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그녀의 먼 친척에 지나지 않는 에른스트 소공작에게 평민 출신의 의붓누이가 생겼다는 얘기
를 듣자마자, 나넬은 사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서 제국 귀족들의 상황 같은 건 아무것도 모를 게 뻔한 평민 여자 앞에서라도 잠시나마 알렌
의 정혼자인 척하고 싶은 어리석은 생각에서였다.
그냥 몇 번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사샤는 자신의 초대에 무시로 일관했다.
대체 어떤 심정으로 감히 백작 영애의 초대장을 보고도 무시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녀
를 찾아갔다.
사샤는 그런 자신을 보고도 움츠러들기는커녕 되레 건방진 표정을 지으며 도발했고, 나넬은
그동안 로맨스 소설에서 즐겨보던 악녀와의 말다툼에 빙의한 기분으로 독설을 내뱉었다.
그러자마자 신나게 사샤에게 응징당했지만.
이제 와서는 사샤는 나넬에게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
는 분명히 나넬의 잘못으로 시작했고, 그녀가 알렌과 사샤가 잘되길 바란 것은 이러한 죄책
감에서 나온 부분도 있었던 것이다.
요즘 사샤는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녀가 알렌에게 조금씩 끌리고 있는 것을 나넬도
느끼고 있었다.
알렌과 잘됐으면 가장 좋겠지만 시어도어도 좋은 남자인 건 알고 있다.
어느 쪽이든 사샤가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고 싶었다.
시어도어는 씁쓸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나넬이 안타까우면서도 기특해 보였다.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갚아주실 거죠?”
“응?”
자신이 하려던 말이 나넬의 입에서 나오자 시어도어의 두 눈이 커졌다.
“사실 제가 글을 쓰고 있는데 소후작님 얘기를 듣고 좋은 생각이 나서요. 제 글의 주인공이
되어주세요!”
“뭐?”
“시어사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넬은 어느새 평소의 장난스러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시어, 사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시어도어는 목 뒤로 느껴지는 오싹한 소름에 목덜미를 쓱쓱 문질러 떨쳐 내려 애썼다.
“언제부터 언니를 좋아하신 거예요?”
“…아마 처음 봤을 때부터인 것 같아.”
시어도어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나넬이 물어보는 것은 뭐든지 대답해주기로 약속
을 했다.
거짓말을 해도 됐지만 시어도어는 가능하다면 나넬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넬이 그가 좋
아하는 상대가 사샤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굳이 정정해 주지 않는 대신에, 시어도어는 그
외의 다른 것은 사실대로 말해 주기로 결심했다.
“그럼 가면무도회에서부터 좋아하신 거구나. 언니 가면이 좋았어요?”
“음.”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훅 들어온 나넬의 질문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는 사샤가 그날 무슨 가면을 쓰고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뭔가 굉장히 특이하고 다른
여자들과 달랐던 것 같긴 했는데.
하얗던가, 마른세수를 하면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응, 빛났었지.”
“우와….”
“눈이 부셨어.”
시어도어는 한껏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에 입을 댔다.
나넬은 테이블 위에 양팔을 올리고 몸을 쭉 뻗어 시어도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그를 올려
보았다.
긴 속눈썹이 쉼 없이 파닥거리며 그를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나넬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걷히고 시어도어에게 기특한 눈빛을 보냈다.
요 맹랑한 꼬맹이가 정말.
시어도어는 다리를 꼰 채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며 떫은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자신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아가씨였다. 그는 푸욱 한숨을 내쉬고는 차를 한 모금 입
에 머금었다.
“전 진짜 사랑을 해본 적 없지만. 소후작님의 표정을 보니까 이게 사랑이구나, 싶어요.”
“경칭은 떼고 시어도어라고 불러.”
시어도어는 어깨를 으쓱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내 연인이잖아.”
나넬의 커다란 눈 속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좀 더 커지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이 진지한 표정
으로 변했다.
“네, 시어도어 씨.”
나넬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장난스러운 웃음 지었다.
“그냥 이름만 불러도 돼. 나도 앞으로 나넬이라고 부를 테니까.”
그의 붉은 입술에서 자신의 애칭이 흘러나오자, 나넬은 갑자기 자신을 덮치는 기묘한 감각에
멈칫했다.
‘뭐지, 방금 뭔가 찌릿했어.’
나넬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상한 감각을 떨쳐내려 했다. 다행히 금방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럼 아버지께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는 걸로 할게.”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나넬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슬슬 일어나실까요?”
나넬의 말에 시어도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웨이터를 불렀다.
잔에 조금 남아 있던 차를 마저 마신 나넬은 시어도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티하우스를 나왔
다.
