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사샤, 에게 부탁하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녀에게 흑심을 품은 게 아니라는 걸 밝히고 나서야 알렌의 경계심이 간신히 풀렸는데.
사샤에게 가짜 연인 역할을 부탁했다고 한다면 알렌은 아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내 복부
에 칼을 찔러 넣을 것이다.
요즘의 알렌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그런 상상을 하자 시어도어는 정말로 칼에 찔린 것처럼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귀족 영애야 많지만, 개인적인 교류를 하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누구 없을까.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줄 수 있는 조금 특이하고, 너른 마음을 가진 아가씨.
시어도어는 긴 손가락으로 찌푸린 미간을 누르며 고민에 빠졌다.
- 사샤 언니의 첫 번째 춤을 뺏겨서 아쉬우신 거예요?
‘아.’
머릿속에 흐릿하게 나넬이 떠오르자, 시어도어는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떠올리기 위해 잠시
고민했다.
조그맣고 수다를 잘 떠는 다람쥐 같은 꼬마 아가씨. 백작 영애였지.
그래도 그녀가 서 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교류하는 귀족 영애였다.
‘게다가 조금 특이한 구석도 있고.’
알렌의 공작 서임식에서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나넬이 떠올랐다.
그 꼬맹이는 내가 사샤를 좋아한다고 완전히 착각하는 것 같던데.
‘열여섯 정도 되었다고 했지. 아직 좀 어리긴 하지만.’
시어도어는 여전히 나넬의 나이를 잘못 알고 있었다.
……랑앤첸 백작 영애라.
아직 약혼을 하거나 따로 만나는 영식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자신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고, 뻔뻔하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그래도 시어도어로서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기 실 같은 희망에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
“한번 말이라도 꺼내 볼까.”
* * *
“어머, 시어도어 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백작가의 응접실에 있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을 보자, 안 그래도 커다란 나넬의 두 눈이
더욱 커다랗게 뜨였다.
“할 얘기가 있어서 급하게 왔어, 미안하지만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
“아, 네. 괜찮아요.”
시어도어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어 확인하고는 핫, 작게 혀를 찼다.
급한 마음에 이른 시간에 나넬을 만나러 달려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시어도어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응접실 문 뒤편에서 나넬의 언니들이 우르르 몰려와 시어도어를 훔쳐보느라 바빴다.
“아니, 동 제국의 그 소후작님 맞지?”
“저분이 왜 쟤를?”
“말도 안 돼….”
시집간 나넬의 큰 언니가 우연히 본가에 놀러 와 있던 차였다.
나넬의 언니들은 놀라움과 경악이 뒤섞인 얼굴로 서로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안 그래도 막내가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사람은 동 제국의 ‘그
’ 소후작 아닌가.
말도 안 돼, 나넬 쟤가 어떻게 저런 분을?
응접실에 있는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면 어마어마한 수다가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부탁할 게 있어.”
자리를 옮겨 조용한 티하우스에 마주 앉은 시어도어의 비장한 표정에 나넬은 고개를 갸웃거
렸다.
“무슨 일이신데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세요?”
나넬은 자신이 입고 있는 복숭앗빛 드레스처럼 발그레하고 동그란 분홍색 뺨 위에 손을 얹고
고민에 빠졌다.
‘갑자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거지.’
최근 사샤 덕분에 부쩍 자주 보긴 했지만, 시어도어가 자신과 독대를 청할 만큼 친밀한 사이
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다급한 얼굴로 자신을 찾아올 만큼 그에게 절박한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어제 못 주무신 거예요?”
나넬의 질문에 시어도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어제 내내 고민을 하다 밤을 지새운 채 랑앤첸 백작가로 온 길이었다.
사용인이 두 사람을 위해 차를 내올 때까지도 시어도어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
다.
‘본가에 끌려갈 것 같아서 그런데 잠깐만 방패막이로 가짜 연인 역할을 해줘.’
이게 말이 되는 부탁인가. 자기가 생각해도 백작 영애가 미친놈 보듯 볼 게 뻔하자 시어도어
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냉정해졌다.
내가 지금 무슨 짓까지 하는 거지. 이런다고 그가 날 봐주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나넬의 얼굴을 마주하자 시어도어는 갑작스러운 죄책감에 가
슴이 조였다.
혹시 그러다 이 아가씨에게 예상치 못한 피해라도 간다면?
내 이기심에 어린 아가씨를 고생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시어도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미친놈. 네가 하려는 짓이 얼마나 네 생각만 한 건지
알고 있냐.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나넬은 아무 말 없이 그가 불안해하는 일련의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무래도 미친 짓이다, 그냥 포기하는 수밖에.
시어도어가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말을 꺼낸 순간, 나넬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떼었다.
“괜찮아요.”
평소에는 작은 새가 짹짹거리는 것처럼 밝고 명랑했던 나넬의 목소리가 유독 차분했다.
