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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56화 (56/101)

56.

사샤의 방은 그녀가 처음 왔을 때와 변함이 없어 마치 객실 같았다. 그녀의 흔적은 하나도

남지 않은 채였다.

사샤는 알렌을 테이블에 앉히고 나서, 리타의 묘지를 다녀와서 들렀던 마을에서 사 온 와인

과 와인 오프너를 꺼냈다.

“내가 열게.”

와인을 건네받은 알렌은 와인 병을 열고 먼저 사샤의 잔에 천천히 와인을 따랐다.

이전에 알렌이 가져왔던 것처럼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주머니 사정

보다 더 큰돈을 들여서 사 온 꽤 좋은 와인이었다.

알렌은 사샤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게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스만에서 커피를 실은 무역선이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았어. 열흘 안에 커피가 도착한다더

군. 도착하면 바로 네 가게로 보낼게.”

“정말요? 감사해요.”

“응. 만드는 방법이 적힌 설명서도 첨부되어 있다고 하니 확인해봐.”

“그렇게 할게요. 나중에 시간 되면 드시러 오세요.”

“그래도 돼?”

“그럼요.”

“너는.”

커피를 어디서 알았지? 라는 질문이 입가를 맴돌았다.

아마 그렇게 물어보면 사샤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허둥지둥 변명을 찾겠지.

사샤의 비밀은 그녀의 안에 꽁꽁 싸매어져 누구에게도 쉬이 보여줄 것 같지 않았다.

아직도 네가 너무 멀다, 알렌은 살짝 눈을 내리감으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사샤는 와인을 한 입 머금었다. 시큼하면서도 끝에는 기분 좋은 단맛이 돌았다.

“리타의 묘지에 갔다가 생각했어요.”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기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낸 날이 더 많았다는 걸.

친구도 생기고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도 생기고 새로운 이름도 생겼다.

“알렌에게 너무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야말로 고마워.”

너를 알게 된 지금이 가장 나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라는 걸.

“어떤 게요?”

차마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쑥스러워 알렌은 적당히 둘러대었다.

“서임식 때 댄스 파트너가 되어줘서.”

“허허….”

와인 한 병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금세 비워졌다.

“슬슬 가야겠군, 쉬어야지.”

사샤의 눈빛에 아쉬움이 스쳤다. 한 병 더 사 왔으면 좋았을걸.

그와 허심탄회하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

유감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읽은 알렌은 입가를 살짝 올리며 읊조리듯 말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마지막….

이제 이 공작가를 나가면 그를 지금처럼 자주 만날 수 없게 되겠지.

“네게 인사해도 될까?”

“…그래요.”

사샤가 고개를 조금 끄덕이자 알렌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서 그녀의 뺨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알렌의 손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지만 낯선 촉감에 사샤의 어깨가 조금 들썩였다.

알렌은 고개를 숙여 다른 한 손으로 사샤의 앞머리를 살짝 넘기고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따뜻한 알렌의 입술이 닿자 사샤는 마치 이마가 불에 덴 것 같은 기분에 의지와는 관계없이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알렌은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왼쪽 뺨과 오른쪽 뺨에도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인사라면서요.”

사샤의 얼굴이 어느새 새빨개져 있었다. 간신히 말을 쥐어짜 내는 사샤에게 눈을 떼지 않으

며 알렌은 낮게 속삭였다.

“그때, 기억나?”

“….”

“네가 나에게 갑자기 입 맞췄던 날.”

잊었을 리 없다.

자신을 몇 번이나 죽였던 증오스럽고 건방진 소공작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심정 하나로 대뜸

입을 맞췄던 날. 승리감에 취해서 잠들었던 날.

“난 하루도 잊은 적 없어.”

사샤는 두 눈을 다시 꼭 감았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그러지 않을 텐데. 왜 그랬을까.

“사샤.”

알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사샤는 미칠 것 같았다.

“키스하고 싶어.”

“….”

“입, 맞춰도 돼?”

심장은 이미 제멋대로 뛴 지 오래였다. 알렌의 말에 사샤는 마지막 남은 이성마저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사샤는 보일락 말락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알렌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사샤의 입술에서

는 달콤한 향이 났다.

긴장해서 눈도 뜨지 못하고 숨을 참고 있는 사샤를 바라보자 바짝바짝 전율이 일었다.

한참을 입술을 겹치고 있던 알렌은 사샤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신 쪽으로 한층 끌어들

였다.

“조금만….”

알렌의 애원 섞인 부탁에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몸을 기대며 밀착했다. 그러자 알렌

이 사샤의 가느다란 허리를 붙잡았다.

그때 사샤의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려 주저앉을 것 같이 휘청거렸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움직이던 알렌 역시 발이 엉켜서 두 사람은 침대 쪽으로 넘어졌고, 알렌

이 사샤를 덮치는 것 같은 자세로 겹쳐졌다.

먼저 정신을 차린 알렌이 그녀의 입술에서 입을 뗐다.

“…하아.”

알렌은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는 사샤를 바라보았다.

홍조를 가득 띠고 물기 머금은 눈빛을 앞에 두고 이성을 붙잡는 건 너무나 힘들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알렌은 세게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 이만 쉬어.”

