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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웃어 보이려는 사샤와 달리, 시어도어는 마치 죄인 같은 표정을 하고 그녀의 시선을 피
하고 있었다.
사샤가 부탁한 건에 대해 시원한 답을 들고 오지 못한 미안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왠지
과하게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다.
사샤의 물음에 시어도어의 아름다운 녹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시어도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가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돼 반짝였다.
유달리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어느새 사샤까지 긴장하게 되었다.
“…그게 있잖아.”
시어도어가 한숨을 푹 쉬며 꺼낸 말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황태자비께서 절 보고 싶어 한다고요….”
시어도어의 누이인 황태자비가 나넬을, 게다가 나넬 뿐만 아니라 사샤까지 보고 싶어 한다니
.
남동생이 서 제국이 들썩일 만큼 공개적으로 연애를 하고 있으니 그 연인을 만나고 싶은 건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지만, 어째서 나까지?
“네게도 초대장을 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지금 에른스트에 있다는 걸 밝히기가 좀 그래서, 내
가 대신 받아 오긴 했어.”
시어도어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품속에서 주섬주섬 봉투를 하나 꺼냈다.
만지자마자 느껴지는 촉감이 대단히 부드럽고 고급스러웠다. 봉투에 배어있는 은은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그 위에는 황금색 인장이 찍혀있었다.
사샤는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정갈하면서 깔끔한 글씨체로 적힌 정중한 문구는 시어도어의
말대로 황태자비가 직접 사샤를 황실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왜 저를요?”
“……정말 미안하다.”
시어도어는 고개를 푹 숙여 사샤에게 꾸벅 사과를 했다.
“누님은 내가 나넬과 위장 연애를 하는 중이란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조금 착각하고 계신
것 같아. 내가 마음에 둔 사람이 너라고.”
“아….”
시어도어의 말을 미루어보아, 황태자비께서 시어도어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을 사샤라고 생
각하고 초대장을 보낸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어도어가 서 제국에서 친하게 지내는 여인은
나넬과 사샤, 둘 외에는 달리 없다고 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도 돼. 급한 건 아니야.”
시어도어는 두 손을 들고 안심하라는 듯 제스처를 취하더니 눈빛이 조금 흔들리며 이내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사실 좀 급하긴 해. 내일 초대하셨거든.”
“내일이요?”
“응. 너무 급하지…. 네가 이런 상황이니 내일은 나넬만 가도 괜찮아, 나넬도 그렇게 전해달
라고 했고.”
한번 마음먹으면 최대한 빨리 해치우고 싶어 하는 조급함은 프레데릭 가문의 유구한 전통이
었다.
황태자비로서 평소에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 차분하고 정숙하려 노력했던 황태자비도 본성을
숨기기 힘든지 시어도어에게 두 사람을 최대한 빨리 만나고 싶다며 은근히 채근했다.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면목이 없는 시어도어에게 재촉까지 할 뻔뻔함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사실 오늘 나넬도 같이 오고 싶어 했는데, 황태자비 전하의 초대장을 받자마자 언니들에게
붙잡힌 모양이야.”
시어도어는 그제야 나넬과 함께 오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랑앤첸 백작가는 황태자비의 초대장을 받자마자 그야말로 난리가 일어났다. 황태자비가 막내
를 초대하다니.
정작 나넬보다 언니들이 더욱 신이 나서 당장 고급 화장품으로 피부를 관리해야 한다느니,
머리 모양을 바꿔야 한다느니, 드레스를 더 사러 가자느니 하며 그녀를 도무지 놓아주려 하
지 않았다.
“당장 내일모레라니, 갑작스럽긴 하지만.”
시어도어는 자신이 더욱 미안해 어쩔 줄 몰랐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납치의 주범도 잡히지 않았고, 가게도 다시 열어야 하고, 마법사의 탑의
진척 상황도 궁금했다. 그러는 와중에 황태자비의 초대라니…….
물론 가능하면 가고 싶지 않았지만 황태자비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샤 자신을 직접 지목하기
도 했고, 나넬 혼자서만 보내는 건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에 잠겼던 사샤는 여전히 멋쩍게 뒷목을 만지작거리는 시어도어를 살폈다.
시어도어 역시 사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고 애써서 조사까지 해줬는데, 그동안 그에게 받
은 도움을 돌려줄 수 있다면 그녀로서도 기쁜 일이었다.
“그래도 가야죠. 바로 답장을 보낼게요.”
“…정말 고맙다. 번번이 신세만 지는군.”
“아니에요, 시어도어 씨도 제 부탁으로 열심히 움직여 주셨잖아요.”
“성과도 없었는걸. 휴, 아무튼 이 은혜는 잊지 않을 테니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는 시어도어를 보고 사샤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걱정 마세요. 이번 기회로 황성도 가보고. 제게는 다시 안 올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해주면 나로서는 너무 고맙지만.”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황태자비 전하는 시어도어 씨의 누님이시니까 좋은 분이시라
고 믿어요.”
“…고맙다.”
시어도어는 눈을 반달 같이 접으며 사샤에게 웃어 보였다.
