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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54화 (54/101)

54.

“……황녀.”

웅성거리는 소리가 뭉쳐 단어로 이해된 첫 번째 말이었다.

한 번에 많은 양의 빛을 받아서인지 단숨에 떠지지 않았지만, 밀레나는 어떻게든 굳게 닫힌

눈을 뜨기 위해 애썼다.

“황녀 전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밀레나는 그때서야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을 오랫동안 보아오던 황실의 주치의란 사실을

깨달았다.

“무…….”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밀레나가 간신히 뱉은 말을 들은 에마가 급하게 다가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입 주변을 닦아내었다.

“무슨, 일이지.”

여전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밀레나는 드디어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 입 밖으로 꺼

낼 수 있었다.

분명 가장 마지막 기억은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고통이 그녀의 몸을 잠식하

고, 손쓸 틈도 없이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밀레나는 쓰러지기 전 착용했던 드레스가 아닌 실내복을 입고 있었다.

에마가 갈아입힌 거겠지. 그러면 하루 정도 지난 건가.

“일주일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뭐, 일주일……?

황실의 주치의는 밀레나의 안색을 살피며 그녀가 쓰러지고 난 후의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황녀를 노린 독살이 의심되어 황실이 발칵 뒤집혔으나 아무리 조사를 해도 독성분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치유 마법으로 내상을 치료해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모두 애타게 기다렸다는

것.

“황제 폐하께서 저녁에 찾아오시겠다고 전언하셨습니다.”

“아니, 아직…. 아바마마를 뵐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전해……요.”

밀레나는 우아하고 아랫사람에게까지 존대하는 황녀의 가면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며 명했다.

황녀의 말에 고개를 숙인 주치의는 약을 조제하기 위해 물러났다.

그가 나가자마자 밀레나는 본디 차갑고 냉혹한 무표정으로 돌아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연회가, 끝나고 나서였지.”

“…네.”

두 손을 모은 에마는 고개를 숙이고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양 힘없이 대답했다.

밀레나는 쓰러지기 직전의 일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다.

분명히 그녀는 연회가 끝나고 자신의 방에 돌아왔다. 정말 최악의 기분이었지.

연회장에서 하하 호호해대던 알렌과 그 천박한 여자에 대한 분노로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방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저주 때문인가.”

분명히 정신을 잃기 직전, 밀레나는 그 여자에게 다시 저주를 걸었다.

그렇다면 이건 저주의 부작용?

지금까지 밀레나가 저주를 사용한 건 총 세 번이었다.

앞에 두 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그녀가 저주를 걸자마자 엄청

난 고통과 함께 검은 피를 토했다.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에마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머리를 쿵쿵 찧으며 황녀를 향해 끊임없이 사죄의 말을 되풀이했다.

“제가 전하께 그런 것을 권해서, 황녀 전하의 귀하신 옥체에 손상을 입혔습니다. 부디, 부

디 죽여주십시오…….”

에마의 눈물이 방울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밀레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 여자는.”

“….”

“……어떻게 됐지.”

“…그, 그게.”

“어서 말을 해.”

좀 더 지엄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스스로도 놀랄 만큼 기운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에마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황녀의 낯선 목소리에 긴장해 말을 더듬

거렸다.

황녀의 수석 시녀라는 체통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 여자에게는 아무, 일이 없던 것 같습….”

“저주가 통하지 않은 건가.”

기어들어 갈 것 같이 대답하던 에마는 밀레나의 물음에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

밀레나는 혀를 차며 여전히 힘이 없는 팔을 들어 찡그린 미간을 짚었다.

저주마저 통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절망스러웠다. 알렌은 그 여자와 보란 듯이 희희낙락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테고, 자신

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저주의 부작용으로 허망하게 시간을 날렸다.

게다가 그 여자를 불러 협박한 사실이 알렌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했다면….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기분은 처음이었다. 밀레나는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니까.”

그때 갑자기 들려온 낮은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잡아 찢듯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무리하셨어요.”

밀레나와 에마는 당황해서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황녀의 방에 있었는지도 모를 사이에 나타난 한 남자가 두 사람 뒤에 여유롭게 팔

짱을 끼고 웃는 낯으로 서 있었다.

방금 남자가 말하기 전까지 분명히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었다.

황녀가 저주에 대해서 내뱉는 걸 누군가가 들었다니,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넌…….”

밀레나는 갈라지는 목소리를 흘리며 초면인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누님.”

그는 덥수룩하고 지저분한 갈색 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쓴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로 일부러 누

님이라는 단어를 한 글자씩 또박또박 강조하며 빙긋 웃었다.

누님이라고?

밀레나는 귀를 의심했다. 이 세상에 그녀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그 사람은.

“요한…?”

“몇 년 만에 만났다고 동생 얼굴을 잊으신 건 아니죠?”

아, 맞다! 남자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에마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너.”

