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랑앤첸 백작가 앞에 마차가 멈추자 시어도어가 먼저 내려 나넬을 에스코트했다.
요 며칠간 서 제국의 사교계에 소문이 퍼지도록 시어도어는 일부러 나넬과 사람이 많은 장소
에서 데이트를 하고, 일정을 마치고 나서는 꼬박꼬박 백작가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내려주고, 마중 나온 랑앤첸 백작가의 집사에게 그녀를 맡긴 후에 다시
마차에 타던 기계적인 행동이.
“잠시 둘만 있게 해주겠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아, 네. 알겠습니다.”
랑앤첸 백작가의 집사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남자는 시어도어의 말에 허둥지둥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난 있잖아.”
시어도어의 말에 나넬은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시어도어는 한 손으로 뒷목을 매만지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자신 없긴 한데…. 이건 네가 날 도와준 은인이라서 하는 얘기는 아니야.”
“….”
“넌 이미 사샤에게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시어도어는 익숙지 않은 위로를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나넬의 얼굴에
그제서야 웃음기가 조금씩 돌아왔다.
“그 애가 나중에 뭔가를 털어놓는다면 가장 먼저 네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설령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네 어깨에 기대서 위로받고 싶은 날은 올 거야.”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면서도 시어도어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한다.”
“……감사해요.”
“너무 슬퍼하지 말고.”
시어도어의 커다란 손이 나넬의 머리 위에 슬쩍 올라왔다.
그리고 오빠가 어린 동생을 위로해주듯, 하지만 그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천히 쓰다
듬기 시작했다.
“기운 내. 네가 웃는 게 사샤에게도 위안일 테니까.”
너무나 친절한 그의 말에 나넬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어도어는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지만 온몸을 휘감는 따뜻함이 느껴지며 전율이 이
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들어가 볼게. 오늘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네, 네.”
“내일은 예매해둔 공연도 보러 가야 하고, 그 전에 역사 공부도 해야 하니까. 일찍 자렴.”
여동생도 없으면서 마치 오라버니의 잔소리 같은 말을 덧붙인 시어도어는 다시 그녀의 머리
를 쓱쓱 쓰다듬고 마차에 올라탔다.
시어도어를 태운 마차가 출발하고 점이 될 때까지 나넬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저, 아가씨….”
어느새 그녀의 뒤에서 기다리던 집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나넬은 그때야 천천히 입을 열
었다.
“혼자, 들어갈게.”
“그래도….”
“잠깐 산책하고 싶어서 그래.”
“알겠습니다,”
집사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천천히 자리를 떴다.
그가 가고 나서 해가 조금 더 서쪽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나넬은 천천히 한 걸음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사샤.”
나넬과 시어도어가 나가고 두 사람만 남은 조용한 가게에서 알렌이 정적을 깨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제자리에 주저앉은 사샤는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알렌의 말에도 대답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작게 고개를 저으며 덜덜 떨고만 있었다. 마치 건드려
서는 안 되는 스위치가 눌려 버린 것처럼.
2층에서 내려왔던 안나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놀란 눈으로 망설이더니 다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건 하지 않아도 돼.”
“….”
“내가 조심성이 없던 것 같아.”
후회 섞인 어조로 조심스레 사과를 한 알렌은 마른세수를 한 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그저.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그랬어.”
여전히 사샤는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알렌은 잠시 시간을 가지며 기다리기로 하고 조용히 테이블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눈에 띄게 떨리며 웅크리고 있던 어깨가 조금씩 잠잠해지며 아까보
다 안정된 듯 사샤의 호흡이 고르게 바뀌었다.
“내가 가는 게 낫겠지?”
알렌의 물음에 사샤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 앉은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갈게. 오늘 정말 미안했어, 그리고…….”
알렌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모레에는 손님으로 와도 될까?”
“….”
한참을 고민하던 사샤는 이번에도 보일랑 말랑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볼게.”
알렌은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사샤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가고 나서야 상황을 지켜보던 안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샤에게 천천히 다가와 말
을 걸었다.
“사샤, 오늘은 이만 쉬어요.”
“….”
“평일이라 손님도 적을 것 같고. 그리고….”
“괜……찮아요.”
간신히 입을 연 사샤의 표정은 누가 봐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안나는 조심스레 사샤의 등을 토닥거리며 나직이 말했다.
“그럼 밖에 나가서 잠깐 숨 좀 돌리고 와요.”
“….”
“그리고 같이 일해요. 내일은 새로운 케이크를 구워 보기로 했잖아요.”
안나는 일부러 더 밝게 말하고 나서 양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등을 밀어 밖으로 내보냈다.
“30분 뒤에 들어와요!”
안나에게 떠밀리다시피 밖으로 나온 사샤는 멍한 눈으로 마당에 섰다.
이전에 비해 해가 길어졌지만 여전히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어렴풋한
주홍색 석양이 주위로 천천히 번져갔다.
뒷마당의 가운데에는 어제 안나가 세탁하고 널어뒀던 침대 시트가 얕은 바람을 따라 느리게
살랑거리고 있었다.
초점 없는 시선으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던 사샤는 천천히 걸어가, 잘 말라서 빳빳
해진 시트를 감싸 쥐었다.
