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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증인입니다, 아바마마.”
황제의 앞에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지금까지 이 자리에 없었던 밀레나의 친동생, 3황자 요한이었다.
“요, 요한.”
“누님. 이제 그만…. 멈추세요.”
요한의 목소리는 비통함에 잠겨 있었다. 그는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아름다운 눈썹을 찡그
리며 말했다.
“누님의 수석 시녀가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더 이상 누님을 막을 수 없다고, 친동생인 저만
이 황녀의 광기를 막을 수 있다고. ……네, 저의 잘못입니다. 좀 더 빨리 제가 누님의 이상을
알았더라면, 이 정도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적어도 오늘 일만큼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저놈이 뭐라고 하는 거야, 황녀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마지막 남았던 희망마저 부스러기가 되어 공중에 흩날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단단히 잠겨 있는 황제의 집무실을 두드리는 다급한 소리가 울렸다.
“폐, 폐하.”
호위가 가져온 서신을 펼친 황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밀레나의 글씨체로 적힌 서신은 알렉산
드라의 죽음을 사주하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은 그런 의뢰서를 남기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기록이 남을 여지가 있는 이는 위험 부담이 커서 피했기 때문에 그런 조무래기
들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건데.
밀레나로서는 어이없을 만큼 억울한 일이었다.
요한이구나, 저놈이 지금…. 날 배신한 거구나.
“요한 네 놈마저….”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는 것을 보
았을 때 밀레나의 얼굴에 절망과 분노가 동시에 떠올랐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침묵 끝에 황제가 엄숙하게 말했다.
“밀레나 루도비카를 구금하라. 죄인은 엄숙하고 반성하는 태도로 처벌을 기다리도록 하여라
.”
내가, 죄인……?
등줄기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고 있던 황녀는 황제의 입에서 나온 무정한
결과를 거부하며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어깨를 흔들면서 울부짖었다.
에마와 에른스트의 사용인은 황실 호위에게 체포되어 함께 끌려갔다.
에른스트의 사용인은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에마는 몹시 평온했다.
그들이 집무실을 벗어나기 전, 에마가 고개는 정면을 향한 상태에서 눈을 힐끗 사샤에게로
향했다.
에마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눈빛으로 그녀를 잠시 훑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렸다.
* * *
“언니,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초조하게 두 손을 모으고 사샤를 기다리던 나넬은 그녀의 모습이 보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
을 쉬면서 조용히 감사 기도를 드렸다.
“걱정하고 있었지?”
“솔직히, 엄청나게 걱정했죠. 그래도 잘 풀린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에요.”
나넬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사샤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나넬의 어깨를 잡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또다
시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황태자비에게 도착하기 전, 사샤는 오늘 계획하고 있는 일을 나넬에게 털어놓았다.
밀레나 황녀가 자신을 노리고 있으며 황태자비를 만나러 황성에 입궁하는 오늘, 사샤를 음모
에 빠트릴 거라고.
- 밀레나 황녀의 시녀가 나에게 은밀히 황녀가 세우고 있는 계획을 적은 서신을 남겼어.
- 그, 그렇지만.
혹시 그것마저 황녀의 계획이면 어쩌지, 나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 서신에 지장과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어.
에마가 보낸 서신에는 지장과 머리카락이 동봉되어 있었다. 자신이 이 편지를 직접 쓴 것을
보장하는 동시에 편지의 내용이 거짓을 경우 책임을 지겠다는 신뢰의 증표였다.
알렌은 어젯밤 에마의 편지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사샤에게 편지를 줬던 에른스트의 사용인
을 불러내었다.
편지를 전달했을 뿐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떼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황녀에게 그동안 사샤
의 정보를 넘겨왔다고 실토했다.
에마에게 받아 의심 없이 넘긴 것이 사실은 황녀를 배신하고 사샤와 손을 잡기 위한 편지였
다는 걸 깨달은 사용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사용인은 오늘 황실에 불려올 때 한 치의 거짓 없이 밀레나 황녀
에게 명령받았던 것을 그대로 고백하겠노라 약속했다.
“언니에게 아무 일 없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요.”
나넬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많이 걱정했지. 이제 괜찮을 거….”
“알렉산드라 양.”
괜찮을 거라는 사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았다.
“안녕하세요.”
요한 황자였다. 그를 바로 알아본 나넬은 뒤에서 헉 소리를 내고는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인
사를 했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나넬은 갑자기 나타난 요한을 얼
떨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초상화를 통해서만 알고 있는 3황자는, 실제로 보니 마치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조형한 것
같아 나넬의 시선이 홀린 듯이 고정되었다.
알렌이나 시어도어를 자주 봐서 미남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착각이었다.
“제 누이가 당신께 한 행동을 알면서도 바로 나서지 못해 죄송합니다.”