고개를 든 에마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남자의 눈과 마주하자 저도 모를 공포감에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이름이 뭐더라?”

“에……에마입니다.”

“그래, 에마였지. 우리 누님의 하나뿐인 소중한 끄나풀.”

“….”

“손수건 있어? 좀 줘봐. 깜빡해서 말이야.”

“아, 여, 여기 있습니다.”

에마는 허둥지둥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는 덥수룩한 가발을 벗어 사뿐히 바닥에 떨어트리고, 그녀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거

칠게 닦기 시작했다.

“변장을 한다고 했는데 효과가 있었나 봐, 누님이 바로 못 알아보는 걸 보니.”

손수건을 치우자 그의 원래 얼굴이 드러나자 밀레나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경악했다.

“하여튼 여전히 너무 순진하고 순수하시다니까, 우리 누님은.”

벌꿀로 빚은 것 같이 밝은 허니 블론드의 머리카락에 눈썹은 물론 속눈썹까지 금빛으로 반짝

였다.

성화에 나오는 천사가 사람이라면 저런 모습일까. 성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예찬

이 아깝지 않은 미모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열일곱이던 남동생의 소년 같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완연한

성인 남성으로서의 성숙함만이 느껴졌다.

“멍청할 만큼.”

그러나 유난히 붉은색이 도는 그의 우미한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신랄하고 잔혹하기 그지없

었다.

“누가 널 여기에 들였지? 넌 아직 동 제국에 있는 거 아니었나?”

“누님, 아직도 그런 게 중요한 건가요? 제발 본질을 보세요.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요.”

언제나 이런 남자였다.

누이를 교묘하게 놀리고 깎아내리고, 그러면서 나는 널 걱정해서 그런 것이라고 속삭이고.

하지만 밀레나는 항상 그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요한의 얼굴은 황비를 너무나 닮아서, 밀레나가 평생 갈구하고 바라고 두려워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요한에게 그대로 보였다.

그리고 황비의 행동까지도, 남동생은 무서울 만큼 빼닮아 있었기에.

어머니에게 그랬듯, 밀레나는 그가 역겹고 미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에게 인정받고,

또 애정을 받기를 원했다.

경계의 눈빛을 띤 밀레나를 바라보며 요한은 미소 지었다.

“제가 떠나 있던 동안 재밌는 일이 많이 생겼군요.”

요한이 화사하게 웃었다. 너무나 화사해서 불길할 만큼.

밀레나는 까득, 손톱을 물어뜯었다. 정성스럽게 다듬었던 손톱이었지만 이제 이런 것 따위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너덜너덜해지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초조하게 손톱 위를 잘근댔다.

“에른스트 서임식, 가관이던데요.”

요한은 두 팔을 과장되게 들어 올린 채 황녀의 방을 뚜벅뚜벅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대체 누님은 누님이 주인공이셔야 할 자리를 어쩌다 뺏기고.”

그리고는 벽 한가운데에 걸려 있는 밀레나의 초상화 앞에 멈춰 서서 쯔쯧, 혀를 찼다.

“이름이 뭐라더라…? 아무튼 서 제국이 온통 알렌 폰 에른스트의 여자 이야기인 거 아시죠?”

“닥쳐.”

밀레나는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욕설을 뱉었다. 황궁에서만 자란 고귀한 황녀의 입에서 나

오리라 상상할 수 없는 단어였다.

“누님, 저에게 화풀이하신다고 되겠어요?”

“….”

“지금 당신이 화난 건, 제가 아니잖아요.”

밀레나를 살살 긁으며 도발해 놓고 요한은 뻔뻔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 누님을 도울 사람이지 방해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요한은 입매를 비틀며 조소를 흘렸다.

“그런데 우리 누님은 어렵게 구한 수를 쥐여 드려도 이렇게 자멸하고 계시니. 누님이 걱정되

어서 제가 동 제국에 맘 편히 있을 수 있겠냐, 이 말입니다.”

“……네가 뭘 알아.”

“알죠. 저 말고 누가 당신을 제대로 알겠습니까.”

“….”

“누님의 오랜 연심도,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으실 거라는 것도

.”

요한은 밀레나에게 한 발짝 다가가 그녀에게만 들릴 크기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누님은 또다시 실패한 건가요?”

“…요한.”

“겨우 그 여자 한 명 해치우지 못하고 저주에 실패해서 일주일을 앓아누워 계셨던 건가요.

나의 나약한 누이는.”

밀레나는 나긋한 어조로 빈정거리는 요한을 이를 갈며 노려보았다.

“……그만해. 요한 이그나즈.”

“휴, 정말 어쩔 수 없죠.”

요한은 미간 사이에 손가락을 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이마에 올려놓은 손 아래로 요한은 홀리듯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밀레나는 그의 말에도 여전히 불신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입

매만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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