 떨어트린 봉투와
사과를 줍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던 알렌은 발치에 떨어져 있던 사과를 주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와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환히 웃으며 알렌에게 사과를 받아 들었다. 떨어진 사과를 전부 주워서 봉투에 넣은
여인은 알렌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으시면 저기 골목 끝에 있는 펍으로 오시면 돼요, 전 거기서 일하거든
요.”
여자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가리키며 방긋 미소 지었다.
구김살 없는 환한 미소가 마치 가을 햇살같이 느껴졌다. 밀색이 도는 금발이 햇빛에 반사되
어 반짝였다.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자신이 가리킨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까지 한동안 알렌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감사합니다!
이상했다. 아까부터 잠깐 스쳐 지나간 여자의 미소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알렌은 머릿속에 그녀의 환한 미소를 지우기 위해 억지로 여러 가지 생각을 쥐어짜며 간신히
그녀를 밀어내고는 한숨을 쉬며 칼라일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돌아갔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도 알렌은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알렌
의 보좌관인 칼라일은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그를 관찰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해도 수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음….”
알렌은 칼라일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먼저 돌아가도록. 마저 남은 일이 있어.”
“아직 마치지 않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응.”
알렌은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며 칼라일을 억지로 돌려보냈다. 칼라일은 처음에는 미심
쩍은 듯 눈길을 보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칼라일을 보내고 나서도 알렌은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 멈춰 선 채로 서성였다.
그녀가 있는 가게는 여기서 오른쪽. 칼라일이 기다리는 숙소는 왼쪽.
알렌의 구두가 오른쪽으로 몇 보 옮겼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아오고, 다시 오른쪽으로 향하는
망설임이 한동안 이어졌다.
알렌은 이내 결심하고 눈을 딱 감은 채 오른쪽으로 완전히 발길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펍에는 이미 손님이 가득 차서 시끌시끌했다. 가게 문이 열리고 문 위에 매달린 종소리가 경
쾌하게 울리자 정신없이 서빙을 하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앗.”
알렌을 알아본 여인은 눈을 커다래지며 알렌이 서 있는 문 쪽으로 다가왔다.
“아까, 낮에 절 도와주신 분이죠?”
일할 때 쓰던 쟁반을 가슴팍에 끌어안은 채 여인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 뵙게 돼서 정말 좋네요, 혼자 오셨어요?”
알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작은 테이블로 그를 안내했다.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여인은 앞치마에서 작은 메모지와 펜을 꺼내서 주문을 받을 준비를 했다. 알렌은 멍하니 그
녀의 얼굴을 보다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어, 음….”
“맥주는 어떠세요? 올해 나온 보리로 빚어서 아주 맛있어요.”
“그럼 그걸로.”
여인은 알렌이 머뭇거리자 메뉴를 고민한다고 착각한 듯했다. 알렌은 표정 관리를 한 뒤 고
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추천하는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녀는 큰 맥주잔을 알렌에 앞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슬쩍 껍질이 붙어있는 견과류가 담긴
작은 접시를 맥주잔 옆에 밀어주며 속삭이듯 낮게 말했다.
“이건 아까의 답례예요.”
살짝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건넨 뒤 그녀는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일에
집중했다.
알렌은 그녀가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맥주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귀족 영애들로부터 수많은 친절을 받아 왔지만 그녀들의 친절에서는 어떤 기대가 느껴졌다.
이 행동으로 인해 에른스트의 소공작과 말을 한 번 붙여 볼 수 있지 않을까 같은.
하지만 저 여인이 건네는 칭찬의 말이나 친절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자
연스러운, 사람 대 사람으로 건네는 친절함이었다.
“….”
겨우 이런 걸로 저 여인이 특별해 보이거나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알렌은 퍼뜩 이성을 돌아오는 것 같았다. 자신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어서 돌아가야
겠다고 생각하며 단숨에 거품이 완전히 가라앉아 황금빛이 도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는 맥줏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가게를 나와서 길을 나서려고 할 때, 알렌은 저도 모르게 창문으로 가게 안을 다시 들여다보
았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금방 여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무거운 맥주잔을 옮기고, 주방에 들어가 요리사의 일을 거
들기도 하고 오고 가는 손님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한동안 가게 안을 바라보고 있던 알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심을 한 듯 발길을
옮겨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