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죽상이시군요.”
칼라일은 힘없이 돌아온 주인의 얼굴을 보고 무례할지 모르는 단어를 입 밖에 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없을 만큼 알렌의 표정은 칙칙하다 못해 땅굴을 파고 들
어갈 것처럼 어두웠다.
“……하아.”
알렌은 칼라일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그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산드라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알렌의 표정을 저렇게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칼라일이 알기로는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다.
그가 정신없이 모든 걸 던져버리고 뛰쳐나가게 만들 사람도.
덕분에 칼라일은 알렌과 저녁이 약속되어 있던 후작가에 찾아가, 주인이 매우 피치 못할 사
정으로 방문이 어렵다는 편지와 선물을 전하고 오는 길이었지만.
“칼라일, 혹시 기억하나.”
“무엇을 말이죠?”
“예전에. 내가 사샤를 처음 봤을 때 네게 한 말.”
“아아, 네.”
손가락 끝으로 모노클의 위치를 조정하던 칼라일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하셨죠.”
“그래, 그거….”
팔짱을 끼고 칼라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알렌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잖아.”
“그랬나요?”
능청스러운 칼라일의 대답에 알렌은 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기시감이 점점 강해져.”
아마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의문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외면했고, 제 마음을 인정한 뒤에는 누군가에게 반하
면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을 거라며 납득하고 지나쳤다.
헌데 사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안에서 두려움 외에 또 다른 감정이 강렬
하게 피어올랐다.
‘왜, 왜 나는 그녀를 잃어봤던 것 같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구역질 날 정도로 생생한 이 기시감.
비밀은 사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혹시 나에게도 있는 건 아닐까?
“칼. 혹시 내가 그녀와 이전에 이미 만난 적이 있을 확률이 존재하나?”
알렌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칼라일은 그의 질문에 잠시 대답을 유보하며 머릿속을 헤집듯 기억을 뒤져보았다.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되겠죠.”
“당연하지.”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칼라일의 목소리는 신중했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제가 당신께 24시간 붙어 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옆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
니지요.”
알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마따나 칼라일은 아주 어릴 적 알렌에게 충성을 맹
세한 순간부터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특히 그녀를 과거에 만났다면 공작가 내부일 리는 없을 테니 밖이라는 건데.”
칼라일은 한 손으로 자신의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에 잠긴 후에 입을 열었다.
“마르가리타 님과 알렉산드라 님은 자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
“제가 알고 있는 한 당신의 지금까지의 행적 중에서 알렉산드라 님과 겹치는 부분은 없었습
니다.”
“….”
“알렉산드라 님이 공작가에 인사드리러 왔을 때가 두 분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게 현실적인 대답이지.”
하지만 告?
뭔가가 빠져있다는 직감.
“혼란스러우신 것처럼 보입니다.”
“….”
“주제넘은 조언일지 모르지만, 당신을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충복으로서 말씀드리자면.”
“그 조언, 친우로서 해주면 안 될까.”
알렌의 말에 칼라일은 아주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두 분의 상황은 복잡하고 여러 가지 사정이 얽혀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당신은 그저 당
신의 감정에 솔직해야 하지 않을까요.”
알렌은 두 손을 턱에 괴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솔직히 말해보세요. 너를 잃는 게 너무 무섭다고, 하루 종일 네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고.
네가 원한다면 모르는 사이가 되어줄 거라고 말했으면서 사실은 네게 거절당할까 무서워서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칼라일, 너.”
“진심으로 그녀를 대한다면 후회는 없을 겁니다.”
어떻게 되든 말이죠.
* * *
다음 날 사샤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해가 뜨지도 않은 어둑한 새벽부터 가게 준비를
했다.
잠을 많이 잔 것은 아니었지만, 개운하고 몸이 가벼워 콧노래까지 부르며 즐겁게 몸을 움직
였다.
사샤는 평소보다 더 정성스럽게 반죽을 한 빵을 오븐에 넣고 나서, 가게 옆을 따라 난 자갈
길을 걸어 시장에 신선한 과일을 사러 갔다.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과일 가게의 주인은 사샤가 들어오자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서서 잠
시 일상 얘기를 나누었다.
“아, 이것 좀 먹어 봐요.”
팔짱을 끼고 수다를 떨던 과일 가게 주인은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부산스레 움직였다.
그녀는 다른 날보다 유난히 더 신선한 딸기가 들어왔다며 사샤에게 알이 굵은 딸기 하나를
했다.
“정말 맛있네요.”
한 입 베어 물자, 주인이 했던 말대로 상큼하고 신선한 딸기 향이 기분 좋게 퍼졌다.
이걸로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면 부드럽고 상큼하겠지, 사샤의 눈이 번뜩이더니 예상에
없던 구매를 결정했다.
