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요한은 평소처럼 오후 2시에 가게에 들어가 차를 주문하고 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
늘따라 유난히 책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원래 이곳에 방문하는 이유는 마음 편하게 책이나 읽으러 온 것은 아니었다.
준비한 계획을 실행하기 전 남는 시간을 때울 겸, 알렉산드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뭔가, 아주 약간 달랐다.
요한은 짧은 숨을 뱉고 나서 결국 글자와 씨름하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덮어버렸다.
이제 이 짓도 질려버렸다.
안 그래도 인내심이 그다지 깊지 않은 누이 밀레나가 눈을 뜬 지 며칠이나 지났으니 조만간
자신을 불러 뭐 하고 있느냐며 채근할 게 분명했다.
슬슬 장난은 이 정도로 하고, 다음 단계에 접어들어도 되겠지.
그래서 그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앉은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마시던 차를 절반 정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에 갔을 때, 요한에게 사샤가 말을 걸었다.
“저….”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사샤의 목소리에 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녀를 향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까 일, 감사해서요.”
사샤는 아까와 달리 부드럽게 잘 마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번에 쿠키는 입에 맞으셨나요?”
“아아.”
요한은 사샤에게 받자마자 발로 뭉개버렸던 쿠키를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네, 잘 먹었어요.”
“그랬나요, 정말 다행이네요.”
손님이, 그것도 매일 같이 찾아와 주는 단골손님이 자신이 만든 쿠키를 맛있게 먹어주었다고
말해주자 사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불이 켜진 듯 환한 미소를 짓는 사샤를 보자 요한은 갑자기 뱃속을 날카로운 바늘로 찌른 듯
욱신거림을 느꼈다.
사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도 하나 드려도 될까요? 가게에 새로운 메뉴로 내려고 하는데….”
“……그러세요.”
“딸기를 넣은 머핀이에요. 오늘 딸기가 굉장히 신선하고 맛있어서 생 딸기를 써봤어요. 많이
달지 않아서요.”
사샤는 미리 포장해둔 머핀을 남자에게 내밀며 열심히 설명하면서도, 혹시 그가 부담스러워
할지 몰라 차분한 어조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까 뵈었을 때 손님이 도와주셔서 딸기가 온전하게 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
“맛있게 드셔주시면 좋겠어요.”
요한은 그녀가 건네는 머핀을 받아 들고 가게를 나섰다.
머핀은 싸구려 포장지에 싸여서 촌스러울 만큼 새빨간 리본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흥.”
어제처럼 요한은 머핀이 든 포장지 끝을 엄지와 중지로만 집어 든 채로 허공에 팔을 뻗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머핀을 바라보았다.
- 맛있게 드셔주시면 좋겠어요!
티끌 없이 해맑게 웃던 여자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런’ 일을 겪고도 용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웃을 수 있다니. 대단한 강성이군.
툭, 요한은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자연스럽게 손끝에 들려있던 머핀이 어제의 쿠키처럼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던 순간.
그는 생각을 바꿔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의 머핀을 다시 잡아챘다.
이건 그냥 잠깐의 변덕일 뿐이야.
“차는 더럽게 맛없이 끓이는데, 이거라고 대단하겠냐마는.”
그는 스스로도 느껴지는 위화감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 일부러 더욱 빈정대며 중얼거렸다.
잘게 썬 생딸기가 듬뿍 들어가 분홍빛이 도는 머핀은 과연 꽤 먹음직스러운 모양새였다.
마뜩지 않은 시선으로 머핀을 이리저리 살피던 요한은 한참을 바라보고서야 천천히 입가에
가져갔다.
딸기 머핀은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한 입에도 부드럽게 씹혔다.
새콤한 딸기와 요거트덕에 머핀은 요한이 싫어하는 단맛보다는 새콤한 맛이 강해서 디저트라
면 질색을 하는 그에게도 최악까지는 아니었다.
머핀을 전부 먹어치우자 답답한 갈증이 일었다. 요한은 마른 침을 삼키며 불쾌한 표정을 지
으며 자신이 방금 충동적으로 한 선택을 후회했다.
이런 싸구려 서민 음식 같은 걸 먹는 게 아니었다. 결코 그 여자의 미소 따위가 맴돌아서가
아니라, 입맛이 나빠졌기에 오는 불쾌함이다.
요한은 검지를 들어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자신의 입에서 나는 달콤한 향을 지워버리려 애썼
다.
* * *
사샤의 그런 기분 좋은 하루의 끝을 장식한 건, 정말로 생각지 못한 이의 선물 같은 방문이
었다.
가게 문에 매달아 둔 종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크게 울리며 조용한 가게의 침묵을 와장창 깨
트렸다.
“사샤.”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아기자기한 가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굵고 거친 목소리가 가게
를 갈랐다.
사샤는 카운터 아래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멈칫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자, 2미터는 될 것 같은 거구의 우
락부락한 남자가 문 앞에 서서 부엌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저씨…….”
믿기지 않는 것을 본 듯 사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떨려왔다.
“손님이 왔어요?”
