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코발레프는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용병단 중 마음이 맞는 녀석들과 동 제국에서 장사를 했는데.”
“장사?”
“그게 그 녀석 중에 한 놈이 엄청난 사업 물품이 있다고 해서 말이야.”
사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업 수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자이다.
기껏 몸으로 번 돈을 얇은 귀 때문에 날려 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마르가리타에게도 그 때문에 매번 잔소리를 듣고는 했다.
“풍유환이라고 바르기만 하면 미인이 되고 몸매가 아름다워지는 연고가 있다고 해서.”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하도 어이가 없어진 사샤는 테이블에서 큰 소리가 날 만큼 크게 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문에 코발레프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화들짝 놀라며 진땀을 흘렸다.
“아니 그놈이 말을 얼마나 잘하던지, 나랑 다른 녀석들이 전부 홀렸었어.”
“홀려서 마수 토벌하고 받은 돈을 전부 날린 거예요?”
“….”
“거기에 전 재산도?”
“….”
코발레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무언의 긍정이 분명했
다. 사샤는 부글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되물었다.
“……설마 빚도 졌어요?”
“다 갚았다!”
“미쳐….”
갑작스럽게 두통이 몰려왔다. 사샤는 고개를 저으며 찡그린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목숨 걸고 번 귀한 돈을 도대체 왜! 아무 생각도 없이 날리고 오는 거예요.”
“금의환향해서 너랑 리타에게 자랑하고 싶었단 말이다.”
코발레프는 불쌍할 만큼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그런 걸로 부러워할 것 같아요?”
“으으, 그건 알지만…….”
“아저씨가 옆에 있어 줬으면 리타가, 공작님이랑….”
안 만났을지도 모르잖아요. 사샤는 애써 말을 삼켰다.
“…리타는 어디 있냐?”
사샤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코발레프의 눈이 진지해졌다.
“……리타는.”
사샤는 입을 달싹이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니야.”
코발레프는 리타의 이야기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아니라고 격하게 부정했
다.
“거짓말, 거짓말…….”
이내 그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무릎 꿇었다. 그의 입은 계속해서 거짓말이라는 말
만 되뇔 뿐이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코발레프의 무릎 위에 하나, 둘 눈물방울이 떨어
져 내렸다.
“마르가리타…….”
그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며 오열했다.
힘없이 바닥을 내리치던 그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의 머리를 잡고 주먹질을 하기 시작
했다. 사샤가 그의 옆에 달려와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만해요, 아저씨.”
“내가,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아저씨 탓이 아니잖아.”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코발레프를 말리던 사샤의 눈에도 또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붙잡고
이제 없는 사람을 함께 떠올리며 마음껏 슬퍼했다.
한참을 울다 정신을 차린 코발레프는 사샤가 알려준 리타의 무덤에 가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
어섰다.
그가 나가자 안나는 재빠른 손길로 가게를 정리했다,
“사샤, 전 먼저 올라갈게요.”
그 말을 남기고 안나가 올라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에 가게를 들어올 때와 다르게 잔
뜩 풀이 죽은 코발레프가 돌아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샤는 코발레프를 바 테이블로 인도했다.
“저녁 안 먹었죠? 이거 먹어요.”
사샤는 미리 끓여놨던 소고기 스튜를 코발레프의 앞에 내밀었다.
소고기 스튜는 코발레프가 평소에 가장 좋아해서, 사샤가 자주 만들어줬던 요리였다.
“고마워.”
코발레프는 사양하지 않고 숟가락을 들어 정신없이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사샤는 그런 그의 모습이 익숙한지 자연스러운 손길로 냄비에 있던 스튜를 덜어서 그가 마음
껏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빵도 더 먹어요.”
네 번째 스튜 접시를 비우자 코발레프는 배가 찬 듯 스푼을 내려놓았다.
“리타가 있는 자리.”
얼마나 울었는지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눈가는 퉁퉁 부어있었다.
“깔끔하게 잘 해놨더군.”
“여러 사람이 도와줘서요.”
소매로 대충 입 주변을 닦아낸 코발레프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타는 행복했나?”
“그렇게 예쁜 리타는 처음이었어요.”
사샤는 리타의 결혼식 얘기를 코발레프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날 리타가 얼마나 예쁜 드레스를 입었는지, 머리 위에 얹은 티아라가 햇빛에 반짝이는 모
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그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건 리타의 내내 웃던 얼굴이었다는 것도
.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래.”
코발레프는 어느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마 또 눈물을 흘리는 거겠지. 사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뒤로 돈 채 그는 코를 훌쩍였다
.
“아저씨 얘기도 했어요.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었다고.”
사샤는 힘없이 떨어진 그의 어깨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코발레프는 오른손 소매로 거칠게 눈 주변을 닦아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샤
를 바라보았다.
“정말이냐.”
촉촉한 눈 밑으로 움푹 팬 눈두덩과 주름에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코발레프는 정말로, 정말로 리타를 좋아했다.
“그럼요.”
사샤의 시원한 대답에 코발레프는 뺨에 난 깊은 흉터를 한껏 일그러트리며 미소 지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사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혼자 애썼다, 사샤.”
“헤헤.”
또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에 사샤는 숨을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용병단이 출발할 때부터 전부 이야기해줘요.”
“그래, 아마 밤을 새워야 할 게다!”
