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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는 자신을 파멸시킬 장소인지도 모르고 쭐레쭐레 따라온 사샤를 어리석다고 여기며 조
용히 코웃음 쳤다.
창가에 기대듯 서서 두 팔을 벌린 밀레나의 자세는 요염함이 묻어나왔다. 어쨌든 황녀의 방
에 들어온 사샤를 환대하는 자세는 결코 아니었다.
사샤 역시 밀레나와 눈을 마주해도 예의를 갖춰 인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적일 뿐, 어떤 배려와 존중도 필요치 않은 사이였다.
적막이 깨진 건 밀레나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내 어머니의 가장 큰 불만은 온전히 남편의 사랑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어.”
밀레나는 제 어머니를 떠올렸다. 허리까지 기른 밝은 금발의 머리카락이 자랑이던 연약하면
서도 신경질적인 인상의 아름다운 여인.
황제의 여자가 아니었다면 여느 귀족의 정실부인으로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자신에게만 온전
히 쏟아지는 애정을 받았을지 모른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한 제국의 아비나 다름없는 위대한 이의 사랑을 온전히 독차지하고 싶어 할까.
그러면서 어째서 그분과의 사이에서 낳은 우리에게는 그 반의반조차도 애정을 주지 못하는
걸까.
“근데 나이가 들수록 이해할 수 있겠더군.”
내 피의 절반은 분명히 사랑에 미쳤던 어머니의 것임이 분명하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눈앞의 여자가 미울 수가 없을 테니.
“…아니, 어쩌면 여전히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내가 어머니였으면, 아무도 살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닿을 수 없는 갈망이 있다면 차라리 전
부 부숴버리면 된다고. 그리 여겼던 분이셨으니.
쿡쿡, 밀레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선득한 광기가 흐르는 것 같이
보였다.
이렇게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야 했어. 괜히 몸을 사리느라 시간만 낭비하고 허탕을 친 지난
일이 떠오르자 밀레나는 혀를 찼다.
“저는.”
밀레나의 말을 침착하게 듣고 있던 사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께서 느끼는 분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저를 미워하시는 거죠?”
사샤의 날카로운 질문에 순식간에 밀레나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이 지나갔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에른스트 공작이지,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샤는 마치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사람처럼,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말씀대로 원망을 하시려면, 제가 아니라. 에른스트 공작을 미워하셔야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당황해서 내뱉는 밀레나의 말에 사샤의 눈이 번득였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다리던 사공의
찌에 물고기가 걸린 듯, 기다리던 밀레나의 말꼬리를 잡자 사샤는 여유롭게 입가를 올리며
미소까지 지었다.
“그렇죠, 말이 안 되죠. 황녀 전하.”
이 여자는 뭐지, 어째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저렇게 당당한 거지? 믿고 있는 뒷배라도 있
는 건가?
“그런데 당신께서 하는 말도 제가 듣기에, 이렇게 말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
요.”
사샤 역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기세로 밀레나를 쏘아보았다. 잠시 동안 숨 막힐 듯
팽팽한 침묵이 흐르고 사샤가 입술을 떼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혈통이 고귀하다고 해도. 당신처럼 더러운 속내를 가진 사람을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은 그저…. 사랑에 미쳐서 엉뚱한 상대를 질투하고 괴롭히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아.”
“이게 감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밀레나의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새파래졌다.
옅은 파란빛이 도는 눈동자에 어둠이 깔렸다. 널 반드시 망가뜨리겠어. 밀레나는 입술을 세
게 짓씹었다.
더 이상 이 여자와 말다툼 할 가치조차 없다. 인내심은 진작 바닥난 지 오래였다. 이제 정
말 끝을 보자, 알렉산드라.
밀레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빗어 윤기가 흐르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쓸
어 넘기며 밀레나는 마치 최후의 통첩을 내리듯 거만하게 물었다.
“너와 나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
“아비의 핏줄? 자라온 환경?”
기대와 달리 사샤의 얼굴은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지만, 이제 상관없었다. 저 잘난 낯짝이
망가지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니까.
밀레나는 간신히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았지만, 목소리에는 신경질이 묻어 나왔다.
“물론 그것들에도 엄청난 간극이 있지. 하지만 너랑 나의 진짜 근본적인 차이는.”
밀레나는 사샤에게 한 걸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네게 이런 짓을 해도 되는 존재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자마자, 밀레나는 옆에 있는 화병을 벽에 집어 던지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뱉을 수 있는 가장 높고,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 벽을 향해 몸을 던졌
다.
“꺄아아아악!”
복도에 있는 모든 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밀레나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황성을 수비하는 근위대가 밀레나의 비명과, 집기들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황녀가 있는 방의
문을 급하게 두들겼다. 이윽고 무거운 문이 열리며 근위대가 우르르 황녀의 방에 들어왔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아연하게 서 있는 사샤와, 벽에 주저앉아 헝클어진 채 덜덜 떨고 있는
제 1황녀 밀레나 루도비카였다.
