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사샤는 방금까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죽을 떠먹여 주던 남자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은 삼켰
다.
당신이 날 여덟 번이나 죽였고, 어찌된 연유인지 당신의 손에 죽을 때마다 직전으로 회귀했
었다. 그런데 날 납치했던 남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그 남자의 비밀을 파헤쳐
달라, 라고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샤는 차선으로 그녀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비밀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기억?”
얼떨떨한 얼굴로 되묻는 알렌을 향해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아주 어릴 때부터 늘 같은 꿈을 꿨어요. 꿈에서 저는 이곳과는 모든 것이 다른 세계에
서 살았죠. 착각이나 환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하고 확실해서, 결국엔 제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아마도 전생의 기억일 거라고요.”
“….”
그녀가 갖고 있는 비밀이 이거였나.
알렌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고 알렌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고민에 빠져있는 모습조차 아름다워 사샤는 그의 섬세한 얼굴의 선과, 그에 대조되는 탄탄한
상체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겼다.
“네 말을 믿어.”
모양 좋게 다물려 있던 입술을 떼어지자 듣기 좋은 중저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그가 저렇게 다정해졌을까.
사샤는 어쩔 수 없이 또 죽음 직전에 보았던 잔혹한 살인마였던 소공작과, 신뢰와 애정이 듬
뿍 담긴 시선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앞의 알렌 폰 에른스트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사샤는 두 손으로 이불 끝을 모아 쥐었다. 머릿속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괴로운 기억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젓자, 알렌의 손이 그녀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눈빛이 전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흘러넘치는 감정 같은 것을.
“커피도 전생의 지식으로 안 거야?”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
알렌은 시선을 잠시 아래쪽으로 두었다 다시 천천히 사샤를 향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냐고 나의 마법에 대해서 물어본 것도 그런 이유였나.
그녀의 말에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다른 이들과 다른, 어딘가 독특한
그녀의 분위기라든지.
“친구에게는 편지를 쓸게. 최대한 빨리 너를 만날 수 있게.”
사샤는 알렌의 말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분간 가게는 여기서 출퇴근하는 게 어떨까? 한동안이라도 호위가 필요할 것 같으
니까.”
알렌의 말이 옳았다.
물론 가게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대로 그냥 가면 자신뿐 아니라 안나가 또다시 위험해질지
몰랐다. 알렌의 호의를 기꺼이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샤는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고마워요.”
“가게에서 일할 때는 네 친구인 삼촌께 부탁하면 좋을 것 같고.”
“그렇게 하면 코발레프 삼촌도 좋아할 거예요.”
“아직 이런 상황이지만, 그래도 네 가게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존중해.”
네가 갖고 있는 희망이나 미래를 저버리면서까지 무조건 에른스트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
고 말하고 싶지 않아.
그건 널 가둬두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
“뜻대로 넌 너의 가게를 지켜. 난 널 지킬게.”
알렌은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 * *
알렌의 연락을 받은 막시밀리안이 다음 날 바로 에른스트 공작가에 직접 찾아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렌에게 막시밀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했다.
마법사의 탑에 사샤 같은 일반인의 출입은 상당히 까다로울뿐더러 일전에 말했던 특이한 마
법사들이 사샤에게 눈독을 들이면 귀찮아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사샤의 이야기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아주 생생하게 전생의 기억이 있다는 거죠?”
“네. 아주 어릴 적부터 확신하고 있을 만큼 생생하고 강렬해요. 여기서 사는 감각만큼이나
.”
“……그런 마법은 처음 들어봐요. 정말로.”
막시밀리안은 막혔던 말문이 열리자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가 가진 마법은 바람 계열로, 마탑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발에 채일 만큼 많다고 할 정도로
흔한 능력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실무적인 것보다는 보통 다른 마법사용자의 마법 연구를 보조하는 역할이나
마법의 역사에 대해 탐구하는 이론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막시밀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알렌의 게이트 연구를 보조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마법의 역사에 대해 정리하고 개괄하
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더욱 사샤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유례없는 특이한 경우는 단독으로 연구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얘기하면 미친 여자로 몰 게 뻔해서, 그동안은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미치지 않았고, 명백한 사실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 만큼 제 안에서는 명확한 기억이에요.”
시리도록 덤덤하게 말하는 사샤와 달리, 알렌의 얼굴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스몄다. 사샤가
어째서 지금까지 철저하게 숨겨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의 말을 신뢰합니다. 다만 이전에는 없던 일이기에 놀랄 뿐이에요. 하지만 오히려 그래
야 의문이 해결되는 부분도 있고요.”
막시밀리안은 한 손을 턱에 괸 채 고민에 빠졌다.
“난 마법사이기 때문에 이런 일 역시도 마법의 영역에서 해결하고 싶은 게 본능이야.”
“….”
“사샤 양, 저는 당신의 발언과 신변에서 일어난 일을 전부 마법이라고 가정하고 조사하겠습
니다.”
“네, 부탁드려요.”
사샤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막시밀리안은 그 모습에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무릎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상황을 파악했으니 저는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게이트로 오면 금방인걸요.”
막시밀리안은 호의를 담은 미소를 띠었다. 알렌이 마음에 둔 여인은 보고 있으면 상대에게
자연스럽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목숨이 위험할 뻔했던 일을 당하고도 저렇게 씩씩하고 강단 있는 모습이라니. 친구인
알렌을 위해서 같은 것을 떠나, 자신 역시도 조금이나마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용건만 보고 가야 하는 상황이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한시가 급했기에 막시밀리안은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현 상황에 대해 파악했으니 조사에 탄력이 붙으리란 기대가 생겼다.
