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연무장에 있었군.”
체력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알렌이 고개를 들자 그의 눈앞에 익숙하면서도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의 친구이자 마법사의 탑 소속 마법사, 막시밀리안이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알렌은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고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막시밀리안은 그가 내민 손을 맞
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냈어. 본가에도 다녀올 겸, 네 얼굴도 보려고.”
“먼저 연락하지 그랬어.”
그가 올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라도 했을 텐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저택까지 찾아온 건 처음
이었다.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지, 정신없을 게 뻔했거든.”
“괜찮다면 며칠 있다가 가지.”
“아냐, 나도 간만에 본가에 가봐야지.”
“그런가.”
알렌은 아쉬운 듯 중얼거리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나저나 나한테 할 말이 있지 않아?”
막시밀리안은 그의 옆에 앉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운을 떼었다.
“응?”
“그 아가씨 있잖아.”
막시밀리안은 두 손가락을 붙여서 둥글게 만들며 마, 법, 석을 한 음절씩 강조했다.
“사실 공작 서임식 때 봤거든, 네가 그 아가씨랑 춤추는걸.”
“서임식 때 온 거야? 못 온다더니.”
“전날 갑자기 올 수 있게 됐어. 원래 가려던 사람이 갑자기 아파서 대타로 참석했지.”
“그러면 말이라도 걸어주지.”
“상관을 모시고 아주 잠깐 들른 거라 네게 말 붙일 시간이 없었어.”
막시밀리안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일부러 널 찾아왔지. 라는 말을 덧붙이
면서.
“그 아가씨 목에 걸린 목걸이, 그때 그 마법석으로 만든 걸 바로 알아봤지.”
막시밀리안은 친우의 사랑을 위해 애쓴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음에 진심으로 뿌듯해했다.
“아아, 그래.”
“그때 그렇게 걱정했는데, 그래도 두 사람이 잘돼서 다행이다.”
그는 한 손을 알렌의 어깨 위에 올리고는 토닥토닥 두들겼다.
“….”
“네 말을 들은 후로 어찌나 걱정되던지.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혼자 속을 태
웠지 뭐냐.”
자식, 코끝을 한 손가락으로 슥 문지르며 감격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회한과 감동에 젖어 그의 눈앞에 알렌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
지 못했다.
“난 솔직히 네가 착각해서 삽질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
“아무튼 지나간 일이니 다 잘되어서 정말 기쁘다! 하하!”
통쾌하게 웃고 난 막시밀리안은 그제야 알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
“내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
“아니 근데, 같이 춤을.”
“…내가 부탁한 거야.”
간절히 애원하다시피.
“목걸이는?”
“…내가 거의 억지로 줬어.”
여러 번 설득해 가면서.
크흠, 막시밀리안은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미안하다.”
“아니, 미안할 건 없고.”
알렌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하나도 괜찮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막시밀리안은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마른세수를 하며 상황을 수습할 거리를 고민했
다.
알렌은 사샤가 공작가를 떠나기 전날 입을 맞췄던 일을 떠올리자 맥박이 빨라졌다.
그날 그녀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알렌 같이 열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자신도 그녀를 바라볼 때 항상 그런 표정을 짓고 있겠지.
하지만 처음 키스했을 때도 그녀는 자신을 착각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래서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분위기에 휩쓸렸거나 알렌의 간절한 부탁에 모른 체할 수 없
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아니다. 사실.
알렌은 두려웠다.
그때처럼 사샤의 마음을 착각한 거라면. 이번에도 착각이라면 그의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아서
. 처음에 느낀 충격과는 다른 감정이 그를 덮칠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기대해버렸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샤를 또다시 확인한다면 이번에는 어떤
게 무너질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잘 모르겠어.”
알렌의 진지한 목소리에 막시밀리안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약간 벌려 그를 바라보았
다.
“노력하고는 있는데.”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로서는 굉장한 노력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두 손을 내리고 이전부터 신경 쓰였던 사실에 대해서 꺼내기 위해 머뭇거렸다.
“사실, 알렌. 네게 사과할 것도 있어.”
막시밀리안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공작의 장례식 때의 이야기를 했다.
사샤에게 마탑에서의 마차 사고 조사 결과를 말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당연히 사샤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의 말을 듣고 그녀의 안색이 바뀌어서 걱정을 했다고.
그래서 알렌을 찾아갔는데 부재중이라 돌아가긴 했지만, 그 후에 공작 서임식에서 만난 그와
사샤가 다정해 보여서 두 사람이 오해를 잘 푼 것 같아 덮어두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네가 미안할 건 없어.”
알렌 역시 사샤에게 그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 막시밀리안이 아닐까 예측은 했다.
마차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처음에는 칼라일일까 생각했지만,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그가 알렌이 말하지 않은 사
실을 굳이 사샤에게 말했을 리가 없었다.
사샤는 장례식이 끝난 날 밤에 자신을 찾아와 추궁했다.
그렇다면 장례식장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고, 결국 그녀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은 막시밀리안뿐이었다.
하지만 알렌은 그를 조금도 책망하지 않았다.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막시밀리안 말대로 사샤에게 좀 더 일찍 털어놓았어야 했다.
면목 없다는 얼굴을 한 그의 친구를 바라보며 알렌은 빙긋 웃었다.
“그녀는 에른스트를 나갔거든.”
“아….”
