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네가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린 게 몇 년이다.”
“….”
밀레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네가 직접 언질을 해 주겠거니 했지.”
“아, 아바마마.”
“당장 결혼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네가 병석에서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
“너에게 부족함 없을 만큼 가문과 능력, 인품 모두를 갖춘 영식들로 짐이 직접 골랐으니.
천천히 이들과 교류하면서 네 마음을 결정하거라.”
황제의 말대로 청혼서에 찍힌 인장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가문의 문장뿐이었
다.
밀레나도 전부 알고 있는 영식들이었다. 황제의 말대로 사교계에서도 좋은 평을 받고, 건실
한 청년들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알렌이 아닌데.
“이게 아비로서 네게 베푸는 마지막 배려이다.”
밀레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제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로서는
많은 인내와 배려를 해주고 있던 거니까.
“……정혼이 들어오지 않는 영식은 연유가 무엇이죠?”
밀레나는 아버지의 앞에서 처음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묻고 싶었으나 오래전부터 참아왔
던 물음을 토해내듯 꺼냈다.
“자격이 없거나.”
황제는 그녀의 질문에 고민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단호하게 말했다.
“황실에 해가 되거나.”
에른스트 공작은 자격도 있고, 누구보다 황실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지 않나요. 게다가, 당신
께서 그렇게 아껴 마지않으시면서요.
목전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 밀레나는 그녀가 받을 어떤 대답도 두려웠다.
…설마 황제는 알렌을 너무 아끼다 못해 그의 선택까지 존중해주려는 건가. 원래 내켜 하지
않던 그 여자를, 알렌이 그런 여자를 택하는 걸 이대로 관망할 생각인 건가.
밀레나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또다시 입을 다무는 것뿐이었다. 황실의 인형답게.
* * *
밀레나가 황제의 알현을 마치고 바삐 걸음을 옮긴 곳은 3황자 요한의 방이었다.
요한은 부드러운 벨벳 재질의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여유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요한이 입은 화이트 새틴 조끼는 금실로 화려하게 자수가 놓여있어 그의 밝은 금발과 잘 어
울렸다.
그는 밀레나가 들어와도 여전히 다리를 까딱이며 펼치고 있는 책을 덮을 생각이 없었다.
“요한 이그나즈.”
“네에, 누님.”
요한은 누이가 그를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간신히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마치 그녀를 놀리려는 듯이 일부러 말을 길게 늘이며 대답했다.
“당장 사람들을 물려요.”
요한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밀레나의 뒤에서 손을 모으고 있는 사용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들은 잠시 눈치를 살핀 뒤 꾸벅 인사를 하고 요한의 방에서 물러났다.
“왜 또 이렇게 뿔이 나셨을까요.”
“벌써 며칠 째야. 약속이 다르잖아.”
밀레나가 요한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따지자,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른하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 여자를 없애준다더니. 날 도와준다고 하고,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지?”
“….”
“그 여자의 가게에 매일 같이 방문하고 있다며?”
밀레나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가서 그를 향했다.
“설마, 너도 그 계집에게 빠진 거니?”
밀레나가 팔짱을 끼고 피식 비웃으며 빈정거리듯 말하자 요한의 눈초리가 눈에 띄게 싸늘해
졌다.
그 모습을 본 밀레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던져본 말인데, 정말로?
남동생이 어떤 여자를 품든, 누구와 결혼하든 그녀의 조그마한 관심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어차피 요한은 피만 섞였을 뿐이지 남이나 다를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마음을 품은 상
대가 그 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절대 그 꼴을 봐줄 수 없지.
밀레나는 제 안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이를 갈았다.
“뭐라고 번지르르하게 말만 해대더니 결국 별것도 아닌 계집에게 빠진 꼴이나 보여주려고 한
거니, 요한 이그나즈.”
“….”
“입이 있으면 변명이나 해봐. 네가 잘 놀리는 그 혓바닥으로 말이야.”
요한은 비아냥거리는 밀레나의 말에 조용히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손 사이로
절반 정도 보이는 요한의 한쪽 눈은 소름이 올라올 만큼 끔찍하게 웃고 있었다.
“크큭….”
간혹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뒤로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요한은 두 손을 내리고 굳게 다물
고 있던 입을 열었다.
“누님.”
그리고 그녀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대로 밀레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쾅,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세게 벽에 후려친 요한은 그대로 밀레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압니까?”
“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
“맞혀 봐요. 어서.”
요한의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강압적인 힘이 있었다. 밀레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천천히 떼었다.
“……끈 떨어진 황자.”
노골적으로 황태자의 편을 드는 귀족 자제들이 요한을 조롱하기 위해 붙인 비칭이었다.
“아니.”
“뭐 하는 거야, 요한 이그나즈.”
“말해보라고.”
요한의 눈동자는 조금의 장난기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조차도 제어 못 할 광기를
억누르고 있는 미친 짐승의 눈빛 같아, 밀레나는 솔직히 제 동생이 점점 두려워졌다.
“……무능한 셋째.”
