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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84화 (8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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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사샤는 나넬과 황실에서 보낸 화려한 마차를 타고 황태자비에게 가고 있었다.

나넬은 너무 떨려서 어젯밤 내내 거의 자지 못했는지 화장으로 잘 숨겼지만 언뜻언뜻 어두워

진 눈가가 눈에 띄었다.

“너무 떨려서 속이 아파요….”

나넬은 한숨을 크게 쉬며 엄지와 검지 사이를 어루만지며 복통을 참았다.

황태자비가 직접 초대해서 황실에 간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황실 마차가 도착하기 다섯 시간부터 고군분투해서 꾸민 나넬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차분

하고 성숙해 보였다.

오늘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짙은 색의 옷감을 사용해서 그동안 즐겨 입었던 스타일과 많이

달랐지만, 아주 잘 어울렸다.

“으응, 나도.”

아까부터 말수가 굉장히 적은 사샤의 모습에 나넬은 걱정이 되었다.

납치라는 큰일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몸이 전부 회복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

니 황실에 가는 일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게 아닐까.

차라리 자신만 가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사샤는 반드시 황태자비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더 이상 나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넬은 힐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마차 바깥의 풍경만 응시하던

사샤가 입을 열었다.

“나넬, 할 말이 있어, 잘 들어줘,”

두 사람뿐인 마차에서 사샤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만이 이어졌다. 곧 나넬의 눈이 별안간 크

게 떠지더니 긴장한 얼굴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 * *

“그대들의 취향을 잘 몰라 내가 선호하는 차로 준비해보았는데 어떠한가.”

“아, 아주 좋습니다.”

“동 제국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차야. 난 이렇게 진하게 우려서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그대

들의 입에도 맞으면 좋겠군,”

아그네스는 찻잔 위로 올라오는 진한 다즐링 향을 느끼며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바

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 상황을 봤다면, 그녀의 미소는 다정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거다. 오히려 먹잇감인 초식동물을 눈앞에 둔 밀림의 왕 같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욱 잘 어울렸다.

아그네스는 흐뭇한 눈길로 찬찬히 두 사람을 살폈다.

시어도어의 연인으로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한 랑앤첸 백작 영애와 알렌 폰 에른스트 공작과

춤을 췄던 ‘그’ 유명한 여인.

두 사람 모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서 제국을 뜨겁게 달구는 유명 인사였다.

본가에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아버님께 연인이 생겼다고 선언하라는 자신의 충고를 시어도어

가 받아들인 게 분명하니 랑앤첸 백작 영애는 위장용 연인일 것이다.

아그네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시어도어는 평소에 업무 외에 사적으로는 랑앤첸 백작 영애

와, 저 아가씨 이외에는 달리 만나는 여인이 전무했다.

그렇다는 건 역시…. 내 동생이 흠모하는 상대는 에른스트 공작이 흠뻑 빠져있다는 저 여인인

가.

아그네스는 눈앞에 사샤를 보자 여러 가지가 꿰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제 동생은 어릴 적부터 연애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그네스로서도 남동생의 취향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사샤 정도의 빼어난 미모

를 가진 아가씨라면 어려운 마음을 품는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 바였다.

확실히 동생이 사모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게다가 외적인 요소뿐 아니라 단아하면서

도 강단 있어 보이는 야무진 첫인상도 아그네스의 마음에 상당히 차서 꽤나 흡족했다.

저런 여인을 좋아했군.

아그네스의 녹안이 사샤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신분이나 배경이 그러하다지만…. 제 동생이

정말 좋다면 아그네스로서는 기꺼이 동생의 편에 서줄 수 있었다.

‘뭐하면 손자부터 안겨드리면 그만 아니겠어.’

지금도 손자가 보고 싶어 안달을 내며 애만 태우는 동 제국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 이 두 사람을 부른 것도 매일 같이 남매의 아버지인 프레데릭 후작이 아그네스에게 편

지를 보내, 동생의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직접 만나 달라는 애탄 요청을 해 온 것도 한몫했

다.

아그네스는 황실의 예법에 걸맞게 흠잡을 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마신

뒤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다름 아니라, 오늘 그대들을 여기까지 먼 걸음을 하게 한 연유가 있네.”

아그네스는 뜸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부러 바쁜 시간을 내어 찾아와준 두 사람을

위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아끼던 시녀가 둘이나 개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었지. 급작스럽게 손이 부족하게 되

었어. 괜찮다면 잠시만이라도 그대들이 날 도와줄 수 없나 해서 말이야.”

이미 만나기 전부터 두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이상의 호감을 갖고 있던 아그네스였다. 실제로

만나보니 그녀가 예상한 바와 다르지 않게 괜찮은 아가씨들이라 마음에 들었기에 곁에 두고

좀 더 알아가고 싶었다.

나넬과 사샤는 생각지도 못한 황태자비의 제안에 놀란 표정을 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녀라니. 오늘 처음 본 황태자비의 제안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이면서 의아했다.