“….”
요한의 목소리는 얼굴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어찌나 감미로운지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도 몽
롱한 느낌이었다.
“잠시 괜찮다면, 제게 누이를 대신해 사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황자가 이렇게까지 숙여 가며 사과를 청한다고.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나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원래도 권력 욕심이 없고, 나서지 않는 조용한 황자라고 들었지만 이렇게 예의 바를 줄이야.
시시각각 변하는 나넬과 달리 사샤의 표정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사샤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굳게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나넬, 잠시 다녀올게.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그, 그럴게요.”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요한은 나넬에게 옅은 하늘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눈인사를 한 뒤 사샤의 손을 부드럽게 끌고
두 사람만이 있을 수 있을 작은 응접실로 향했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사샤는 그가 잡고 있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노려보았다.
요한은 그녀의 눈빛에도 그저 여유로운 표정을 바꾸지 않으며 오히려 싱글댔다.
“……뭐 하는 짓이지?”
“네?”
“뭐 하는 짓이냐고 했다, 이 개자식아.”
사샤는 그를 향해 강렬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으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날 납치한 놈이 누군가 했더니, 설마 황자일 줄이야. 내 눈을 의심했어.”
사샤는 팔짱을 끼고 굳은 얼굴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내 가게에 손님인 척 드나들더니 날 납치해서 개소리를 지껄이고, 먼저 아는 척을 해 오는
저의가 뭐야.”
사샤의 물음에 요한은 표정을 싹 바꾸며 차분한 동작으로 소파에 걸터앉으며 양손을 깍지 꼈
다.
“밀레나의 시녀와 손을 잡았나?”
사샤는 태연하게 사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분명히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났을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여자가 네게 정체를 알려줬나 보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사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 지금 그걸 변장이라고 해왔던 거야? 황자라는 사람이 어설프네.”
“흐음….”
“보자마자 바로 알았어. 겨우 그런 허접한 변장으로 속이려고 하다니.”
요한은 깍지 낀 손을 턱에 괴고 흥미롭게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냥 변장이 아니었는데. 그걸 간파했다고?’
대수롭지 않단 듯 여상하게 말했지만 실은 그로서는 드물게 깜짝 놀란 상황이었다.
그가 모습을 바꾼 것은 평범한 변장이 아니라, 마녀의 비술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물론,
마법사용자조차 요한의 정체를 간파할 수 없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역시 재밌는 여자야, 당신은.”
대체 이 남자가 왜 제 누이가 아닌 사샤 자신을 도와준 건지 사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
만, 적어도 그가 선의로 도운 것은 절대 아니란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저런 남자를 이해하려는 것도 소용없으며, 자신이 물어본다고 원하는 답을 해줄 리도 만무했
다.
그래서 사샤는 감옥에서 그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당신이랑 할 얘기 없고, 농담 따먹기하고 싶지도 않아. 이것만 기억해. 분명히 앙갚음해
줄 거라는 거.”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에게 너무 차가운 거 아냐?”
“……웃기지 마.”
사샤는 차가운 목소리로 요한의 능글맞은 말을 잘라버렸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정말 궁금하지 않은 거야?”
요한은 싱긋 웃었다. 사샤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내가 그날 했던 이야기들, 그걸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나뿐일 텐데.”
“안 궁금하다고.”
사샤는 이를 갈았다. 격한 분노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샤의 모습이 오히려 귀여워 보여
요한은 피식 웃었다.
“아쉽네. 난 전부 알려줄 생각이 있거든. 사샤 양에게만은.”
요한이 사샤에게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사샤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뒷걸음질 쳐 그에게 잡혀 있는 머리카락을 빼냈다.
“그럼 이건 어때?”
요한의 나른한 눈빛이 사샤를 훑어 내렸다.
“왜 이 사달이 났는데 사샤 양에게 절절매며 구애하는 잘나신 에른스트 공작께서 쥐꼬리도
보이지 않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
확실히 이상했다. 알렌과 어제 얘기했던 대로라면 그와 먼저 만났어야 했다.
밀레나가 꾸미고 있는 그 일이 일어난다면, 황제는 황실의 사람들과 몇몇 공작만 불러내 은
밀하게 일을 해결하려고 할 테니 사샤와 관련이 깊은 자신은 배제될 거라고. 알렌은 우선 그
렇게 판단했다.
그러니 뒤에서 지키고 있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런데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는데도 알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오, 이제야 궁금한가 보네. 알렌 폰 에른스트의 일이 되어야.”
“…당신이랑 더 이상 말장난하고 싶지 않아.”
“알렌은 말이야, 이제 알고 있어.”
요한은 어깻짓을 으쓱하며 나른하게 말했다.
“뭐?”
사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살갗에서부터 오싹한 한기가 파고들며 온
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