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목걸이를 내놓지 않으면 이 여자는 여기서 죽어.”
요한의 말투는 사샤의 가게에서 차를 주문할 때와 조금도 다를 것 없이 평온했다.
그의 원래 목소리를 변조한 낮고 어색한 음성과 나긋한 어조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
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조용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그 사람은 풀어줘.”
사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들의 목적은 안나가 아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게 목적이었으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벌일 것 없이 해치웠을 치들이다.
목표는 자신이고, 분명하진 않아도 아마 자신을 살아있는 상태로 데리고 가는 것이 목적일
거다. 그렇다면.
“목걸이도 당신들에게 못 넘겨.”
사샤는 한 손으로 목걸이를 꼭 쥔 채로 으르렁대듯 말했다.
아무리 불리한 형국일지언정 제 사람을 지키고 싶었다.
“목걸이는 언니에게 줄 거야. 지금부터 언니에게 손 하나라도 까딱하면 여기 있는 당신들을
다 죽일 거야, 어떻게 해서든.”
“저 계집이….”
뺨에 커다란 흉터가 난 남자가 과장되게 눈알을 부라리며 사샤를 노려보았다.
마법석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짜증 날뿐더러 제대로 일 처리를 하지 못해서 의뢰인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저 남자에게 약점을 잡힌 것, 마법도 없는 여자의 거짓부렁에 놀아난 이 상황이
모두 배알이 뒤틀릴 정도로 맘에 들지 않았다.
“그 여자를 풀어줘.”
사샤의 도발적인 말투에도, 일부러 흉터를 더욱 일그러트리며 험상궂은 표정으로 위협하고
있는 남자를 앞에 둬도 요한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나른한 말투로 긴 손가락을 들어 안나를 가리키며 그녀를 붙잡고 있는 다른 남자에게
명령했다.
“으….”
요한의 지시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흉터가 있는 남자의 부하에 불과한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안나를 잡고 있는 손에 스르르 힘
을 풀었다.
안나는 허둥지둥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본 사샤는 큰 결심을 한 듯 소중하게 쥐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안나 언니. 세 걸음만 나에게 와요. 딱 세 걸음만.”
남자에게서 빠져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린 안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
썩이며 울먹거렸다.
“사샤….”
“괜찮으니까.”
이런 상황에도 사샤는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저렇게 노력하고 있다.
안나는 벌벌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천천히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움직였
다.
안나가 움직이자 사샤는 얼른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그녀를 향해 던졌다.
“목에 걸어요.”
“……사샤, 으, 흐윽.”
부탁해요, 알렌에게….
남자들을 등지고 선 사샤는 안나에게 입 모양으로 자그맣게 말을 건넨 뒤 다시 앞을 향해 시
선을 던졌다.
“어서 가요, 언니!”
비통할 만큼 씩씩한 사샤의 외침에 안나는 결국 눈에 한껏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야 말았다.
두 눈을 세게 떴다 감은 뒤 눈물을 전부 떨어낸 안나는 사샤에게 받은 목걸이를 죽어도 잃어
버리지 않는다는 각오로 두 손에 힘껏 쥔 채 자리를 뛰쳐나갔다.
어서, 어서 에른스트 공작께 가야 해.
안나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지도 못한 채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앗!”
그때 정신없이 뛰던 안나는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보지 못하고 발이 걸려 자리에 나자빠졌다.
“얼른, 일어나야….”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서 일어나서 공작가로 가야 하는데
….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있던 일의 긴장으로 근육이 풀려버린 건지, 심하게 넘어져서
어딘가가 부어올랐는지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아, 안나는 일어나려고 애쓰며 온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진 채 움찔대기만 할 뿐 일어날 수 없었다.
누가, 누가 좀 도와줘. 사샤를 도와줘야 해, 사샤가 위험해요…….
“괜찮소?”
누군가 안나의 머리 위에서 그녀를 불렀다.
굵고 묵직했지만 아까까지 가게에서 들었던 그들과 전혀 다른, 편안하고 너무나 반가운 음성
이었다.
고개를 든 안나의 눈물로 흐려진 시야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아니 당신은 사샤네….”
얼마 전부터 가게에 자주 찾아오는, 사샤의 친구인 코발레프 씨였다.
안나는 울먹임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코, 코발레프 씨, 사샤, 사샤가.”
그에게 애써 상황을 설명하자, 코발레프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빨리 공작가로 갑시다, 당장.”
그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안나를 안아 들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 *
사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어딘가에 옮겨지고 있는 중이었다.
눈을 떴는데도 시야는 컴컴했다. 안대 같은 걸로 그녀의 눈을 가려놓은 것 같았다.
사샤는 남자들에게 끌려올 때 손수건으로 입을 막히자마자 정신을 잃었던 것을 떠올렸다.
남자는 사샤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풀고 그녀를 안쪽으로 던지다시피 밀어 넣었다.
“조용히 있으라고, 어차피 소리 질러도 아무도 못 듣는 곳이니까.”
남자는 가느다란 눈을 휘며 낄낄거리고는 일부러 창살을 발로 거칠게 차고 나서 자리를 떴다
.
안대로 가리고 있던 눈은 금방 어두운 풍경에 익숙해졌다. 사샤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주
변을 확인했다.