* * *
“그래서 프레데릭 후작가에 너랑 연애 중이라고 얘기하기로 했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은 사샤의 얼굴에는 경악이 숨겨지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건 또 무슨 일이래….”
“정말로 후작가에 돌아가고 싶지 않나 봐요.”
“흠.”
사샤는 접시를 닦던 손을 멈춘 채 눈살을 조금 찌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네게 뭔가 해되는 일이 생기진 않겠지?”
“어차피 뭐 요즘 사교계에 발을 끊은 지 좀 돼서 괜찮아요.”
요즘 개인적으로 좀 바쁘기도 하고요. 덧붙인 나넬의 말에 사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전에 나넬의 사과를 받을 때 그녀의 사정에 대해서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교류를 하고 지내지 않는다고 해도 나넬이 ‘그’ 시어도어와 사귄다고 하면 다
른 귀족 영애들의 입방아에 신나게 오를 게 뻔하다.
시어도어야 감사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만 나넬이 굳이 그렇게까지 희생해줘야 하나.
그녀에겐 아무런 득 될 게 없어 보이는데.
알렌과 ‘조금’ 엮였다는 이유만으로 연회장에서 사샤가 겪었던 수모를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그러니 더욱 사샤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여전히 순진한 얼굴로 즐겁게 차를 마시는 나넬을 보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 나넬이 시어도어를…?’
나넬이 이렇게 흔쾌히 그의 부탁을 받아준 건 그에게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긴 요즘 시어도어와 부쩍 자주 만나긴 했지. 시어도어도 멀끔하니 잘생긴 남자이니 나넬이
그에게 빠지는 게 이상하진 않다.
게다가 계약 연애나 약혼은 또 나넬이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고.
하지만 시어도어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아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어찌 되었든 나넬이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언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으응?”
나넬은 살짝 샐쭉한 표정으로 귀엽게 사샤를 흘겨보았다.
“소후작님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그 생각하는 줄 어떻게 알았….”
“언니도 얼굴에 생각이 너무 잘 드러나요.”
나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그분이랑 같이 있으면 도움받을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사샤는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나넬을 바라보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 * *
“후작님, 소후작님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보좌관의 목소리에 의자를 돌려 얼굴을 드러낸 남자는 시어도어와 몹시 닮아 있었다.
주름진 눈매는 면도칼같이 잘 벼린 듯 날카로웠고 녹안에서는 광채가 흘렀다.
그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근육이 잡혀있는 탄탄한 다리를 꼰 채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
을 만지작대며 중얼거렸다.
“그놈이 이제야 연락을 하는군.”
후작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보좌관에게 받아든 시어도어의 편지를 북 뜯었다.
편지지에는 깔끔하고 정갈한 아들의 글씨체로 일련의 상황이 쓰여 있었다.
“이런 괘씸한…….”
편지를 훑어 내려가던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욕지기를 내뱉으려는 것 마냥 중얼거렸다.
“지금쯤이면 아버님께서 막내의 편지를 받으셨겠네.”
황태자비 아그네스는 황궁의 서쪽 정원의 테이블에서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는 아그네스의 아들이 정원을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유모오오, 여기, 여기!”
아들은 꺄르르 웃으며 유모와 장난을 쳤다.
그 구김살 없는 웃음을 보니 평소에 거의 웃지 않는 아그네스의 입술 끝도 아들을 따라 자연
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부모가 되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부모는 평생 자식에게 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저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고 있으면 평생 무감하게 살아왔던 자신에게도 가능한 모든 것을 퍼
주고 싶은 모성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아그네스는 더욱 아버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버님은 후계자 수업이 어쩐다, 그런 정신으로 프레데릭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겠느냐며 날
뛰고 계시지만 사실 아들을 옆에 두고 싶으신 것뿐이다.
결혼을 강요하는 것도 그저 아들에게서 빨리 귀여운 손자가 보고 싶으신 것뿐이니까.
시어도어가 서 제국의 아가씨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거라면 오히려 좋아하실 게 분명했다.
‘아버님이야 그렇다 치고.’
아그네스가 봐도 시어도어가 부득불 고집을 부리며 서 제국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그가 마
음에 둔 여인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누군지 죽어도 밝히지 않는 건 뭔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일 테고
.
앞날을 함께 할 수 없는 신분이거나, 혹은 이미 정혼자가 있는 여인이거나.
무엇이 되었든 그에겐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집안의 여인이 아니라면.’
아그네스 자신은 정략결혼을 했지만, 그녀는 본래 그런 것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황태자는 남편으로서 나쁘지 않았다. 황궁 생활에도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그래도 동생들은 자신보다 감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가능하다면 그 아이들은 연애 결
혼을 해도 좋겠지.
“아버님께서 어찌 나오실까.”
여하튼 무미건조했던 일상에 조금쯤 재미있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