죄책감에 그녀의 눈을 피한 채 테이블 쪽에 시선을 두고 있던 시어도어는 그제야 그녀를 바
라봤다.
“무슨 얘기든 좋으니까, 말씀을 해주세요.”
“….”
“전 소후작님을 오랫동안 안 건 아니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을 부탁하러 오신 걸 알겠어요
.”
나넬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러니까 말씀해보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돕겠어요.”
뒤죽박죽으로 뒤엉킨 여러 생각 속에서 혼란스러운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 같이 다정한
말이었다.
결국 이 아가씨뿐이잖아. 시어도어는 침을 삼키며 숨을 고르고 나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시어도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위장 연애요?”
“응, 잠시만…, 부탁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본가에 저랑 연애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는 거죠?”
시어도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 제국에 더 오래 머무르고 싶으셔서요.”
시어도어는 정말로 면목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몰랐어요.”
“응?”
“소후작님이 사샤 언니를 그 정도로 은애하는 줄….”
나넬은 양손으로 한층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며 작게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사실 저는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알렌사샤 파거든요. 후작님이랑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
지만, 외모나 분위기는 아무래도 알렌 님 쪽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리고 두 사람
이 만나게 된 배경도 매력적이고요.”
“…뭐, 뭐?”
“시어도어 님은 흑발 남주라는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있어서 시어사샤도 좀 고민되긴 했지만,
요즘 은발 남주도 상당히 수요가 있거든요. 그래서 죄송스럽지만 전 알렌 님을 응원하고 있
었는데, 시어도어 씨가 언니에게 이 정도의 마음일 줄이야…. 전혀 몰랐지 뭐예요, 죄송해요
.”
시어도어는 눈앞의 꼬맹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분명히 같
은 제국어를 쓰고 있음에도.
이마가 후끈거리며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 제가 저도 모르게 전문 용어를 써버렸네요.”
나넬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목을 가다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생각해도 무리라는 거 알아, 그러니까 그냥 없던 일로….”
“좋아요.”
뜻밖에도, 나넬은 바닥을 응시하며 웅얼거리는 시어도어를 향해 산뜻하고 시원스럽게 대답했
다.
“저, 정말?”
“네! 전 괜찮아요.”
나넬의 대답에 반색했던 시어도어의 얼굴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어두워졌다.
“흔쾌히 응해줘서 정말로 고맙지만, 아가씨에게는 도움이 될 게 없는 부탁이야.”
아무리 어린 아가씨라고 해도 백작가의 영애이다.
자신과 연애를 한다고 소문이라도 퍼지면 추후 연애나, 정혼자를 찾음에 있어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순순히 승낙해준 마음씨가 정말 고맙고, 자신으로서는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지만.
“정말로 괜찮아요, 저는요.”
나넬은 여전히 밝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음미했다.
사샤 언니네 가게 케이크가 더 맛있는 것 같아요, 라는 말을 덧붙이면서도 그녀는 아주 맛있
게 눈앞의 케이크를 먹어 치웠다.
“본가에 결혼을 앞둔 언니가 한 명, 약혼도 안 한 언니가 둘 있어요.”
랑앤첸 백작가는 제법 명문 있고 부유한 가문이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백작령 영지의 수
확이 줄어들고, 백작이 야심차게 투자했던 사업도 실패하면서 최근 몇 년간 경제 사정이 이
전에 비해 크게 위축되었다.
게다가 백작에게는 딸만 다섯이었다.
상황이 지금보다 나았을 때 시집을 간 첫째 딸은 괜찮았지만, 남은 네 명의 딸은 혼수 지참
금을 쥐여 주기도 빠듯할 정도였다.
막내딸인 나넬은 집안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다른 또래의 영애들처럼 빨리 정혼자
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납득해야만 했다.
다른 귀족 영애들과의 모임이 점점 줄어든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데뷔탕트를 마친 귀족 영애들이 모이면 가장 자주 나오는 화제는 정혼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아가씨가 귀족 영식과 혼담이 오고 간다는 말이 오가면 꼭 그녀들 중 몇몇은 나넬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내거나, 이런 얘기는 랑앤첸 영애 앞에서 하면 안 된다는 식의 눈빛을 주고
받으며 어색하게 대화 주제를 넘기기 일쑤였다.
그런 자리들이 몇 번 이어지자 나넬은 점점 사교 모임을 피하게 되었다.
어차피 자신이 있으면 결국 불편한 분위기로 티타임이 끝나든지, 일부러 그런 화제를 피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고르고 고르는 어색한 공기만 흐르게 될 테니까.
“그래서 당분간 약혼자가 생기지 않아요.”
“아….”
이런 사정이 원래 갖고 있던 그녀의 망상 체질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사샤를 처음 만난 건 그러한 일련의 상황들이 이어지면서 한창 나넬의 마음이 삐뚤어져 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