밤늦게까지 두 사람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 * *
오후가 되면서부터 사샤는 눈에 띄게 초조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멍하
니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기도 했다.
몇 시에 오겠다고 정해두지 않았기에 알렌이 언제 찾아올지 몰라, 점심을 먹고 나서부터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누구 기다리는 거예요?”
“아….”
안나의 질문에 사샤는 머쓱함을 이기지 못하고 뺨을 긁적였다.
“사실 오늘 에른스트 공작께서 방문하기로 해서요.”
“아아. 그렇구나.”
안나는 흠, 하더니 눈이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사샤, 저 오늘 친구랑 저녁 식사하기로 했던 거 말했나요?”
“그, 그래요?”
“네, 아마 오늘 아주 늦게 돌아오……. 아, 아니, 친구 집에서 자고 올 것 같아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서.”
그렇게 말하며 안나는 마음속으로 오늘 만나기로 한 친구가 부디 흔쾌히 재워주기를 빌었다.
부디 두 사람 사이에 진전이 있기를, 안나는 두 눈을 반달로 예쁘게 접었다.
알렌이 도착한 것은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편한 차림을 하고 가게로 걸어들어 오는 그의 모습에 사샤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어, 어서 오세요.”
“너무 늦었지?”
오후가 지나가고 저녁이 될 쯤부터는 사샤도 마음 편히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주 늦은 밤에 올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오리라 믿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알렌은 눈앞에 쌓인 일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그래도 남은 절반 정도의
업무는 칼라일에게 던지고 왔는데도 이미 이 시간이었다.
“에른스트 공작가는 인력 충원이 필요한 것 같아요.”
“…맘에 드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공작가 내부 사정에 익숙한 사람과만 일하다 보니 결국
칼라일이 과로에 시달리네.”
“칼라일 씨가 불쌍해요.”
“어느새 그 녀석을 칼….”
칼라일이라고 부르는 거지. 알렌은 비집고 나오려는 질투를 간신히 눌렀다.
“네?”
“아, 아니야.”
알렌은 아무렇지 않은 척 숨을 내쉬고 나서,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나도 아직 제대로 먹어본 적 없어.”
“커피 말하는 거죠?”
사샤는 안 그래도 그가 오면 커피를 내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은 다 정리해놓고 커
피를 내리는 장비만 그대로 놓아두었다.
“이거 먹으면 못 잘 텐데. 괜찮아요?”
“괜찮아, 돌아가면 칼라일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오히려 잘 됐어.”
두 사람은 엊그제 있었던 일은 언급을 피하며 다른 이야기를 천천히 나누었다.
“얼마 전에 아버지의 묘지에 다녀왔다며.”
“네. 집사님께 들으셨나 보네요.”
알렌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가끔 찾아뵐게요.”
사샤가 커피를 내리자 가게 안에는 고소한 향이 가득 맴돌았다.
‘시어도어와 나넬이 위장 연애를 시작했다는 걸 말해도 괜찮을까.’
시어도어가 그런 말이 되지 않는 억지를 쓰면서까지 이곳에 남으려는 이유를 사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마치 사샤의 생각을 읽은 듯 알렌이 입을 열었다.
“프레데릭 소후작과 랑앤첸 백작 영애가 연애 한다는 소문이 수도 내에 파다하더군.”
“들으셨군요?”
“요즘 저녁 식사나 무도회에 갈 때마다 그 얘기야.”
역시 그렇겠지. 시어도어의 의도대로 두 사람의 연애 소식이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가고 있었
다.
그나저나 방금 알렌이 뭐라고 했지, 저녁 식사나 무도회. 무도회…?
“두 사람이 그렇게 열렬한 사이인 줄 전혀 몰랐는데.”
“음….”
알렌은 두 사람이 정말로 연애한다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사샤는 진실을 자기 입으로 말해
도 될지 잠시 고민했다.
“진짜로 사귀는 건 아니고, 위장이에요.”
사샤가 머뭇거리며 한 말에 알렌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지? 웬 위장?”
“본가에서 시어도어 씨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어서, 좀 더 서 제국에 머무르고 싶어 연인 핑
계를 대기로 했대요.”
“흐음.”
알렌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몇 번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좋아하는 여인이 있다고 했지.
그 사람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봐도 행복하기만 한 사랑을 하고 있었지, 그 사내는.
“잘 됐으면 좋겠군.”
정말 사모하는 여인을 마음에 둔 채 다른 사람과 연애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이고 다니는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안타깝기도 하고, 조금은 동질감이 느껴져 알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에 공작께 불행한 사고가 덮치지 않고 사샤의 어머니와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면.
그렇다 해도 지병이 있던 공작은 오래 버티지 못했을 테지만, 사샤의 어머니는 공작 부인으
로서 에른스트에 그대로 머물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렌은 사샤의 마음을 얻으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
을 것이다.
지금처럼 그녀와 가까워질 수도 없이 그저 애를 태우면서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에 괴로워하
다 스스로를, 어쩌면 그녀를 괴롭혔을지도.
하지만 설령 그랬을지라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의 신혼여행을 막았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편안히 사랑하는 여인 옆에서 눈을 감을 수 있고, 사샤의 어머니가 사랑하는
딸과 함께 에른스트의 비호 아래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면.
“커피 드셔보세요.”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사샤가 어느새 완성한 커피를 알렌 앞에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