상쾌한 비누 향이 왈칵 코끝에 파고들자 그제야 간신히 자신이 이곳에 살아있다는, 실재하고
있다는 감각이 깨어났다.
그녀는 부드럽고 향긋한 시트에 얼굴을 좀 더 파묻었다.
어떤 두려움이 자신을 잡아먹고 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안나가 자신을 다시 피고용인으로서만 대하고, 나넬과 시어도어와는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린
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 …오늘 정말로 예뻐.
- 내가 널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외면하지 말아줘.
그가 한 말이 전부 없던 일이 될까 봐.
나를 보며 가슴 시릴 만큼 예쁘게 웃던 그가 다시 얼어붙을 만큼 차갑고 잔인해질 것 같아서
.
내가 간신히 쥐고 있는 것들이 파도에 밀려오면 무너져 버릴 모래성 같이 연약하단 걸 인정
하고 싶지 않았어.
사샤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모래알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빠져나
가는 착각이 들었다.
손톱이 파고들 만큼 세게 주먹을 쥐었다.
‘잃고 싶지 않아.’
내내 뜨거웠던 눈가에서 끝내 참았던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뚝 떨어진 눈물이 시트 위
로 느릿하게 번져갔다.
사샤는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우는 건 마르가리타를 위해서 만이라고 약속했으니까. 지금은 반칙이다. 그니까 어서 울음을
그쳐야 해.
입안을 아무리 세게 깨물어도 흐르는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 그래도 말이야, 사샤. 지켜낼 수 있는 건 지켜야 하지 않겠어?
그때,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던 사샤의 귓가에 익숙한, 그리고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
가 울렸다.
마르가리타였다.
마치 사샤의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는) 그녀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했다.
- 넌 지금 네 입으로 소중하다고 말한 거네. 그 사람들이.
- …맞아, 소중해.
- 그러면 이렇게 주저앉아 있는 게 아니라 노력해야지.
언제나처럼 당당하고 씩씩한, 그래서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리타의 음성에 흐릿했던 사샤의
눈동자에 다시 빛이 돌았다.
-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거야? 차라리 털어놔 봐. 털어놓고 도움을 청해 보는 거야.
- 누구에게.
- 누구긴, 널 도와줄 수 있고, 널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두렵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시작하지 않아.
“내가, 직접….”
사샤는 시트의 끝자락을 힘주어 꽉 쥐었다.
이틀 뒤에 알렌이 온다고 했지.
그때 그에게 털어놓는 거야. 당장 전부 말할 수 없다 해도 내 두려움의 편린이라도.
어쩌면 날 몇 번이나 죽였던 이에게 털어놓는 게 웃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어. 이번 생에서 만난 친구들을, 그리고…. 그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하나씩. 해보자.”
사샤는 주먹을 꽉 쥔 채 중얼거렸다. 파리했던 얼굴에도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
눈앞에 있는 시트를 잘 접어서 품에 든 사샤는 씩씩한 걸음으로 가게에 들어갔다.
* * *
“뭐 하는 거야, 정말.”
그 모습을 처음부터 나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요한은 사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참던 입
가를 씰룩였다.
“혼자서 울었다가 웃었다가 웃기는 여자네.”
요한은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몹시 즐겁다는 듯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알렌 폰 에른스트가 여자의 가게에 왔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직접 그들을 보기 위해 몸을 숨
기고 관찰했다.
과연 ‘그’ 알렌 폰 에른스트가 제 명예나 체면 따위는 아랑곳 않은 채 벌벌 기듯 여자의 눈
치를 살펴댔지.
허겁지겁한 모양새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모습도, 깨질 것 같은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눈에 뭐가 제대로 씐 듯 굴어대는 꼴도 대단한 볼거리였다.
“저 여자 덕에 아주 재밌는 구경을 했군.”
요한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마당에 홀연히 나와 있던 사샤를 다시 떠올렸다.
여자의 짙은 밀빛이 도는 금발이 붉게 물들어질 만큼 강렬한 노을이었다.
과즙을 뒤집어쓴 듯 온통 붉은 세상 속에서 여자는 홀연히 서 있더니, 어느새 그렁그렁하던
눈물을 흘려 내었다.
부들거리는 양손을 움켜잡은 모습은 자신에게 다가온 거대한 두려움과 맞서 싸우고 있는 것
같이 결연했다.
에른스트가 어찌할 줄 모를 만큼 아끼는 여자라지만, 지금까지는 대체 어느 구석에 그놈이
홀려서 정신 차리지 못하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는데.
처음으로 본 조금은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앙다물고 있던 떨리는 입 끝에서 간신히 나온, 뭐라고 중얼거리는지도 모를 말이 너무 간절
하게 느껴져서.
요한은 어느새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숨죽이고 바라봤던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
았다.
“우스워.”
자신의 안에서 꿈틀대는 불쾌하고 기이한 감각은 그저 지금껏 그랬듯, 에른스트 놈과 그의
여자를 조롱하는 느낌일 거다. 그렇게 단정 짓기 위해 요한은 다시 되뇌었다.
“정말 우습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