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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74화 (74/101)

74.

장미의 월요일의 저녁은 달아오른 축제의 분위기로 수도의 제국민들이 모두 들떠 있었다.

알록달록한 화장을 한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탕을 나눠주고, 어

떤 이들은 거리에서 악단의 음률에 맞춰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편한 복장을 하고 나넬과 만나기로 한 곳에서 기다리던 사샤는 멀리서 다가오는 나넬을 발견

하자 반갑게 인사했다.

“많이 기다렸어요? 언니들이랑 같이 오느라 시간이 좀 지체됐어요.”

“아냐, 나도 금방 왔는걸. 언니들은 어디 계신데?”

“모르겠어요. 무슨 공연을 보러 간다는 것 같기도 했고.”

나넬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고는 두 사람이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을 위해서 상기된 얼굴로

사샤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점을 봐주는 사람들은 골목 쪽에 많이 있대요. 빨리 가 봐요!”

그녀의 손에 끌려가듯 인파들을 헤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광장의 안쪽에 있는 어둡고 좁은 골목으로, 몇몇 사람들이 저마다 가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얼굴을 덮는 로브를 쓰고 있었고, 앞에는 작은 구슬이 빛

나고 있었다.

나넬이 데려간 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더 길게 늘어뜨린 어두

운색의 로브를 써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살짝 올라간 보랏빛이 나는 입술 끝뿐이었다.

여인은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나넬 쪽으로 고개를 살짝 향하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의 사랑은 이루어지기 힘들어.”

앞뒤가 생략된 채 대뜸 나온 그녀의 말에 나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사샤의 점을 보러 온 건데, 게다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도 없는데. 갸우뚱한 얼굴로 뭔가 물

으려던 찰나에, 여인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기다린다면, 그 사람을 너그러이 이해해주고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있어 준다면. 그

땐 어찌 될지 모르지.”

아니,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대도요….

어쩌면 잘못 온 걸지도 모른다. 역시 점이고 뭐고 사기일 거야. 나넬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여인이 녹색 반지를 낀 긴 손가락으로 사샤를 가리켰다.

“당신의 점은 쳐줄 수 없어.”

“네?”

“당신의 운명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니까.”

사샤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게 무슨 뜻이죠?”

내 운명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어쩌면 자신이 갖고 있는 다른 세계의 기억을 말하는 것일까.

“점괘란 말이죠, 당신의 앞날을 아주 잠깐 들여다보는 거야. 짙은 구름 속에서 아른아른하게

보이는 미래를 읊어주는 거지.”

여인은 사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나른한 목소리로 제가 하려는 말만을 이어갔다.

“당신의 운명이 온전히 당신만의 것이 될 때, 커다란 비밀이 모두 풀릴 때. 그때 당신의 미

래가 보이겠지.”

“….”

“그때까지 조심해요,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샤는 두 손을 움켜쥐었다.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여인의 말은 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점괘는

그저 헛소리라고 흘려들을 수 없었다. 정말로 그녀가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듯한 말에 현혹되지 말고 당신이 직접 진실을 찾아야 해.”

여인은 두 사람이 값을 치르고 자리를 뜨고 나서도 인파들 사이로 사라지는 사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나의 자매의 아이.

나의 자매의 아이지만, 더 이상 우리의 자매는 아닌 아이여.

나의 자매가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던 아이.

“그대의 앞길에 우리들 어머니의 가호가 있기를.”

*   * *

인파 속에서 유난히 키가 큰 남자 두 명이 함께 길을 걷고 있자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화려한 분장을 한 사람들 속에서도 두 사람의 깨끗하고 가지런한 이목구비는 눈에 띄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알아보며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공작님 아냐? 라고.

“뭐, 좋아.”

알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말을 꺼냈다.

“좋은 생각인 건 인정하지.”

팔짱을 낀 알렌은 손가락을 입가에 톡톡 두들기며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지 명확했다.

“사샤와 랑앤첸 백작 영애 두 사람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다니게 하는 건 위험할

수 있으니까.”

알렌이 그러거나 말거나 시어도어는 옆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입으로 불면 말려있는 풍선이

펴지면서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부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또 너와 내가 이렇게 다녀야 하지.”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테니 잘 찾아보자고, 분장을 하고 있을 수도 있어.”

시어도어는 알렌의 의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 평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귀족 영애들은 대부분 간편한 복장을 하고 나왔지만, 그럼에도 부유해 보이는 행색이나 그녀

들을 따라다니는 호위가 있어서 누구든 신분을 알 수 있었다.

몇몇 귀족 영애가 두 사람 쪽을 보며 저들끼리 속닥거렸지만, 용기를 내서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사샤와는 이야기가 잘 풀린 건가?”