“무슨 일입니까, 전하!”
근위대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즉시 사샤를 에워쌌다. 몇몇이 밀레나에게 달려가 그녀를
보호하며 상황을 물었다.
“저, 저 사람이 갑자기….”
밀레나는 덜덜 떨며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두 눈동자에는 어느새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밀레나는 누가 봐도 방금까지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두려움에 떠는 가련한 황녀의 모습이었다.
“나를 죽이겠다며, 갑자기 이렇게.”
밀레나는 금방이라도 오열할 것처럼 숨을 꼴깍꼴깍 삼키며 오른손 검지를 들어 사샤를 가리
켰다.
“….”
사샤는 다만 이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밀레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을 황족 모독죄 및 폭행죄로 구금하겠습니다.”
마치 저에게 처한 위기가 아니라는 듯이,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 * *
황제의 집무실에는 매우 소수의 인원이 모였다. 황제와, 황후. 그들의 아래에는 황태자와 에
른스트를 제외한 두 명의 공작만이 있었다.
이미 이곳에 모인 인원들은 밀레나에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결코 사샤에게는 조금도 득이 되
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황제의 근엄한 목소리가 내려앉은 적막을 깨웠다.
그는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끓고 있는 노기를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지며 다들 숨을 죽였다.
프란츠 2세의 시선이 눈앞의 두 여인을 향했다. 자신의 딸인 황녀 밀레나와, ‘그’ 유명한
알렉산드라.
이 여인이 레오폴드가 결혼했던 여인의 딸이자, 알렌이 목을 매는 평민 출신의….
황제는 못마땅함을 삼키며 눈썹을 올렸다.
어느새 감정을 갈무리하고 그의 앞에서 정중하게 무릎을 굽히고 있던 밀레나가 천천히 입술
을 떼었다.
“제가 이 상황을 설명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이 여인은….”
밀레나는 흘긋 사샤를 노려보았다.
사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건방진 성정이라고 할지라도, 서 제국의 수장이자 제국의 아비인 황제 앞에서도 뻔
뻔할 담력은 없을 것이다. 추하게 벌벌 떠는 것을 참는 게 고작이겠지.
밀레나는 누구도 볼 수 없게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안타깝고 불쌍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숨을 골랐다.
“저와 교류가 있던 아가씨는 아니지만, 에른스트 공작의 서임식 때 공작의 파트너로 춤을 추
는 모습을 보았어요. 에른스트 공작은 아주 어릴 때부터 교류가 있던 아우 같은 존재여서 그
의 연인인 아가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습니다. 친분을 만들고 싶었던 차에 황성에 입궁했
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불렀습니다.”
그녀의 듣기 좋은 음성이 황제의 집무실을 메웠다.
“그녀와 차를 마시려고 인사를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더니 옆에 있던 화병을 던
졌습니다. 그리고 제 머리카락을 잡고, ……벽으로 밀쳤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
라 저는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벽에 내던져졌어요.”
밀레나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하기 어렵다는 듯 조금 머뭇거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청초하고 사랑스러운지, 중년이 훌쩍 지난 공작들도 어느새 그녀의 말에
홀린 듯 경청하고 있었다.
“어째서 갑자기 저 여인이 그런 짓을.”
황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밀레나 황녀가 비명을 지르며 벽에 쓰러져 있던 것
은 황실의 호위대가 분명히 목격한 사실이다.
하지만 밀레나 황녀가 초대한 여인이고, 황녀에게 해를 입힌다면 큰일이 나는 건 자신인데
어째서 불리한 짓을 한 건지 그 당위성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그리고 분명히 화병을 던지기 전 이 여자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무엇이었느냐.”
“……분명히,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라고….”
밀레나가 읊조리듯 중얼거린 말에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느새 집무실 내의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기회는 지금이다, 밀레나는 제가 준비한 연극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감에 만족스러움을 숨기
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극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저는 얼마 전 일주일 동안 의식 불명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밀레나의 발언에 황제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스쳤다. 밀레나의 말대로 극히
일부의 황족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황족을 노린 암수일지도 몰라 쉬쉬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제가 쓰러졌던 것과 저 여인 사이에 관계가 있을 거라고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었는데…. 사실 저는 에른스트 공작의 서임식이 끝난 바로 직후 의식 불명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런 일을 당했지요.”
밀레나는 두 손을 깍지 끼고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은 채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저는 오늘만 위협받은 게 아닐지도 몰라요.”
침착하던 황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옅은 푸른빛의 눈이 어룽지기 시작하
며 애절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바마마, 제발 진실을 밝혀주세요!”
점수로 매기자면 10점 만점에 10점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히 청중을 사로잡는 언변이었다.
황제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