남자가 사샤를 억지로 밀어 넣은 곳은 작은 방이었다. 한쪽 벽이 시커먼 창살로 이루어진,
보통 감옥이라고 불리는 형태였다.
‘뭐지?’
사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살을 만졌다.
주저앉아 있는 딱딱한 바닥은 차갑고 축축했다.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오싹했다. 천장에서
는 물이 규칙적으로 떨어지며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멀리서 남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샤를 기절시키고 납치한 남자들이 틀림없었다
. 하지만 그녀에게 그 남자들이나 대화 내용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샤의 머릿속은 단 하나의 생각으로 정신이 나갈 듯 혼란스러웠다.
‘여기를 알고 있어.’
주저앉아 있는 사샤의 다리가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렸다.
이 촉감, 이 소리, 이 냄새.
모든 오감이 말도 안 되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 여기는….”
여기는.
내가 알렌에게 몇 번이고 죽은 그 지하 감옥이잖아…….
* * *
“재밌는 일을 하셨더군요, 저에게 상의도 없이.”
“네가 하도 꾸물거려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남자들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한데 그 소식을 요한에게서 듣게 되다니. 실패한 건가. 밀레나는 아무렇지 않으려고 애썼지
만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쉽사리 숨기기 힘들었다.
“누님이 자꾸 몸이 달아서 이렇게 성급히 행동하실수록, 저희가 바라는 장밋빛 미래가 점점
멀어진다는 생각을 하진 않으십니까?”
“네가 방해한 거지.”
밀레나는 이를 으득 갈았다. 제 편은커녕 기껏 세운 계획조차 망치려고 하는 눈앞의 남자가
이제 알렉산드라만큼 증오스러웠다.
“그녀를 돌려보낼 겁니다.”
“뭐라고?”
“돌려보낼 거라고요.”
“지금 뭐 하자는 짓이지, 요한 이그나즈.”
밀레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요한을 다그쳤다.
“어차피 조만간 에른스트에서 그녀를 찾아낼 거예요.”
요한은 조롱을 머금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꼬리가 밟히기라도 하면 여자는 해칠 수 있어도 누님이 에른스트 가문에 들어가는 건 평생
무리일 텐데 괜찮겠습니까?”
“네가 간섭하지만 않았어도 그 여자는 이미 죽었어.”
“푸흡.”
요한은 밀레나의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순진한 누님을, 정말 어떡할까.”
무슨 실수가 있었나, 물론 황녀가 직접 괴한을 수배하는 일은 위험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에마에게 몇 번이고 조심하도록 당부하여 길드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부랑자 같은
놈들로 골랐는데.
밀레나는 그의 빈정거림에도 대꾸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여자가 알렌 폰 에른스트의 마법이 담긴 마법석을 지니고 있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뭐라고?”
“알렉산드라가 항상 하고 다니는 목걸이가 있습니다. 알렌에게 선물 받은.”
밀레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요한이 말하는 목걸이를 떠올렸다.
그 여자가 공작 서임식 연회에 하고 왔던 그 목걸이. 흘깃 봤지만 대단히 좋은 품질의 보석
으로 만든 목걸이였다.
가난뱅이 평민이 그런 고가의 귀금속을 살 능력이 있을 리 없으니 알렌이 선물로 준 것임이
분명했기에 더욱 밀레나의 분노를 일으켰던 그 목걸이가.
“보석이 아니라 마법석이에요.”
“….”
“그의 공간 조작 능력이 들어가서 일반적인 물리력은 모두 튕겨낼 수 있었다고요. 누님이 고
용한 그런 허접한 협잡꾼들은 그 목걸이에 제압당하고 알렌 폰 에른스트에게 누님의 깜찍한
계획이 모두 들통이 날 뻔했죠.”
마법석이라고. 황실에서도 총애받는 황족이나 가질 수 있는 마법석을?
게다가 마법사용자가 자신의 능력을 나눠서 넣는 것이기에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꺼
리기 마련인데.
알렌은 기꺼이 그 여자를 위해서 제 능력을 넣어서 선물한 거라고.
밀레나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 여자를 돌려보낼 생각이면 지금 왜 가둬 놓고 있는 건데.”
“재미를 위해서죠.”
“뭐?”
“누님이 하려던 대로 저 여자를 갑자기 죽여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알렌 폰 에른스트 안
에서 죽은 여자가 신격화되어 영원히 아름답게 남을 텐데요?”
“…내가 곁에서 위로해주면 돼.”
“누님은 에른스트를 오래 보셨죠. 당신이 사랑하는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이 죽었다고 하
루아침에 변절하는 남자로 보이나요?”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인데. 빨리 본론을 말하라고!”
요한의 말에 인내심이 다한 밀레나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를 비난했다.
“균열을 만드는 겁니다.”
균열? 밀레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왜 그 여자와 굳이 아름답게 이별하도록 도와줍니까. 이럴 때일수록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건 따로 있는데.”
“….”
“사랑하는 연인에게 주변의 반대나 강제적인 헤어짐은 더욱 불타오르게 하는 걸 알잖아요.
우린 좀 더 똑똑하게 접근하자는 거예요. 누님이 그를 가질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현명한 방
법.”
“균열, 을 만들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