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자정이 넘어 아무도 없는 조용한 부엌에서 사샤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
였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몸이 바쁜 편이 나았다.
사샤는 낮에 나넬과 함께했던 티타임이 끝나자 바로 가게로 이동해서 인부들을 도우며 주변
을 청소했다.
밤늦게야 공작저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해치우고, 바로 부엌에 와서
몇 시간 째 빵과 케이크를 굽고 있었다.
“우와….”
오늘 처음 만들어 본 타르트는 대성공이었다. 시나몬 향이 식욕을 자극하는 황금빛 빵 위에
올라간 호두에서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흘렀다.
스스로가 봐도 성공적인 먹음직스러운 모양새에 사샤는 팔짱을 끼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팔아도 괜찮겠어.”
사샤가 아무리 요리를 하는 데에 익숙하다 해도, 남에게 팔 수 있는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자
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꾸준히 잠도 줄여가며 연습했는데, 오늘 만든 타르트는 그런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손을 맞잡고 뛰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뿌듯하게 바라
보며 사샤는 하루 종일 착잡했던 마음이 씻어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누구든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안나는 이미 자러 간 지 오래였고, 새벽에 깨어 있는 사용인은 거
의 없었다.
- 밤늦게나 오시지 않을까요. 밀린 업무가 많아서 아마 내일 이 시간에는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어제 이곳에서 칼라일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알렌…. 그는 아마 집무실에 있겠지.
사샤 주변 사람들은 다 한 번씩 그녀가 만든 간식을 맛보았다.
일부러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알렌에게만 아직 사샤가 직접 만든 빵이나 과자를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까지 황성에서 상상도 되지 않는 산해진미를 먹고 왔을 그이다.
전문 파티시에도 아닌 사샤가 만든 디저트를 흡족하게 먹을까.
그래도, 이렇게 가게 준비를 위해 힘쓸 수 있는 것도 그의 덕분인데.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칼라일에게 부탁받기도 했고, 지금 깨어 있을 것 같은 사람은 그 사람뿐이고, 알렌도 먹을
자격이 있긴 하니까.
그렇게 이유를 몇 개나 만들고서야 사샤는 깨끗하게 닦은 접시 위에 가장 잘 구워진 타르트
를 두 개 골라 올리고 찻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 * *
소공작 집무실의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사샤에게 익숙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불꽃이 튀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고, 살짝 열어 놓은 창문에서는 청량한 밤
공기가 들어왔다.
소공작은 낮에 입고 있던 제복을 갈아입었는지 편해 보이는 셔츠 차림으로 서류를 들여다보
고 있었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누구지.”
“저….”
알렌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들고 사샤와 눈을 맞추었다.
칼라일이나 사용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오리라 예상치도 못
한 알렌의 입에서 작은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늦게까지 일하시는 것 같아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 왔어요.”
사샤는 커다란 쟁반을 들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막상 집무실에 들어와 알렌의 얼굴을 보니
긴장감이 몰려와 구두 속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상 위에 들고 왔던 쟁반을 올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사샤가 구운 호두 타르트와 방금 끓인 차의 향기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홍차는 이미 많이 드셨을 것 같아서 레몬차를 가져왔어요.”
알렌은 단 걸 즐기는 것 같진 않았지만, 늦은 밤이니 과일차가 더 숙면에 도움이 될 것 같
아서 일부러 준비했다.
설마 그녀가 이 시간에, 그것도 자신을 위해 요깃거리까지 챙겨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
던 알렌은 놀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고마워, 잘 먹을게.”
찻주전자에 손을 가까이 대어 보자, 마시기 편한 온도로 적절하게 식어있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익숙한 홍차 향이 아닌 달콤하면서 시큼한 향이 난다 했더니 레몬차였군. 그는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부었다.
알렌은 기쁜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에 찻잔을 가져다 대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알렌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는 찻잔의 바닥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차에 들어가 있는 이 건과, 남작령에서 받아온 건가?”
“맞아요.”
