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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88화 (88/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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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몇 번이나 죽인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네가 그에 의해서 목을 졸리고, 칼에 찔리고,

독약을 먹고,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요한의 말에도 사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방금 일어

난 일처럼 생생하게 그녀를 지배했다. 어느새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가 모르는 눈치더라고? 왜 알려주지 않았어?”

요한은 정말 궁금한 듯 일부러 천진난만하고 호기심 가득한 소년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어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 사실을 알면, 그가 널 더 이상 원치 않을까 봐?”

“….”

“대단한 사랑이네. 알렉산드라 양. 자신을 죽인 사람을 사랑하려면 이 정도 희생정신과 관용

은 있어야 하는구나. 난 정말 감동했어.”

요한은 두 손을 모아 사샤더러 보란 듯 손뼉을 마주쳤다.

“보통 사람은 해내지 못할 일이야. 역시 여덟 번이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다른 가봐.”

고개를 까딱이며 요한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당신의 사랑을, 응원할게. 알렌 폰 에른스트는 이제 어떨지 모르지만.”

동요하는 사샤의 모습을 보며 요한은 만족스러웠다.

그녀의 창백한 낯빛은 몇 시간 전, 알렌 폰 에른스트가 지었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도 너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고

맹세하면. 정말 감동적이겠어. 그야말로 세기의 사랑이겠지?”

아아, 이 파멸만 남은 안타까운 연인이여. 요한은 노래하듯 읊조렸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야.”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사샤를 옭아매었다. 그 자리에, 꽁꽁.

* * *

밀레나는 수도원에서 수양을 할 겸 정신적인 요양을 위해 수도원에 떠나기로 했다. 말이 그

러하지, 사실은 감금에 가까운 처벌이요, 황녀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징벌이었다.

그래도 황녀의 추문이 퍼지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된 것은 전부 알렉산드라 헤른 남작의 ‘너

그러운’ 관용 덕이었다.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에 비해 매우 관대한 결과라 의아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밀레나는 완전

히 패배했고, 그녀에게는 더 이상 반격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아바마마…. 거짓말이지?”

그녀가 갖고 있던 모든 획책이 박살 나버렸을 때, 가장 믿고 의지했던 에마에게 배신당했다

는 사실을 안 밀레나는 다시 복수를 다짐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밀레나는 잘못이 없어요…. 예뻐해 주세요. 어마마마, 안아줘, 밀레나를 안아줘.”

그녀는 무너져 내리는 정신을 버티지 못하고 마치 아이처럼 변하고 말았다.

“황녀 전하.”

밀레나는 더 이상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허공을 향해 있

고,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나의 나약하고 나약한, 나만의 밀레나.”

에마는 천천히 두 팔로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걱정 마요, 내가 평생 지켜줄게요.”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밀레나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당신의 어미이자, 누이이자, 친구로서 평생 옆에 있어 줄 테니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에마의 표정은 마치 성녀와도 같았다.

오늘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드디어 나의 아가씨가 나만의 것이 된 이 순간, 에마는 세

상의 전부를 손에 쥔 것처럼 황홀한 미소를 그렸다.

황녀의 방을 청소하는 일개 사용인으로서 황녀를 처음 모시게 된 날, 에마는 천사를 만났다.

천사는 물결치는 핑크빛 금발을 찰랑이며 하늘을 담은 듯 옅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다.

이후로 에마는 청소를 할 때마다 내내 조심스레 황녀를 흘긋댔다. 어느 날, 밀레나가 입을

열었다.

-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황녀 전하!

-   내가 물어본 건 이유잖아. 왜 쳐다보냐고.

-   황녀 전하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가고 말았습니다. 정말 죄,

죄송합니다.

-   흥….

밀레나는 에마를 빤히 훑었다.

-   진심이야?

-   당연하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   고개 들어봐.

황녀의 한 마디면 모진 매질을 당할지도 모르면서, 당장 눈앞에 있는 자신의 미모에 정신이

홀린 사람처럼 에마의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의 아부나 거짓 없이, 밀레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듯 달떠 보였다.

불에 뛰어드는 나비 같아. 밀레나는 피식 웃었다.

그날부터 에마는 1황녀 밀레나 루도비카의 그저 그런 사용인이 아닌, 시녀가 되었다.

천사의 곁에 있을수록 욕심이 늘었다. 죽지 않고 시녀가 된 것에 감사하고,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에 만족했던 마음은 어느새 그보다 더 커져 있었다.

에마는 천사가 자신의 손에 들어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숨죽여 기회를 노려왔다.

나의 황녀 전하, 나의 공주님, 나만의 아가씨, 내 인형. 내 사랑스러운 밀레나. 영원히 우

리는 함께할 거예요. 이 에마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 * *

알렌은 에른스트 공작 집무실에 찾아온 사샤가 가져온 편지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밀레나 황녀의 시녀가 보낸 편지에는 황녀가 사샤가 입궁할 때를 노려 함정을 쳐놨고, 어떤

식으로 곤경에 빠트릴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손이 떨려왔다. 중요한 증거가 될지 모르는 편지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지만,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삭이기 힘들어 알렌은 억지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밀레나가……. 설마 황녀가 자신을 향한 마음이 이 정도 까지 삐뚤어져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를 너무 무시했다. 설마 사샤를 납치한 사람이 황녀일 줄이야. 자신의 방만함으로 사샤

가 다쳤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왔다.

