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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80화 (80/101)

80.

사샤가 의식을 회복한 건 꼬박 이틀이 지나고 나서였다.

달빛이 내려앉은 새벽이었다. 오랫동안 무겁게 감겨있던 눈이 떠지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천

장이 시야가 먼저 들어왔다.

에른스트 공작가에 있을 때 사샤가 있던 방의 천장과 비슷한 형태였다.

사샤는 눈동자를 조금씩 굴리며 달빛이 들어와 밝아진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빛이라고는 한

줌도 들어오지 않던 축축한 지하 감옥과 완전히 달랐다.

사샤의 전신을 덮고 있는 이불은 정성스럽게 빨아서 햇볕에 말린 포근한 냄새가 났다. 푹신

한 침대, 적당한 높이의 베개까지. 전부 부드럽고 따뜻하게 사샤를 감싸 안고 있었다.

널찍한 방에는 생활에 꼭 필요한 몇 개의 가구만이 있었지만 쓸쓸해 보이지는 않았다.

가구 하나마다 장인이 공들여 만든 정성이 느껴지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예술품에 가까운 것

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누워 있는 곳이 알렌 폰 에른스트 공작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사샤의 갈

색 눈이 깜빡이며 속눈썹이 흔들렸다.

침대 옆의 테이블에는 서류 더미가 있고 그 위에는 펜이 놓여있었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

로 바람이 불자 서류 끝자락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바닥에 깔린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그 끝에는 침대 모서리에 엎드린 채 잠든

알렌이 있었다.

알렌은 그녀의 옆에서 내내 간호를 해주며 의식이 깨어나길 기다린 것 같았다. 일도 식사도

모두 이 방에서 해결하면서.

그를 만나자마자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몰려와 알렌의 품에 안긴 이후부터는 기억이 흐릿했

다. 알렌이 기절하듯 잠든 자신을 이곳에 데리고 온 게 분명했다.

안나 언니는 괜찮을까…. 그리고 가게도 며칠이나 문을 닫았겠지. 사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 먼저 걱정을 했다.

사샤는 상반신을 일으키고 자리에 앉았다. 목에서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져 고개를 숙여 확인

해 보았다. 알렌이 줬던 목걸이가, 안나에게 넘겨주었던 그 목걸이가 다시 걸려 있었다.

“사샤…?”

그때, 알렌이 인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의식을 되찾은 사샤가 침대에 기대고 앉아 그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띠웠다.

“알렌.”

그녀가 자신을 부르자, 알렌은 다급히 사샤의 머리맡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며 떨리

는 목소리로 물었다.

“몸은, 몸은 좀 어때?”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리도 괜찮고….”

알렌이 불러온 황실의 치유 마법사가 그녀의 다리에 난 상처를 깔끔하게 치료해주었고, 사샤

가 독 계열 마법에 중독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함께 확인할 수 있었다.

당장의 생명이 위험할지 모르는 마법에 당한 건 아니라지만 아직 비밀은 풀리지 않았을뿐더

러, 결국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사샤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깨끗해진 다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어

다시 알렌과 마주했다.

“….”

알렌은 죄책감이 어린 눈빛으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괴로운 듯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

렸다.

애써 아무렇지 않으려고 했지만 우울한 낯빛이 다 감춰지지 않았다.

이 남자는 내가 없는 동안 수도 없이 자책했겠지. 혼자서 계속 무너져 내렸던 걸까. 납치를

당했던 사샤 이상으로 안색이 초췌한 그를 보자 사샤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물을 좀 마실 수 있을까요.”

“…그래.”

알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빈 컵에 물을 따라서 내밀었다. 사샤는 알렌에게 받은 잔을 두 손으

로 들고 달게 마셨다.

물 넘기는 소리가 들리며 바닥이 드러나자 알렌은 잔을 받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갈증이 가시자 숨을 크게 몰아쉰 사샤는 그제야 윤기가 도는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많이 놀랐죠.”

“….”

“많이 놀랐을 거예요, 걱정도 했을 테고….”

사샤의 물음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파도가 되어 알렌을 덮쳤다. 그는 울컥하는 감정을 억지

로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서웠어요.”

사샤의 목소리는 오히려 아주 담담했다.

숨쉬기 어려운 사람처럼 불안정한 호흡을 내뱉는 건 알렌 쪽이었다.

그만큼 그날의 경험을 거리를 두고, 내가 겪었던 게 아닌 것처럼 말해야 덜 괴롭게 느껴졌다

. 마치 타인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덤덤한 어조가 오히려 알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사샤가 어떤 고통을 느꼈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괴로워 알렌은 차마 말

이 되어 나오지 않아 무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해되지 않고, 너무 두렵고. 마음이 흔들렸어요.”

차분하고 또렷한 사샤의 음성이 방안을 채웠다. 감았다 뜬 눈동자는 폭풍우가 지나가고 깨끗

해진 숲처럼 고요했다.

“당신을 많이 생각했어요.”

사샤가 천천히 읊조리는 말을 따라 알렌의 어깨가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며 두 눈이 점점 흐려

졌다.