어찌 되었든 사샤로서는 놀랍기도 하고, 살면서 다시는 받아보지 못할 권유였지만, 그녀가

지금 황실에 들어와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껏 호의를 갖고 해준 제안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사샤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조

심스레 열었다.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황송하게도 저는 제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가 있어서….”

이 역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아그네스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여전히 호의적인

미소를 유지했다.

“그에 대해서도 들었다네. 시어도어와 사업을 함께 하고 있다고.”

“아, 네.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사업이라고 하기엔 너무 규모가 소박합니다.”

“내가 그에 흥미가 있어.”

“네?”

“시어도어가 자네의 영지에서 나왔다는 말린 과일을 가져온 적이 있지.”

헤른 영지의 청귤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시어도어는 그런 얘기를 사샤에게 한 적이 없었는데

. 사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내가 도울 테니까.”

아그네스는 사샤가 움찔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고 빙긋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커피도 들여왔다지, 오스만 제국에서?”

아그네스도 서 제국에 오기 전 본가에서 공부를 할 때, 커피의 존재에 대해 책에서 읽은 적

이 있었다.

꽤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그 당시 프레데릭 후작가는 오스만과 교류를 하고 있지 않았고, 그

녀도 곧 황태자와의 결혼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 걸 이 아가씨가….

상당히 사업 수완이 좋은 아가씨야. 프레데릭 가와 결이 맞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프레데릭 가문도 상업이 천시되었던 과거부터 발 빠르게 대응하여 부를 쌓아왔다. 고상하기

만 한 귀족 영애보다 어쩌면 더 시어도어의 짝으로 어울릴지 몰랐다.

“티 파티 때 귀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네의 커피를 대접해보면 어떨까. 아직 낯선 음료라

지만, 황태자비의 시녀가 대접을 한다면 그들의 시선도 조금은 달라질 거야.”

아그네스는 우아하게 양손을 모으고 턱을 들었다.

“나도 꽤 궁금하고.”

황태자비의 말은 사샤의 구미를 돋웠다.

어떻게 생각하면 큰 기회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커피가 성공해서 알렌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안나도 가게 운영에 많이 익숙해져서 짧은 시간 정도야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꾸릴 수 있을

듯했다.

“한 달 정도만 부탁하지.”

한 달이라면 아주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한 주에 한 번 정도 가게에 다녀가고….

사샤는 여전히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넬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넬로서는 황태자비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백작 영애로서의 위치도 그렇고, 시

어도어의 누이의 부탁 아닌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사샤는 훨씬 중요한 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일이 잘 풀려야 다시 앞으로 나아

갈 수 있다.

그렇게 결심한 사샤는 침을 꿀꺽 삼키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를 높이 평가해주시어 황태자비 전하의 시녀라는 황송한 직책을 권해주셔서 정말로 영광

입니다.”

황태자비의 녹안이 물끄러미 사샤를 바라보며 다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헤른 영지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게도 막 시작한 터라 조금 정리가

필요합니다. 혹시 저에게 일을 정리하고, 또 생각할 시간을 조금 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도록.”

긴장했던 것이 우스울 만큼 시원스러운 수긍이었다.

“편하게 대답해도 되네. 시녀란 벗과 같은 존재야. 나 역시 그대들과 조금 말을 섞어 보고

싶어 제안한 거니까. 어려운 자리일지 모르지만 편한 마음으로 오게.”

“배려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그네스는 물끄러미 웃었다. 그 미소가 시어도어와 많이 닮아 있어서 사샤와 나넬은 어렵기

그지없는 황태자비에게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다.

* * *

“나넬, 괜찮아?”

“네, 이것도 새로운 경험이죠. 제가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황성 생활을 해보겠어요.”

나넬은 꽤 즐거워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황성에서 시녀 생활을 하

는 건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니까.

“게다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황실에 대한 정보는 많이 부족했거든요.”

나넬은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아, 나넬은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지. 너무 부끄럽고 부족하다고 절대로 보여주진 않지만.

로맨스 소설 집필을 위해서는 황실과 황족에 대한 정보 수집이 필수인데, 자신은 그런 부분

이 너무 부족해서 안 그래도 고민이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넬로서는 이래저래 영광스러우

면서 기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알렉산드라 양.”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사샤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목소리가 들리

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샤에게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오페라 극장에서 봤던, 자신을 밀레나에게 데리고 갔던 여인이었다. 사샤는 숨을 삼키고 대

답했다.

“무슨 일이시죠.”

“1황녀 밀레나 전하께서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그때처럼 여인은 억양 없는 딱딱한 어조로 부탁이 아닌 명령을 하고 있었다.

나넬은 겁먹은 눈빛으로 사샤를 올려다보았다. 사샤의 표정은 갑작스러운 황녀의 부름에도

의아하거나 의도를 궁금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나넬, 잠시….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겠어?”

“아, 네. 그럴게요.”

사샤는 오히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여인의 뒤를 따랐다.

나넬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사샤의 뒷모습을 쫓고 있을 때, 사샤는 한순간 고개를 돌려 나넬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 모양으로 한 말을 읽은 나넬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    괜, 찮,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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