막시밀리안은 죄책감에 말을 잇지 못하고 공연히 입술만 깨물었다.
“나쁘게 나간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알렌은 지금까지 있던 일, 사샤를 남작 가문에 입적시킨 것과 공작가를 나가 자신만의 보금
자리를 만든 것들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좀 변한 것 같아, 너.”
원래도 좋은 녀석인 건 알고 있었지만 무뚝뚝하고 표현도 적었는데.
“널 알고 나서 요 최근이 가장 다른 사람 같아.”
“그런가.”
막시밀리안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입가를 슬쩍 올리며 미소를 띠었다.
“그 아가씨 덕분인가?”
“쓸데없는 소리.”
다시 분위기가 풀어진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네게 물어볼 게 있는데.”
알렌은 막시밀리안에게 사샤가 게이트를 탔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너무나 평온했던 사샤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며, 마법 사용자가 아닌 사람이 게이트를 타서도
아무 이상이 없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막시밀리안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 해졌다.
“나도 처음 듣는 얘기인데?”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턱에 괴고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쓸 수 없는 건 확실하지?”
“마법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더군.”
“흠, 신기하군.”
“드물긴 해도 있는 일인가?”
“예외 사례가 보고된 적 없는 거로 알아. 우선 마탑에 돌아가면 게이트를 담당하는 마법사에
게 물어볼게.”
“괜히 그녀가 귀찮아지는 건 아니겠지?”
게이트를 담당하는 마법사는 알렌도 함께 일한 적이 많기 때문에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좋게 말하면 마법에 굉장히 열정적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마법 외에 다른 것에는 아무
런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마법에 미쳐 있는 마법사였다.
“그 사람 성격에 당장 데리고 오라고 할 수도….”
알렌은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면 그녀가 있는 곳에 찾아갈지도 모르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막시밀리안은 그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특이 체질인가 보지.”
알렌은 손을 저으며 우선은 보류하자고 제안했다.
“일단 혹시 모르니 관련 논문을 읽어볼게.”
“그래, 나도 마탑에 가게 될 때 같이 봐야겠군.”
“그래서 그 아가씨는 잘 지내?”
막시밀리안은 다시 사샤의 안부를 물었다.
“응. 지금은 아주 잘 지내는 것 같아.”
“…그래?”
다행이네, 막시밀리안은 공작의 장례식 날 텅 빈 인형 같아 보이던 사샤를 떠올리며 쓰게 웃
었다.
알렌 역시 그의 말에 대꾸 없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가자, 우선 좀 씻고 저녁이라도 하러 가자.”
“그래. 좋지. 에른스트 공작께서 한턱내라고.”
* * *
사샤가 열흘 정도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눈에 익은 손님이 생기기 시작했다.
보통은 새로 연 가게에 호기심을 갖고 들렀던 사람들이지만, 간혹 몇 명은 사샤의 빵이 맘에
들었는지 또다시 가게를 방문해주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매일 정확한 시간에 와서 차를 마시고 가는 젊은 남자였다.
오후 두 시에 멀리 있는 광장의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두 번 울리면 그 사람이 문을 열고 들
어왔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에 수수한 차림의 남자는 첫날부터 차 한 잔만을 주문해서 가져온 책을
읽으며 삼십 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고는 했다.
남자가 같은 시각에 세 번째 방문했을 때는 그가 가고 나서 안나가 상기한 얼굴로 사샤에게
물었다.
“사샤가 맘에 들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워낙 예쁘니까.”
“에이. 그런 거 아니에요.”
사샤는 단호하게 손을 저었다. 안나가 말하는 사샤에게 집적대던 남자 손님은 에른스트 공작
가에 들어가기 전에 일하던 가게에서 이미 많이 만났었다.
그들은 좀 더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동했다.
실수인 척 뭔가를 떨어트려서 주목을 받으려고 한다든지, 일부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하
고 있는 사샤와 눈을 맞추려고 애쓴다든지, 계산할 때 말을 붙이면서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저 남자는 그저 묵묵히 집중해서 책만 읽고 갈 뿐이었다.
“그럼 그냥 우리 가게 차가 맘에 들어서 오는 단골인가 봐요.”
“그런 거면 좋겠는데.”
어쩌면 처음 생긴 단골손님일지도 몰랐다. 저런 이에게는 어느 정도 친절을 베풀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첫 단골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혹시….”
남자가 열한 번째로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가던 날, 계산을 하던 사샤는 처음으로 그에게 인
사 외의 말을 붙였다.
남자는 안경 아래로 짙은 갈색 눈을 빛내며 사샤를 응시했다.
“단 거 좋아하세요?”
“음….”
싫어하지 않아요. 남자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나는 것처럼 쉬어 있었다. 마치 억지로 성대를
비틀어서 내는 소리처럼.
“괜찮으시면 받아주시겠어요? 새로운 메뉴로 연구하는 쿠키인데.”
사샤는 포장지에 정성스럽게 싼 쿠키를 내밀었다.
“….”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사샤에게서 쿠키를 받아 들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남자는 가게가 멀어지자, 더러운 걸 들고 있는 것처럼 두 손가락으로 집
은 쿠키를 노려보았다.
“구정물 같은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역겨운데.”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자연스럽게 손가락에서 힘을 빼고 쿠키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콰직, 쿠키를 일부러 소리 나게 밟아서 으깨버리곤 숲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