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가게는 먹고살 만큼만 운영되었다.
갑자기 엄청나게 대박이 나서 손님들이 줄을 서고 앉은 자리에서 돈을 버는 꿈같은 일을 바
라진 않았지만, 아쉬운 마음도 조금은 들었다.
뭐,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
손님들은 대부분 새로 연 사샤의 가게에 관심을 보이며 흘깃거리다 들어온 사람들로, 앉아서
차를 마시고 가는 일은 드물었고 빵을 사서 가고는 했다.
귀족들은 티하우스나 살롱이 잘 되어 있어서 디저트와 함께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일이
아주 익숙했지만, 평민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문화였다.
그래도 한두 명씩이라도 와서 차를 마시면서 일상의 피로를 풀고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
샤는 정성껏 손님을 맞이했다.
나넬은 가게를 연 날부터 사샤를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그녀가 선물로 준 액자는 카페 가운데에 잘 걸어두었다.
시어도어는 사람을 보내 갑작스럽게 바쁜 일이 생겨서 조만간 찾아가겠다며, 가게를 연 것을
정말 축하한다는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며칠 뒤에 칼라일이 커다란 봉투를 안고 방문했다.
“가게 구경을 할 겸 들렀습니다.”
칼라일이 내려놓은 봉투 안에는 커피콩과 그라인더가 들어 있었다.
알렌이 말한 대로 상자에는 친절하게 제국어로 번역된 커피를 만드는 설명서도 함께 동봉되
어 있었다. 설명서를 본 사샤의 얼굴이 밝아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콩을 볶은 다음에 완전히 갈아서 추출하면 커피가 된다는 건 알 것 같았지만 자세한 방
법까지는 몰랐으니까. 설명서가 없었다면 곤혹스러울 뻔했다.
“시간 괜찮으세요, 칼라일 씨?”
괜찮으시면 커피 한잔하고 가시는 게 어떻겠냐는 사샤의 제의에 칼라일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궁금했습니다. 잘 먹을게요.”
칼라일이 자리에 앉자 안나가 방금 구운 케이크를 내왔다.
사샤는 꼼꼼하게 설명서를 읽어본 뒤 시험 삼아 커피콩을 살살 볶았다.
볶아낸 콩을 그라인더에 갈아서 뜨거운 물을 붓자 사샤가 알고 있는 고소하고 풍미 있는 커
피 향이 가게를 전부 감싸 안았다.
“우와, 이게 무슨 냄새예요?”
그때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넬이었다.
“나넬, 왔어? 딱 좋을 때 왔네.”
커피 잔에 커피를 따르던 사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랑앤첸 백작 영애시군요, 안녕하세요.”
칼라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넬에게 인사를 했다.
“어머, 당신은 에른스트 공작가의?”
“네. 에른스트 공작의 보좌관, 칼라일 에이든입니다.”
나넬은 칼라일에게 살짝 눈으로 인사한 뒤 사샤의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이게 그 커피라는 거예요? 색이 홍차보다 훨씬 짙네요.”
“한 번 마셔 볼래?”
사샤는 준비된 커피 잔을 인원수만큼 알맞게 나누어서 각자의 앞에 놓아주었다.
세 사람은 처음 보는 향과 빛깔의 생소한 커피를 한참 바라보더니 천천히 잔을 들어 맛을 보
았다.
“음…….”
가장 먼저 커피를 입에 댄 나넬은 마치 사약을 먹은 것 같이 절망적인 얼굴이었다.
눈썹이 바르르 떨리며 커피를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꿀꺽 커피를 삼킨 나넬은 최대한 순한 말을 고르기 위해 고심하는
눈치였다.
“입에 잘 안 맞지?”
“음, 어….”
나넬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으로 살짝 닦아내었다.
안나도 비슷한 표정으로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확실히 낯선 맛이긴 한데 끝맛이 마음에 들어요.”
세 명 중 칼라일만이 그나마 호의적인 평가를 해주었다.
아무래도 그냥 커피는 입에 잘 안 맞나봐.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눈앞의 반응이 확신하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동서 제국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는 건 분명히 누군가가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명색이 티하우스가 아니라 카페라면 커피를 당연히 팔아야 하지 않겠어. 이대로 실패
하면 들인 공이 너무 아쉬우니까.
홍차도 어떤 건 씁쓸하고 어떤 것은 신맛이 난다. 커피도 분명히 매력적인 음료이니 이런저
런 시도를 해보면 예전보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나넬, 이건 어때?”
사샤는 커피가 남아 있는 컵에 냄비로 따뜻하게 끓인 우유를 붓고 시럽을 올려 나넬에게 내
밀었다.
“아까보다 훨씬 먹을 만할 거야.”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사샤에게 잔을 받아든 나넬은 조심히 입을 갖다 대었다.
“이건 맛있어요!”
나넬이 밝게 외쳤다.
쌉쌀한 커피와 고소한 우유에 달콤한 시럽 향이 조화를 잘 이루어서 나넬의 입에도 잘 맞았
다.
아까까지 어두웠던 표정은 사라지고, 나넬은 금세 기분 좋은 미소를 얼굴에 가득 띄웠다.
드디어 자신에게 마음을 담은 좋은 말을 해줄 수 있음에 기뻐서 그러는 것 같아 사샤는 그녀
가 더욱 고마웠다.
안나도 사샤가 만들어준 달콤한 라테가 훨씬 낫다는 평을 해주었다.
“잘 먹었습니다. 전 이만 일어나 봐야 해서.”
칼라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정돈하고 사샤에게 인사를 했다.