밀레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누님은 절 정말 모르는군요.”
요한은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서 벽에 뻗어 있던 팔을 되돌려 양손으로 머리
칼을 쓸어 넘겼다.
밀레나는 아까까지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채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힐끔거렸다.
“누님, 나는요. 그놈의 역겨운 사랑놀음이 정말 싫어요.”
“….”
“끈 떨어진 황자? 틀린 말은 아니죠. 무능한 셋째? 내가 내 능력을 보여줄 기회라도 있었나
요? 그런 건 억울하지 않아.”
잦아들 듯 조용히 울리던 목소리가 들끓었다. 요한은 이제 눈빛에서 형형한 살기와 분노를
숨기지 않고 누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진짜 억울한 건! 나를 그 빌어먹을 사랑에 흔들리는 머저리라고 착각하는 거야.”
내가 내 어머니나, 누이 같은 머저리인 줄 알아?
겨우 그 잠깐의 감정 때문에 오랫동안 숨조차 참아가며 준비해 온 일을 망칠 멍청이로 여기
는 것. 그게 제일 참을 수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그딴 여자와 나를 엮지 마요, 누님.”
순간 요한의 머릿속에 제 가게의 뒷마당에서 울고 있던 사샤가 떠올랐다. 비 오는 날 잔뜩
젖어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던 미소도, 자꾸 지워지지 않는 그 빌어먹을 웃는 얼굴이
또 그를 쿡쿡 찔렀다.
그럴 리 없어.
요한은 삐뚜름히 한쪽 입꼬리를 올린 후 코웃음 쳤다.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요한은 밀레나에게 다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오픈 숄더 형태의 드레스가 드러낸 밀레나의 팔에 직접 닿은 요한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너
무나 싸늘했고,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다.
밀레나는 저도 모르게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인내심이 부족한 에른스트 공작 부인.”
요한은 밀레나를 놀리듯이 양 볼에 쪽, 소리를 내며 동 제국식 인사를 한 채 등을 돌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요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밀레나는 뒤늦게야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그녀의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그가 가고 나서야 그녀는 뾰족한 구두로 땅바닥을
세차게 내리눌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저 속을 알 수 없는 동생만 믿고 있다가 꼼짝도 못 하고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할 노릇이
었다. 내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에마.”
“오셨습니까, 전하.”
황녀의 방으로 돌아온 밀레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수석 시녀를 찾았다.
사용인들이 황녀의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도록 지켜보고 있던 에마는 밀레나가 들어오자 바쁜
걸음으로 달려와 그녀를 맞이했다.
“사람들을 전부 물려.”
“네, 알겠습니다.”
에마가 눈짓을 하자 창문을 닦고 있던 사용인들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사람을 시켜서 보석 몇 개를 돈으로 바꿔놓고.”
에마가 다가오자 그녀는 두 사람만이 있는 방에서도 목소리를 낮춰 스산하게 명했다.
“돈이면 뭐든 하는 놈들을 수배해줘.”
“…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그 계집을 내가 직접, 처리할 거니까.”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어. 요한 따위를 믿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내가 움직였어야
했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자신의 편인 에마를 보자 아까까지 그녀가 겪어야 했던 수모와 괴
로움이 불현듯 밀려와 밀레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분해.”
내가 그의 품에서 춤을 출 수 있었더라면.
“분해서 미치겠어.”
나만이 알렌의 미소를 독점할 수 있다면.
“왜, 왜 그 여자만 사랑받고 이렇게 소중하다는 듯한 대접을 받아야 해?”
그가 내 귓가에 나만이 들을 수 있게 조용한 목소리로 나직이 사랑의 말을 속삭여준다면.
내가 바라는 건 단지 그뿐인데.
왜 그 여자만 특별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야. 왜 그의 마음은 전부 그 여자에게 쏠려 있는
거야.
“내가 훨씬 먼저 알렌을 알았는데.”
밀레나는 주저앉아 자신의 머리를 잡아 뜯듯 세게 끌어당겼다.
“내가 훨씬…. 훨씬 먼저 사랑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비통한 절규에 가까웠다.
“에마. 에마…….”
어깨를 떨던 밀레나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자 그녀는 애타게 에마의 이름을 되뇌었다. 눈에
띄게 호흡이 가빠지자 에마가 허겁지겁 그녀의 곁에 다가와 안색을 살폈다.
“전하, 전하! 괜찮으세요?”
한참을 가쁜 숨을 몰아쉬던 밀레나는 고개를 들어 형형한 눈빛을 에마에게 향했다.
“나는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
그녀의 중얼거림은 이제 필사적인 다짐에 가까웠다.
“설령 내가 지옥에 간다 해도 꼭 그 여자만은 끌고 갈 거야. 내 지옥의 길동무로 삼아 주고
말겠어.”
에마는 밀레나를 꼭 끌어안았다. 에마의 품에 얼굴을 기댄 밀레나는 이제야 안심한 듯 미소
지으며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래서 그녀는 볼 수 없었다,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을 만큼 싸늘한 에마의 무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