시어도어의 가족이니 좋은 분이겠지만, 그가 이렇게 쩔쩔매는 걸 보면 무서운 분일 것 같기
도 하고….
사샤도 그를 따라 웃으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꾹꾹 눌렀다. 등줄기에서 왠지 긴장으로
땀이 한 줄기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가게에서 에른스트 공작가로 돌아온 사샤에게 저녁 식사를 가져다준 사용인은 처음 보는 여
자였다.
사샤의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 사용인은 사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끌고 온 카트
위에 있던 음식을 테이블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접시를 테이블 위에 전부 옮기고 나서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접시.”
“네?”
“접시 아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둘만 있는 방임에도 불구하고 사용인은 사샤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말했
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렇게 덧붙인 사용인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사샤가 대답할 새도 없이 방을 나갔다.
접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 앞으로 왔다. 저녁 식사 메뉴인 파스타가 둥그렇고 커다
란 접시 위에 먹음직스럽게 담아져 있었다.
흰 접시를 살짝 들자 아래에는 작은 쪽지가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조심스레 쪽지를 펼친 사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두 팔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랫입술을 깨문 사샤는 쪽지를 그대로 쥐고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세요?”
지나가던 다른 사용인이 급한 걸음으로 뛰어나온 사샤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아, 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사샤는 뭔가를 깨달은 듯 잠시 머뭇거리던 눈빛이 차분해졌다.
“…아닙니다. 물을 좀 갖다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샤는 저녁 식사에 거의 손대지 못했다. 한참을 방 안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어느새 마음을
먹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한 손에 치맛자락을 쥔 사샤는 빠른 걸음으로 공작 집무실을 향했다.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의 문이 열리
고 칼라일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공작님을 뵈러 왔어요.”
“알렌 님은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언제쯤 오실까요?”
평소와 달리 조급해 보이는 사샤의 모습에 칼라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공작께서는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서 가셨는데 이야기가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칼라일은 사샤의 안색을 흘긋 살폈다.
“……공작님께서 오시면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급한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사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 안에 오실 것 같은데. 여기서 기다리시겠습니까.”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요, 일하고 계시는데.”
“아닙니다. 저도 하루 종일 글자만 들여다보고 있어서 누군가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떨까요.”
“저는 좋죠.”
달그락, 소리가 나며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은 사샤가 입을 열었다.
“알렌…. 아니, 공작님을 보좌하신 지 얼마나 되신 건가요?”
“에이든 가는 3대째 에른스트를 섬기고 있어 어렸을 때부터 알렌 님을 모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힘들지 않으셨나요?”
“좋았습니다. 알렌 님은 모시기 아주 어려운 분은 아니고, 선대 공작께서도 온후하셔서 그저
사용인일 뿐인 제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두 분이 아카데미를 함께 다니셨다고요.”
“네. 제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셔서요.”
황실 아카데미는 귀족 자제들도 시험을 보고 들어오는 까다로운 곳이기에, 칼라일 같은 보좌
관은 학생이 아닌 사용인으로서 학교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하지만 레오폴드 공작은 칼라일의 능력을 높이 사서 알렌과 동등한 자격으로 아카데미에 입
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물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졸업까지 내내 우수한 성적을 받은 것은 칼라일의 능력
이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칼라일은 더더욱 충성스럽게 자신의 평생을 에른스트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
했다.
칼라일은 찬찬히 사샤를 응시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그동안 알렌 님께서 대단한 가문의 영애와 결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
“어쨌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분이니까요. 가문을 위해서라면 정략결혼
에 대해서 전혀 거부감이 없으셨기에, 조만간 가장 에른스트에 도움이 될 여인을 옆에 두실
거라고 생각했죠.”
사샤는 말없이 칼라일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칼라일은 눈앞의 차가 식어가는 것을 연연하
지 않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푹 빠져서 앞도 뒤도 재지 않고, 달려드는 주인의 모습을 볼 거라고는.
사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채 칼라일의 다음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래서 기쁩니다.”
이 여인이 어느새 자신의 주인은 물론, 자신마저도 조금 바꿔놓은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
며
“알렌 님께 이렇게 간절히 원하고, 갈망하는 당신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그런 바보 같은 모
습을 지켜보는 요즘이 전 행복합니다.”
칼라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샤가 봤던 칼라일의 모습 중에서 가장 밝고 상
냥한 표정이었다.
“부디 저의 주인을 행복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칼라일은 고개를 숙였다.
사샤의 코끝이 찡해졌다. 정말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에 빠져 행복한 모습을 바라볼 때의 충
만함이 얼마나 큰지. 자신도 알 것 같았기 때문에.
‘그날 마르가리타가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는지 나도 봤는걸.’
“사샤?”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며 알렌이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알렌은 외투를 벗어 걸어두고 사샤와 마주 앉았다. 사샤가 이 시간에 찾아온 것은 반드시 뭔
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칼라일 씨도 같이 들어주셨으면 해요.”
사샤는 품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아까 사용인이 건넸던 쪽지였다.
그리고 그녀가 시작한 이야기에 알렌의 푸른 눈동자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대
화는 깊은 밤이 되도록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