“앞으로도 번창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해요, 칼라일 씨. 자주 놀러 오세요.”
칼라일은 그저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려 반듯한 얼굴 위에 희미한 웃음을 그린 뒤 가게를 나
갔다.
“아, 맞다. 언니.”
나넬은 하려던 말을 떠올리고 라테가 남아 있는 잔을 하얗고 얇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저 시어도어 님이랑 사귀기로 했어요.”
“응?”
나넬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아닌 대수로운 일을 말하듯 어마어마한 사
실을 알렸다.
사샤는 놀라움과 경악으로 일그러져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누구랑 뭘 하기로 했다고?”
“아,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나넬은 천천히 어제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시어도어.”
황태자비 아그네스는 자신의 남동생을 우아한 목소리로 불렀다.
물결치는 검은 머리카락이 흑단처럼 반짝였고, 선명한 녹안은 고고하게 빛났다.
황실의 여인이라는 신분이 흠결 없이 어울리는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특히나 그녀의 단아한 인상은 새하얗고 깔끔한 색과 아주 잘 어울려서, 황태자와 결혼을 하
던 날 입었던 그녀의 웨딩드레스가 아직도 사교계에서 회자될 정도였다.
“네, 비전하.”
시어도어는 고개를 숙인 채 딱딱할 만큼 예의를 갖춰 답했다.
둘의 외모가 몹시 닮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그들이 남매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거리감이
었다.
“둘만 있을 땐 원래 부르던 대로 부르도록.”
“어찌 비 전하께 감히.”
에른스트 공작의 서임식이 있던 날, 시어도어는 황태자비의 시종으로부터 며칠 뒤 입궁할 것
을 명받았다.
친남매라고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엄연히 황태자비와 동 제국의 소후작이었다.
사적인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
원래도 어려운 누이였는데, 서 제국 황실에 들어가고 나서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사람이
되었다.
아그네스는 시어도어를 향한 탐탁지 않은 눈빛을 감추지 않으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다름 아니라 내가 오늘 그대를 부른 건, 아버님의 다급한 편지 때문이라네.”
“….”
아버님이라는 단어에도 시어도어의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미 서임식 날 누이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
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벌써 스물하나가 되었군.”
아그네스는 그 시절을 회상하는 듯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다.
“내가 지금 그대의 나이 때에는 벌써 황태자비가 된 지 오래였지.”
시어도어보다 고작 네 살 위인 아그네스에게는 아이도 있었다.
그녀의 옆방에는 어린 아들이 유모의 시중을 받으며 쉬고 있었다.
“아버님은 당신을 오래 기다려 주었다고 생각하고 계셔.”
“알고 있습니다.”
“더는 가주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당신에게도 좋을 거란 걸 알고 있겠지.”
남매의 아버지는 평소에는 몹시 냉정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한, 귀족 가문의 가주로서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런 점은 아그네스가 그대로 빼다 박았다.
하지만 프레데릭 후작은 가끔씩 이상한 부분에서 그 신묘할 만큼 날카로운 판단력이 흔들릴
만큼 이상한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부분은 시어도어가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누이로서 온 마음을 담아 하는 충고야.”
“……하아, 누님.”
시어도어는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누이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이제 그대의 어리광은 받아줄 수 없어.”
항상 저 강아지 같은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남이자 막내인 그의 편을 들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 시어도어도 어엿한 성인에 곧 가주로서의 역할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제멋대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지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서 제국에 머무르고 있지만, 사실은 프레데릭가에서 후계
자로서 제 역할을 다 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아그네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전히 철없으면서도 귀여운 동생을 나무랐다.
“시어도어 프레데릭 소후작.”
누이의 한층 낮아진 음성에 시어도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아그네스는 아주 어릴 적부터 모두에게 엄한 여인이었다.
그녀 자신은 시어도어에게는 어쩔 수 없이 물러진다고 자책한다지만, 아그네스 본인이나 그
렇게 느낄 뿐 동생들에게는 한없이 무서운 첫째 누이 그 자체였다.
“어른이 되도록 하세요.”
“…네, 비 전하.”
시어도어의 목소리는 약간 낮아졌을 뿐 별다른 변화는 없어도 표정만큼은 마치 주인에게 잔
뜩 혼난 강아지 같았다.
저렇게 안쓰러울 만큼 사색이 될 정도로 그가 고집을 부리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
정말 마음 약해지게 만드는 아이라니까. 아그네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시간을 버는 방법이 없진 않지만.”
갑작스러운 황태자비의 말에 시어도어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아버님께 서 제국에 머무르는 이유가 연인이 있어서라고 해보는 건 어떨까.”
“연인이요? 갑자기 무슨….”
“내가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이 정도까지. 나머지는 알아서 하게, 소후작.”
의아해하는 시어도어를 외면하며 아그네스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는 듯 시녀를 불러 찻잔
의 차를 따뜻하게 바꿔줄 것을 명했다.
아그네스가 더는 아까의 화제를 꺼내지 않았기에 시어도어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누이에게
인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있지도 않은 연인 핑계를 대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정도로 이번만큼은 간절했다.
정말 몇 년 만에 간신히 알렌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본가에 돌아간다면? 영영 그와의 인연이 끊겨버릴 게 분명했다.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었다.
어차피 곧 물려받아야 하는 후작위이다. 아버지는 한시라도 빨리 가주를 넘기고 쉬고 싶어
하신다.
동 제국에 돌아가야 하는 것은 기정사실일지라도 잠깐의 추억을 만드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
시어도어는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