낯선 기척을 느끼고 주방에서 나온 안나는 남자의 범상치 않은 덩치와 상처투성이 얼굴에 깜
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남자는 붉은 기가 도는 갈색의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어깨까지 기르고, 얼굴과 몸에는 오래된
흉터와 그 위에 새로 생긴 흉터가 가득한 험상궂은 인상이었다.
그의 먼지투성이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었다.
“네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다.”
“아저씨, 코발레프 아저씨!”
사샤는 정신없이 뛰쳐나와 현관으로 달려갔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한쪽 신발이 벗겨졌는데도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하며 사샤는 그의 품에 달
려가 와락 안겼다.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몸집에 반도 안 되는 사샤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꼬맹이, 여전하구만.”
“아저씨, 아저씨…. 흐윽, 흑….”
남자의 품에 안긴 사샤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사샤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을 뚝뚝 흐르기 시작했
다.
남자도 한쪽 무릎을 꿇고 투박한 손으로 사샤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사샤가 공작가를 떠나기 전, 칼라일에게 조심스레 부탁했었다.
- 칼라일 씨, 혹시 사람을 한 명 찾아줄 수 있나요? 용병으로 가고 나서 연락이 끊겼는데
요.
- 용병이라. 용병단 이름을 알고 있으면 찾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겠지만.
칼라일의 눈빛이 호기심에 번뜩였다.
- 무슨 연유로 어떤 사람을 찾는 건지 물어도 될까요.
- 엄마의 친구예요. 어릴 적부터 알던 아저씨인데, 일 년 전부터 연락이 닿지 않아서 어떻
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요.
- 알겠습니다. 한 번 찾아보죠.
사샤는 칼라일에게 찾아줬으면 하는 사람에 대해 설명했다.
코발레프라는 사람으로, 그가 속해있는 용병단의 이름은 정확하진 않지만 붉은색이라는 단어
가 들어가는 것 같다, 3년 전 서 제국 황실로부터 북쪽 지역에 갑자기 출몰한 마수를 토벌
해 달라는 특별 임무를 받고 떠났다 등 기억하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칼라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 손을 가슴에 얹었다. 사샤 역시 그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었
다.
그렇게 줄곧 기다리고 있던 이가 드디어 나타났다. 사샤는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
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던 안나도 어느새 눈앞에 펼쳐진 두 사람의 재회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보았다.
“왜!”
사샤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목이 메어 소리쳤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요.”
“미안하다, 생각보다 토벌이 오래 걸렸지 뭐야.”
바닥에서 일어나 남자와 마주 앉은 사샤는 그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진짜 미워서가 아니라, 깜빡하고 약속한 간식을 사 오지 않은 아빠에게 투정 부
리는 딸 같은 말투였다.
남자 역시 머쓱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변명을 늘어놓았다.
코발레프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리타가 일하던 가게의 단골이자 오랜 친구였다.
리타의 가게에 오는 모든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코발레프도 리타에게 홀딱 반해 격렬하게
구애했고, 당연히 그 역시 빠르게 실연당했다.
다만 코발레프는 리타에게 차이자마자 깔끔하게 그녀를 포기하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
고, 그는 리타의 남자 사람 친구라는 영광스럽고 희귀한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리타의 친구라는 자리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던 다른 이유도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남자였다면 리타를 짝사랑하는 다른 남자들의 질투로 해코지를 당했겠지만,
누구도 코발레프에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강한 남자였으니까.
리타가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받아도, 험한 동네에서 젊은 여자가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도
편하게 살 수 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코발레프가 뒤에서 든든히 그들을 지켜줬기 때문이기도
했다.
3년 전, 돌아오면 사샤에게 비싼 소고기 스테이크를 사주겠다고 약속하며 코발레프는 갓 결
성된 용병단에 가입했다.
북쪽에서 기승을 부리는 마수를 잡으러 가는 원정대라고 했는데 아무리 하급 마수를 상대한
다지만 목숨이 오가는 위험한 일이기에 리타 모녀는 그를 간곡하게 말렸다, - 남자라면 당연
히 도전해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하핫!
하지만 코발레프는 한번 꽂히면 남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었다.
- 가지 마.
- 아저씨, 안 가면 안 돼?
사샤는 그의 팔 한쪽을 잡고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리타 역시 사샤의 뒤에서 아주 못마
땅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그를 걱정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코발레프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두 모녀를 한꺼번에 껴안아 올렸다.
- 악!
- 뭐 하는 거야!
리타와 사샤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지만 코발레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붙어 있던 발이 공중에 뜨고, 고개를 든 두 사람은 코발레프와 시선을 마주 볼 수
있었다.
- 다녀와서 맛있는 거 많이 사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 아저씨….
- …제발 다치지만 마.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마을에서 소동이 일어나거나 재밌어 보이는 일이 생기기만 하면 누구보다 먼저 그가 나서곤
했다.
마수 토벌은 일 년 남짓이라고 했다.
너무 나서지 말고 몸 조심히 다녀오라고 몇 번이나 손가락 걸고 약속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
은 여전히 그를 걱정했다.
“마수 토벌이 3년이나 걸렸다고요?”
분명히 반년, 아니 1년 안에 원정은 마무리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편지 한 통 없이 3
년이나 연락이 두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