“그렇군, 맛이 괜찮은데.”
지금은 과일을 수확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어서 사샤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린 청귤만 받아올
수 있었다.
그래도 차에 넣어보니 그것만으로도 독특한 풍미가 느껴졌다.
“원래 마시던 레몬차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아.”
알렌의 평가에 기분이 좋아진 사샤의 어깨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만 슬쩍 올라갔다.
다른 것보다 이 차만큼은 제일 먼저 알렌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헤른 남작령이 지금은 잠시 사샤의 명의가 되었지만, 언젠가 그녀가 온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을 때는 다시 에른스트 공작가에 돌려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알렌이 지켜낸 곳이니까.
알렌이 맛있게 마셔준다면 영지의 사람들도 몹시 기뻐할 것 같았다.
“이 파이도 직접 만든 건가.”
사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어.”
알렌은 순수하게 감탄한 목소리로 한 입 베어 문 타르트를 들고 사샤를 바라보았다.
황성의 요리사가 만든 최고급 요리에도 입맛이 없다며 제대로 입에 대지 않았던 알렌이었다.
그는 요 며칠간이 거짓말인 것처럼 타르트를 맛있게 먹었다.
꾸밈없이 행복해 보이는 알렌의 표정에 아까까지 어색했던 두 사람의 분위기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사샤 역시 그에게 오기 전까지 고민이나 걱정했던 것들이 모두 바보같이 느껴지며 긴장이 풀
리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맛있다고 하니 다행이에….”
후아암, 사샤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오븐이 있어 춥진 않았지만 그래도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부엌에 비해 소공작 집무실은 난로
가 있어 훨씬 따뜻했다. 그 온도 차에 도저히 하품이 참아지지 않았다.
“피곤해 보이네.”
“아, 괜찮아요.”
“얼른 가서 쉬는 게 낫겠어.”
사샤는 조금 민망함을 느끼며 한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아직 오븐에 굽고 있는 케이크가 있어서 잘 순 없어요. 얼른 마무리하고 쉬면 돼요.”
“얼마나 걸리지?”
“한 시간 정도?”
너무 무리했나. 그래도 새벽이 되어야 오븐을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쓸 수 있었다. 할 일을
하다 보면 이렇게 오늘처럼 시간이 많이 지나가 있곤 했다.
“그럼 그때까지 여기에서 쉬었다가 가는 건 어때.”
알렌은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난로 옆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잠깐 눈 붙이고 있으면 깨워줄게.”
“그냥 부엌에서 기다려도 돼요.”
“내내 이걸 만드느라 고생했잖아. 난 여기에 계속 있을 거니까 시간이 되면 말해줄 수 있어
.”
몇 번 손을 내저으며 사양해도 알렌이 권유를 무를 기색이 없어 보이자 사샤의 마음도 조금
씩 흔들렸다.
안 그래도 내내 부엌에 서 있어서 다리가 아프던 찰나였다.
게다가 바로 옆에 있는 벽난로에서 계속해서 기분 좋은 따뜻한 온기가 올라왔고, 오늘따라
유난히 더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그녀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그럼, 잠시만 실례할게요.”
결국 사샤는 본능에 두 손 들어 버린 채 머뭇거리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알렌이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혹시 내일 시간이 어떻게 되지?”
“특별한 일은 없어요.”
“그때 말한 슈베린 호수, 오후에 갈 수 있을까.”
예전에 알렌이 꼭 둘이서만 다시 가자고 부탁했던 호수였다.
“그러죠, 뭐.”
사샤에게도 슈베린 호수에서의 사건은 찝찝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약속했던 일이니까, 사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두 시에 로비에서 만나는 거로 하자.”
“알겠어요.”
“좋아, 눈 좀 붙여. 한 시간이라고 했지.”