사샤와 악수를 나누고, 알렌의 어깨를 치며 조만간 만나자는 말을 남긴 채 막시밀리안은 다
시 마법사의 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에른스트의 저택을 나왔다.
공작가의 정원 끝자락에 설치한 게이트가 열리고, 막시밀리안이 빛이 나는 가운데로 한쪽 발
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막시밀리안.”
언제 뒤쫓아 왔는지 등 뒤에서 알렌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 인사도 했는데 뭐 하러 굳이 여기까지 왔어, 바쁘신 몸이.”
막시밀리안이 짓궂은 어조로 농담을 건네었지만, 알렌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조심해, 꼭.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아.”
아무래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일부러 그를 쫓아왔다. 앞으로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 생각보다 더 위험할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그를 지배했다.
막시밀리안 역시 한층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 최대한 몸 사리면서 할 테니까. 뭔가가 잡히면 바로 연락하도록 하지.”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갈 테니 꼭 불러.”
“난 괜찮아, 넌 사샤 양부터 지켜줘.”
막시밀리안은 알렌에게 한쪽 손을 들어 보이고 게이트 속으로 사라졌다.
* * *
사샤는 안나와 가게를 다시 열 준비를 했다. 괴한들로 인해 엉망이 되었던 가게를 정리하기
위해 꿋꿋하게 몸을 움직였다.
앞으로 가게에서 함께 일하며 두 사람을 지키기로 한 코발레프는 물론, 당분간 에른스트 가
의 기사들이 가게의 주변을 돌면서 경호하기로 했다.
가게는 생각보다 훨씬 깨끗했다. 알렌이 엉망이 된 가게를 정리하도록 명했기 때문이었다.
직접 해도 되는데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나머지는 가게 주인의 손이 직접 닿아야 하는 부분이었기에 사샤와 안나는 소매를 걷어붙이
고 다시 아무 일도 없던 평화로운 가게로 되돌리기 위해 몇 시간을 공들였다.
이전보다 더 깔끔하고 새것같이 반짝이는 가게를 보자 두 사람은 그때야 안심한 듯 한숨 놓
았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그때 아까까지 열심히 함께 일하다 갑자기 보이지 않던 코발레프가 가게에 돌아왔다. 그는
품에 먹을거리를 잔뜩 안고 왔다.
“밥부터 먹고 합시다. 힘내는 데는 고기가 최고지.”
“언제 사 오셨어요? 좋아요.”
“잘 먹겠습니다.”
세 사람이 빵에 두툼한 고기를 끼워 식사를 마쳤을 때, 가게 문이 열리며 익숙하게 긴 실루
엣이 드리워졌다.
문을 열며 들어오는 남자의 고개가 들리자 까만 머리카락이 찰랑이면서 밝고 아름다운 녹색
눈이 보였다. 그가 손을 들며 사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에른스트에 갔는데 네가 여기 있다길래 왔어.”
“진짜요? 헛걸음하시게 했네. 어떡해요.”
“아냐, 금방인걸. 멀지도 않고.”
“오늘은 나넬이 같이 안 왔네요.”
“아, 나넬은 오늘 좀 바빠서.”
시어도어는 뭔가가 생각난 듯 말끝을 흐리며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사샤와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시어도어의 녹색 눈동자가 슬쩍 안나와 코발레프를 향했다.
“사샤의 방에 내가 들어갈 수는 없으니. 두 사람이 잠시….”
“네, 그럼 저희는 잠시 나갔다 올게요.”
시어도어는 말끝을 흐렸지만 눈치 빠른 안나는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이고 멀뚱
히 서 있는 코발레프의 등을 밀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우리는 시장에 장이나 보러 가요.”
“그, 그래? 그럽시다. 사샤, 다녀오마.”
안나와 코발레프가 가게를 나가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시어도어는 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네가 말한 그 점을 치는 여인에 대해서는 찾는 일이 쉽지 않군.”
시어도어는 깍지 낀 손을 턱에 걸친 채 그가 찾아온 용건을 위해 입을 열었다. 사샤의 눈빛
이 금방 진지한 빛을 띠었다.
“대부분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사는 이들이고 오히려 수도에 적을 두는 걸 꺼린다고 했어
. 언제 어떤 트집이 잡힐지 모르니 말이야. 이렇게 축제가 열리는 시기에만 모여서 돈을 벌
고 또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니까.”
집시들의 특성에 대해서는 사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찾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하
고 있었기에 사샤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감옥에서 자신이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그날 보았던 여인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점을 보러 갔던 나넬과 시어도어에게 부탁한 것뿐이었다.
조금 더 생각해본 후에 정말 확신이 생긴다면 알렌에게 부탁하리라 마음먹었다. 사실 사샤는
점을 쳐주는 여인을 만나고 싶기도 하고 그러지 않고 싶기도 했다.
알렌이 그녀를 찾았다가, 이상한 얘기라도 들어 버릴까 봐. 솔직히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아직 남아있는 몇몇 이들에게 물어봤지만 역시 모르는 눈치였어.”
“힘써주셔서 감사해요.”
결국 다시 제자리걸음이다. 납치 사건의 내막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사샤는
씁쓸함을 감추려 일부러 더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시어도어 씨는 안색이 왜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