거칠게 마른세수하고 나서 한숨을 뱉은 알렌은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사샤의 방을 떠났다

.

……미친 게 분명하다.

그제야 사샤는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진짜로, 미쳤어.”

참을 수 없는 민망함에 사샤는 같은 말만 뱉으며 침대 위에서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처음과는 너무 달랐다. 분위기도, 그녀의 마음도. 이건 마치 여, 연인 같은 그런 키스였잖

아.

어떡해, 엊그제 분명히 좋은 집안의 다른 여인을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고 해놓고 이렇게 날

름 키스해버리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겠어.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마지막 날은 도저히, 절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 *

완성된 사샤의 가게는 그럴듯했다. 1층은 서너 개의 테이블로 이루어진 작은 가게이고, 2층

은 사샤와 안나가 지낼 수 있는 방과 부엌, 욕실 등의 생활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공작가에 있는 것들처럼 고급스럽진 않았지만 하나하나 좋은 물건이었다.

두 사람이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까지 공작과 보좌관께서 체크해서 넣어주었다고, 안나가 말

했다.

가게는 저녁에는 바로 운영하기 위해 오픈된 주방 쪽으로 길게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예전에 일했던 경험으로 사샤는 값은 저렴하지만 좋은 술들을 잘 알고 있었다. 단골들이 생

기면 쏠쏠하게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나는 가게 문 앞에 가게 이름을 적은 팻말을 내걸었다. 달을 의미하는 ‘카페 루나’가 이

름이었다.

“루나는 달이고, 카페는 무슨 뜻이에요?”

“커피를 파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커피…. 사샤가 얘기했던 그거 맞죠? 홍차랑 비슷하다는.”

“네, 조만간 도착할 거예요.”

카페 이름은 여러 가지 후보를 만들어서 고민했지만 왠지 모르게 루나로 결정했다.

사샤는 달을 좋아했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차가운 듯 하얀빛을 내뿜지만, 사실은 가장 밝게

빛나는.

원래도 좋았지만 요즘은 더욱 마음에 드는 이유는 아마 달빛이….

누군가가 떠오르려고 했지만 사샤는 잡념을 지워버리려는 듯 손을 펼쳐서 허공을 휘휘 저어

버리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내일부터 장사를 시작할 수 있겠네요.”

“그러게요.”

안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작가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에른스트는 워낙 고위 귀족의 저택이라 항상 긴장 상태로 자신을 조이고 있어야 해서

힘들었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그런 안나에 비해 사샤는 눈 밑이 거무스름하게 그늘져 초췌해 보였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뇨! 아무 일도.”

사샤가 이상하리만치 과하게 손을 내저으며 부인하자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밤새운 거예요?”

이거야말로 부인하기 힘들었다. 지금 사샤의 얼굴은 누가 봐도 나 하나도 못 잤소, 하고 쓰

여 있는 것처럼 안 좋았으니까.

“걱정이 많아요?”

“….”

“사샤, 혹시 공작님….”

안나의 말에 퀭했던 사샤의 눈에 불이 켜진 듯 번뜩였다.

갑자기 알렌이 왜? 혹시 안나가 뭘 눈치챘나. 아니면 어제 혹시 뭘 본 건가?

사샤는 갑자기 등에서 땀이 흐르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공작님께 너무 감사해서 잠이 안 온 거예요?”

그럴 리 없지.

“그, 그런 거 비슷해요.”

“사샤도 참. 같이 열심히 해서 공작님의 은혜를 갚아 보자고요.”

안나의 의욕이 넘치는 목소리에 사샤 역시 긴장한 얼굴을 풀고 웃어버렸다.

두 사람은 마주 서서 밝은 표정으로 새로운 시작을 축하했다.

두 사람은 안나가 직접 만든 앞치마를 맞춰 입었다. 손재주가 좋은 안나는 틈틈이 바느질이

나 뜨개질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곤 했다.

사샤는 허리에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 펼쳐보았다. 밝은색의 앞치마에는 안나가 직접 정성스

럽게 수놓은 꽃무늬 아래 사샤의 이니셜이 새겨 있었다.

“그런데 사샤.”

메뉴판을 읽어보던 안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설탕 케이크는 뭐예요?”

“아, 그거요?”

안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메뉴판의 구석 자리에는 설탕 케이크라고 작게 쓰여 있었다.

테이블을 닦고 있던 사샤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설탕으로 만든 케이크예요.”

“응?”

“설탕만 들어간 빵 같은 거예요. 아무도 안 먹을 것 같죠?”

사샤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긁적였다. 설탕 케이크는 리타가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간식이

었다.

서 제국은 예전에 비해 설탕의 공급이 원활해져서 평민들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주머니가 빈곤할 때 리타는 사샤에게 설탕 케이크를 해주곤 했다.

약간의 우유와 설탕이 들어가서 옅은 갈색을 내는, 단맛 외에는 풍미라고는 없는 수수한 케

이크였지만 어린 사샤는 굉장히 좋아하면서 맛있게 먹었었다.

“그래서 이 메뉴는 상시 품절이에요.”

리타만을 위해 만든 메뉴니까.

그렇게 말하며 사샤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메뉴판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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