공기마저 차분히 가라앉은 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소파에 머리를 기대자, 알렌의 펜이 내
는 규칙적으로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천장에 달린 커다란 샹들리에에 켜진 몇 개의 촛불 옆으로 알렌의 그림자가 번지며 어스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적당히 따뜻한 난로의 온기에 몸도 마음도 노곤하게 녹아내렸다.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바쁘게 시내를 돌아다니고, 밤에는 메뉴 연습 때문에 몇 시간이나
부엌에서 부산스레 움직였으니 피곤한 건 당연하긴 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자리를 잡았지만 여긴 소공작의 집무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어나서 부엌으
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샤가 억지로 잠을 깨려 노력할수록 반동이 오듯이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사샤는 결국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몇 번 깜빡거리던 눈은 스르르 감기며 잠에 빠
져들었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땐, 어느새 두꺼운 담요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알렌은 여전히 집무실 책상 앞에 있었다.
부스럭거리며 사샤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을 때야 그의 시선이 조용히 그녀 쪽으로 옮겨졌
다.
책상 위에 켜진 램프 불빛 아래 알렌의 청안이 더욱 깊게 반짝였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그를 보았다. 환영이나 꿈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가장 맑은 날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같고, 언젠가는 해안선 너머의 잔잔한 바다
같이 푸른 그의 눈이 얼마든지 자신의 감정을 읽으라는 듯이 진솔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눈빛을 알고 있어.’
사샤는 자신의 손이 어느새 미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느끼고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
었다.
그래, 알렌의 저 눈은….
‘꼭 리타 같아.’
알렌은 리타가 사샤를 바라볼 때와 꼭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정과 사랑을 가득 담고 있는, 말로 하지 않아도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안겨
서 울고 싶어지는.
대체 언제부터 그가 나를 저렇게 보기 시작한 걸까.
“……정말 날 좋아하나요.”
사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질문 같은 혼잣말에 스스로가 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물음에
알렌은 아주 잠시 묘한 표정을 짓더니 금방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래.”
그리고는 두 손을 깍지 끼고 턱 앞에 올린 채 낮은 목소리로, 조금의 망설임 없이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미쳐버릴 만큼.”
덤덤한 표정과 말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지독한 열망이 깔려 있었다.
불꽃 중에서 푸른 불꽃이 가장 뜨겁다고 했던가, 그의 푸른 눈이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
같아 보였다.
손끝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이 자리에 더 있다간 정말 그녀가 불길에 휘말려 들기라도 할 것 같은 위험한 기분이었다.
사샤는 손톱을 손바닥 깊숙이 파묻으며 자신이 내뱉은 말로 스스로가 판 함정 같은 상황에서
도피하기 위해 다급히 입술을 떼었다.
“……다 드신 것 같아서 그만 가볼게요.”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앞섰다.
그녀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알렌의 시선을 피하며 책상 위에 쟁반에 손에 뻗었다.
접시와 찻잔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사샤는 인사를 내뱉다시피 던지고 문을 열어 소공작 집무실을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서 부엌으로 향하며 사샤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미쳤어.
무서웠다. 알렌이 아니라, 자신이 무서웠다. 이런 감정은 원한 적 없다.
손끝이 감전된 것처럼 계속 저릿하고 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사샤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런 얼굴을 하면 널 포기할 수가 없잖아.”
알렌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집무실을 나가고 나서도 그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
다.
사샤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고 그녀의 결정을 따를 생각이었다.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샤를 돕고, 그녀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무슨 일이지?’
- 나를 좋아하나요.
그녀가 어째서 그런 것을 물어본 걸까.
머리는 그저 착각이라고 차갑게 부정하면서도, 가슴은 불붙은 듯 뜨겁게 희망적인 미래를 속
삭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강한 충격이 시간을 잠시 멈춰버렸다.
그 덕에 그는 오히려 차분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널 좋아하냐고? 할 수 있다면 네 귓가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속삭이고 싶다.
단 한 번의 말로 내 마음이 네게 온전히 전달될지가 더 걱정일 정도인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너로 인해 번민하고 괴로워하고 황홀해하는 이 마음이, 이게 사랑이 아
니라면.
대체 어떤 감정이 사랑이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