눈물로 젖은 푸른 눈동자가 소름 끼치게 맑고 아름다웠다.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두 손을 움켜쥔 그의 무릎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샤의 귓가에 감옥에서 들었던 남자의 속삭임이 울렸다.

-   당신만 회귀한 거라고 생각하지 마.

기분 나쁠 정도로 끈끈하게 들러붙으며 옭아매는 목소리는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하염없이

맴돌았다.

-   네가 진짜로 경계하고 미워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잘 생각해봐. 귀여운 사샤 양.

사샤는 초점이 흐려지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고 입을 열었다.

“알렌, 무슨 말이라도 해주지 않을래요.”

내가 그 빌어먹을 자식의 말을 전부 잊어버릴 수 있게. 내 귓가를 당신의 목소리로만 채울

수 있게.

“뭐든 좋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알렌은 젖은 얼굴을 들고 다시 사샤와 눈을 마주했다.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가까스로 입

을 열었다.

“……고마워.”

사샤의 손끝이 기분 좋게 떨려왔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사샤는 제자리에서 알렌을 향해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알렌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순순히

그녀에게 다가오자 사샤는 그를 이끌어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게 했다.

알렌이 자신의 품에 들어오게 껴안은 사샤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알렌에게서 나는 기분 좋

은 향을 맡자 저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알렌은 젖어 들었던 사샤의 어깨가 마를 때까지, 술렁이는 가슴이 잦아질 때까지 그

녀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 * *

에른스트 공작가의 주치의는 갑자기 너무 큰 스트레스와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한 영양실조

로 의식이 흐릿해졌다고 하며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할 것을 권고하고 약을 지어주었다.

사샤가 정신을 차렸다는 얘기를 듣자,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머무르고 있던 안나와 코발레프

가 급하게 뛰어왔다.

두 사람은 일어나 있는 사샤를 보자마자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기뻐했다.

“신이시여, 정말 감사 합니다….”

안나는 부족한 신앙심을 끌어모아 성호를 그리면서 신께 감사 기도를 했고, 코발레프는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 사샤….”

“언니…, 아저씨.”

안나는 눈물을 삼키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사샤…. 혼자 그렇게 사샤를 두고 가버려서, 정말, 미안해.”

결국 격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안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아무리 사샤가 가라고 했어도,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그녀를 두고 가버린 자신을 몇백 번,

몇천 번 자책했다.

“언니, 제발. 그러지 말아요.”

“사샤….”

“언니가 이렇게 에른스트 공작께 도움을 청해줄 걸 알고 있었어요. 언니가 날 살린 거예요

.”

사샤는 안나의 떨리는 두 손을 꽉 잡고 눈을 마주했다. 안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도 떨림을

막지 못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말아요. 언니는 제 은인이에요.”

안나가 빨리 에른스트 공작가에 전달해준 덕분에 알렌이 발 빠르게 움직여줄 수 있었을 것이

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나가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했다

.

“나쁜 건 그 사람들이지, 언니가 왜 그래요. 괜찮아요, 괜찮아.”

사샤는 안나의 손등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코발레프에게 눈길을 향했다.

“코발레프 아저씨도 정말 고마워요. 많이 걱정했죠.”

“사샤, 나는. 이번에….”

너까지 잃어버리는 줄 알고. 코발레프는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리타가 남긴 소중

한 아이. 내가 지켜줘야 하는데, 가게에 붙어 있을 것이지 멍청하게 이곳저곳 쏘다니기나 했

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난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더 이상 두 사람을 그대로 두면 눈가가 짓무를 때까지 울 것 같았다. 사샤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씩씩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안나 언니, 코발레프 아저씨. 정말 고맙고 정말 좋아해요.”

두 사람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용인이 다시 문을 두들겼다. 그녀의 뒤에는 익숙한 두

사람이 코끝까지 빨개져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넬과 시어도어였다.

사샤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양팔을 교차해서 엑스 자를 만들어 보였다.

“눈물 금지! 미안하다는 말 금지.”

“….”

“나는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다친 곳도 하나도 없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러니까, 그냥

…. 이리 와요, 두 사람 다.”

나넬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몇 번 문지르고 그대로 사샤를 향해 뛰어갔다.

울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눈물이 참아지지 않아서 나넬이 소리 없이 흐느끼는 동안 시어도어

가 사샤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살다 보니 이런 경험도…. 하는구나 싶어요.”

“범인이 누군지 아직 모르는 거지.”

시어도어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어렵게 입을 떼었다.

“네, 원래 귀족들이 암암리에 사설 감옥으로 쓰던 곳이라서 주인을 밝혀낼 수 없나 봐요.”

“그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없겠지…?”

사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에 매일 오던 사람이라는 것밖에는.”

“하아…. 어떤 개자식인지 잡히기만 하면.”

시어도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사샤는 괜찮다고 했지만 며칠간 고생한 흔적이 초췌한 얼

굴에 남아있었다.

“사실 두 사람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사샤는 이불 끝을 만지작거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잘못 본 걸 수도 있지만….”

자신을 지하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게 도와준 그 사람을, 사샤는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갇혀 있을 때, 날 구해준 사람이. 축제에서 점을 쳐줬던 사람 같았어.”

“네?”

“시어도어와 나넬이 조금,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직접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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