게다가 사샤는 밀레나를 직접 만나 부딪히겠다고 했다.

-   ……네가 위험할 게 분명해.

-   설령 함정이라고 해도, 그래도 가야 해요. 내일 피해봤자 또다시 날 노릴 게 분명하니까

. 언제까지 피할 수 없어.

의연한 눈빛으로 이미 결심한 듯한 그녀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알렌 역시,

그 방법 외에 더 좋은 대책이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아무리 허수아비 황녀라고 해도 밀레나는 황제의 적녀다.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확실

한 증거가 필요했다.

알렌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납치를 계획한 게 황녀라면, 네 앞에 나타난 그 남자는 요한 황자겠지.

사샤의 가게에 매일 같이 찾아오고, 그녀가 납치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남자는 밀레나

의 남동생 요한 황자임에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사샤를…. 알렌의 눈에 분노가 차올랐다. 당장에라도 그 남자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   당신이 지금 요한 황자를 찾아가면 모든 걸 망칠지도 몰라요.

사샤의 말이 옳다, 이성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알렌은 위험할 걸 알면서도 사

샤가 밀레나와 맞서는 걸 도저히 말릴 수 없었다.

“이제 끝이야, 요한 황자.”

사샤와 밀레나의 재판이 황제의 집무실에서 열리고 있을 때, 고요한 목소리가 스산한 적막을

가르며 요한의 귓가를 스쳤다.

대낮인데도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길한 소리를 내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알렌은 소리도 없이 이미 요한의 방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황자의 방 창가

에 앉아 알렌은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푸른 눈동자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요한은 여전히 소파에 기댄 채였다. 그는 알렌을 짧게 훑더니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게 누군가, 에른스트 소공작.”

요한의 나른한 어조 속에는 잘 벼린 악의가 담겨 있었다.

“아, 이제 공작이 되었지. 공작 즉위를 축하드리오.”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바닥을 두어 번 맞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선대 공작이 좋지 않은 일을 당해 공작이 된 것인데, 축하한다고 말하기 저어한가. 내가

무례를 저질렀군.”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요한은 알렌을 대할 때마다 마치 실수인 척 그를 깎아내리고, 무심한

척 욕보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두 사람이 처음 황궁에서 만났을 때부터. 알렌과 동갑인 황자는 그에게 단 한 번도 호의를

가졌던 적이 없었다.

그가 알렌에게 미묘한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요한이 알렌에게 대놓고 척을 져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백안시하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적당히 하시지, 요한 이그나즈.”

알렌의 눈빛에는 분노가 번득였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알고 있어. 난 물어보려고 온 게 아니야.”

알렌은 요한을 마주했다. 이들 사이에 더 이상 제국의 황자와 공작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범

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등 뒤로 배어 나오려는 형형한 살기를 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네가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이든 막아낼 거니까. 뭘 해봤자 허튼 짓거리라는 걸 경고하기 위

해 온 거라고.”

흩날리는 바람이 두 사람이 서 있는 방 안을 휩쓸 듯 거칠게 들어왔지만 누구도 그에 개의치

않았다.

“네가 마탑에서 하고 있는 짓까지. 전부 알고 있어.”

마탑에서 조사를 하던 막시밀리안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매우 급한 마음에 쓴 듯, 엉망으로

날리는 글씨로 짤막하게 한 줄 적혀 있었다.

3황자를 조심해, 그가 수상해.

알렌의 말에 요한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쪽에 대해서였어?”

“……뭐?”

“난 또. 알렉산드라 양이 숨긴 비밀을 알고 찾아온 줄 알았더니. 정보력이 약하네.”

알렌의 짙은 청안이 예리한 빛을 띠고 요한에게 향했다.

“도무지 안타까워서 보고 있을 수 있어야지. 그래서 도와줬어.”

“……뭐라고?”

“사샤 양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는 뜻이야.”

사샤의 이름이 나오자 알렌의 눈에 불붙듯 이채가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알렌의 손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대로 요한을 벽에 처박았다. 알렌은 벽

에 밀친 요한의 얼굴을 앞에 대고 사납게 경고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그녀의 이름을 네 입 밖에 올리지 마.”

“수작? 오히려 수작이라면 내가 묻고 싶은데.”

요한은 금방이라도 알렌의 손에 공격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조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오

히려 보란 듯이 한숨을 크게 내쉬며 반문했다.

“네 손으로 직접 목 졸라 죽이고 찔러 죽였던 여인에게 이제 와서 절절하게 세상에 다시없는

사람인 양 구애하는 심정이 어때? 그쪽이 훨씬…. 개수작 아닌가?”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 거지? 머리로는 요한이 지껄이는 소리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차갑게 식는 모순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요한은 순간 알렌의 눈빛이 흔들린 것을 재빠르게 눈치채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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