사샤는 묵직해진 종이봉투를 안고 길을 나섰다. 씩씩하게 걸어가던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
게 맞은편에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젊은 어머니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를 안고 벤치에 앉아 토닥이고 있었다. 곱슬곱슬하게
말려있는 아이의 짧은 머리카락이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짓에 따라 흔들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샤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훈훈한 미소가 걸렸다.
매일 보던 과일 가게 주인의 인사도, 잘 모르는 아이의 사랑스러운 얼굴도, 평화로운 일상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했다.
그러고 보니 나넬과 시어도어는 잘 돌아갔을까.
사샤는 어제 인사도 못 하고 황급히 헤어진 이들을 떠올렸다. 많이 걱정하는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가게를 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오늘 찾아와 주면 좋을 텐데.
두 사람이 오면 대접할 수 있게 어서 가게로 가서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자. 나넬이 딸
기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했지.
- 언니, 역시 케이크는 딸기가 최고예요!
나넬이 신이 나서 하얀 볼이 빵빵해질 만큼 가득 케이크를 먹어줄 모습을 상상하니 생각만으
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때 차가운 물방울이 사샤의 뺨에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금방 물통을 뒤집어엎은 것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갑작스럽게 쏟아진 겨울비가 사샤의 온몸을 흠뻑 적셨다. 그뿐 아니라 그녀의 품에 있던 종
이봉투마저 점점 짙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 큰일 났다.”
아직 가게까지 가는 길은 조금 남아 있었다.
금방 도착할 거리이지만, 이대로 비를 계속 맞으면 종이봉투가 전부 젖어서 안에 있는 과일
들이 전부 쏟아져버릴 게 분명했다.
어디든 몸을 피해야 한다, 사샤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나무의 그늘로 급히 뛰어갔다.
“갑자기 웬 비가 이렇게 쏟아지지.”
간신히 그늘 아래에 자리 잡은 사샤는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
다행히 종이봉투는 아직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버텨주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는 금방 그칠 확률이 높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칠 기미가 없
다면 우선 짐을 여기에 두고 가게에 가서 과일을 담을 수 있는 바구니를 가져와야 한다.
“일단 잠깐 기다려 보자.”
사샤는 멍하니 쏟아지는 비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잠깐 사이에 옷은 물론 머리카락까지 전부 젖어버리고 말았다. 사샤는 달라붙은 머리카
락을 한데 모아 한쪽으로 넘기고 쪼그려 앉아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뒤에서 빗소리와 다른 인기척이 들렸다.
쪼그리고 앉은 상태에서 뒤를 돌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하자, 그 자리에는 사샤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앗, 안녕하세요?”
사샤는 그를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밝게 미소 지었다.
“지나가던 길이신가 봐요.”
“아, 네.”
요한은 한쪽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변덕을 부려 평소보다 조금 일찍 그녀의 가게에 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이렇게 우연
히 마주쳐버렸지만.
외면하고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자신을 먼저 발견해버렸다.
“….”
그다지 할 말은 없었다.
사샤는 상대가 매일 같이 가게에 찾아와 주는 손님이지만 개인적인 대화는 단 한 번도 나눠
본 적 없었고, 요한 역시 그녀와 굳이 사담까지 나눌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아직 허기지지 않은 사자가 언젠가 잡아먹을 사슴을 멀리서 구경하며 입맛을 다시듯이,
딱 그 정도의 유희였을 뿐이었다.
“비가.”
그때 사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비가 금방 그칠까요?”
“…글쎄요.”
요한은 그때서야 덥수룩하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그녀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갈색 원피스는 비에 젖어 몸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몸선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였다.
잘록한 허리라든지, 곡선을 이루는 골반 같은 것들이 적나라하게 보이는데도 여자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젖은 머리카락만 만지작댔다.
“정말 죄송한데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요한은 여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무슨 일이죠?”
“빨리 가게에 다녀올 테니 잠시만 짐을 맡아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바닥에 놓여 있는 종이봉투였다. 이미 비에 전부 젖어 간신
히 모양만 유지하고 있는 봉투는 들어 올리는 즉시 무너져 내릴 게 분명했다.
“금방 다녀올게요! 부탁드려요.”
여자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다시 빗속을 향해 달려갔다. 어찌나 씩씩하게 뛰어가는지 요한
이 입을 떼기도 전에 저 멀리로 사라져버렸다.
요한은 사샤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자그마한 빚쯤 남겨놔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생각에 나무에 등을 기
대고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샤가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샤는 두 손을 모아 요한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는 짐을 바구니에 전부 옮겨 담고는 요
한을 향해 환하게 웃음 지었다.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어요.”
“뭘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비 맞으셨는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렇게 인사한 사샤가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뛰어가는 모습은 오랫동안 요한의 잔상에 남았다
.
비는 본인이 잔뜩 맞아 놓고, 감기 걸리지 말라니.
갑작스러운 폭우는 한동안 따뜻했던 도시의 기온을 잔뜩 낮추었다. 그래서 이렇게 떨리는 거
겠지. 어깨도, 입술도. 요한은 고개를 저으며 빗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