시어도어는 한동안 열중해 있던 장난감에서 입에서 떼며 알렌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는.”

“황성에 함께 가기로 했겠군.”

“아직은, 아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고 했어.”

확실히 그날의 사샤는 호락호락하게 마법사에게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축제에

나올 정도로 안정되었다면 다행이지만.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은 괜찮은 거고?”

“독 계열 마법까진 아닐 것 같긴 해서. 좀 기다려 보려고.”

“…그런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사샤의 안위가 달려 있으니 조심스러워야 할

화제이기에 서로 말을 고르느라 각자 고민에 잠겼다.

알렌이 먼저 입을 열어 분위기를 전환했다.

“랑앤첸 백작 영애와 그렇게 위장 연애를 해도 괜찮은 건가.”

“그녀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줘서 말이야. 자칫하면 동 제국에 그대로 끌려갈 뻔했지.”

“그 여인에게는. 괜찮고?”

알렌이 묻는 ‘그 여인’이란 시어도어가 정말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 혼자 마음에 둔 거라서.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시어도어는 자조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잘은 모르지만.”

시어도어의 모습을 보며 알렌은 어느새 그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사내의 사랑이 가능한 이루어지길, 그렇지 못하더라도 너무 아프지 않길 바라고 있다는

것도.

“그 마음 접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렌의 말에 시어도어의 녹안이 잠시 동안 크게 뜨이더니 이내 천천히 가늘어졌다.

“그래. 고마워.”

*   * *

점을 보고 나서 사샤는 한동안 깊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샤.”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옆에 있던 나넬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알렌이 그녀

의 뒤에서 친밀함을 담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알렌. 여기는 웬일로.”

“왜 왔겠어.”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요요히 호선을 그려냈다. 그 미소를 보자 사샤는 복잡했던 마

음이 어느 정도 편해지는 느낌에 그를 따라 옅게 웃었다.

“갑자기 사람이 몰리네요.”

“불꽃놀이가 곧 시작한다더군.”

“보러 가고 싶어요!”

“가볼까, 그럼?”

사샤가 상기된 얼굴로 두 손을 불끈 쥐고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알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알렌이 사샤를 데리고 가네.”

나넬의 뒤에 서 있던 시어도어는 한 손은 그녀의 어깨에 올린 채 다른 한 손으로 두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인파 사이에서 나넬을 보호하기 위해 가까이 붙어 선 시어도어가 팔을 쭉 뻗자, 마치 뒤에서

그녀를 안은 듯이 밀착되었다.

가까이에서 시어도어의 숨결이 느껴졌을 때 나넬은 구두 속 발가락이 곱아들어 갈 것 같은

찌릿함을 느꼈다.

“잘 보여요. 알렌 님은 워낙 키도 크고 머리 색도 독특해서 금방 눈에 띄네요.”

나넬은 동요를 감추기 위해 시어도어의 말에 얼른 맞장구쳤다.

“그러게,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흘끔흘끔 저 녀석을 보는군.”

“사람들은 알렌 님뿐만 아니라 시어도어 당신도….”

나넬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시어도어의 옆얼굴이 바로 앞에 와있었다.

시어도어는 몸을 숙인 채 이마에 손을 올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좇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넬은 며칠 전 사샤가 그녀의 집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 나넬, 나 알렌을 좋아

하는 것 같아.

한참을 망설이던 사샤가 어렵게 입을 떼었을 때, 어느새 그녀의 볼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사샤의 마음은 당연히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말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나

넬은 표정 관리를 하려 애썼다.

-     그가 어제 내 방에서 자고 갔어.

-     꺅!

사샤의 폭탄 발언에 나넬은 결국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

와중에 들고 있던 찻잔이 떨어질 뻔했다.

-     아, 아무 일도 없었어.

사샤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지둥 두 손을 빠르게 내저었다.

-     내가 취해서 가지 말라고 주정을 부렸거든.

-     그, 그래서요?

-     그대로 아침까지 있어 주다 간 것 같아. 자고 일어나니 없었어.

-     어머나, 어머나….

나넬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작게 소리를 지르자, 사샤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     그에게 조만간 내 마음을 전하려고.

사샤는 어깨 아래에서 곱슬거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     알렌은 항상 내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줬는데, 난 그러지 못했어.

쑥스러워하면서도,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     그러니까 나도 그에게 말할 거야.

사샤와의 대화를 곱씹어보던 나넬은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시어도어

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무척 평온하고 쓸쓸해 보였다.

아직도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에만 고정되어 있는 그의 시선에 나넬은 마음 한구석이 쿡쿡

쑤셔 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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