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알렌뿐만 아니라 사샤 역시 이전과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녀는 알렌에게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것에서 당황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건….
이건 생각보다 좋은 신호가 아닌가.
사샤에게 정신없이 목을 매던 ‘그’ 알렌이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공작저를
비운 것도 신기한 일이긴 했다.
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샤에 대한 연정을 접었을 리는 없고.
그저 연애 경험 없는 동정에다 짝사랑 중인 남자 특유의 쓸데없는 생각에서 나온 헛발질일
터이니 그쪽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칼라일은 눈앞의 사샤가 보이는 반응이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는 우물쭈물하는 사샤에게 흘끗 시선을 던지고는, 입꼬리가 제멋대로 휘어지려는 것을 참
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원래 오늘 돌아올 거라고 하셨는데 늦춰지신 것 같습니다.”
그는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넌지시 말을 이었다.
“흠, 아마…. 황녀 전하와의 만남이 길어지고 있는 게 아닐지.”
“황녀 전하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칼라일은 황녀라는 단어에 사샤의 눈동자가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는 사샤에게 보이지 않게 살짝 입을 가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은 뒤 금방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1황녀 밀레나 루도비카 전하를 아시는지요.”
“음…. 성함은 들어본 것 같아요.”
불과 몇 달 전까지 평민이었던 사샤에게 황실 사람들이나 귀족들은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래도 사샤가 다녔던 여학교에서는 상류층을 동경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대충이나마 들어본
적은 있었다.
황제의 첫째 딸인 밀레나는 인지도가 높고 인기도 많았기 때문에 그런 쪽에 무관심한 사샤에
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정말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주 아름다우시다고요.”
“네.”
“실제로 뵌 적도 있으시겠네요.”
“그렇습니다, 몇 번 뵈었죠.”
“그렇게 아름다우신가요?”
칼라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께 붙는 수식어가 모자라지 않은 정도의 미색이셨습니다.”
물론 황녀가 대단히 뛰어난 미인인 건 사실이었지만, 칼라일은 사샤를 자극하기 위해 평소보
다 더욱 과장된, 연극 같은 어조로 밀레나의 외양을 칭찬했다.
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 여자에 무심해 보이는 저 칼라일마저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걸까.
사샤는 갑자기 서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밀레나 황녀의 얼굴이 너무나 궁금해졌다.
“황녀 전하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건가.”
사샤는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생각이 혼잣말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게 그 증거였다.
뒤늦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런 사샤를 보며 칼라일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두 분은 적지 않은 시간 교류하셨습니다. 입궁할 때마다 황녀 전하께서 소공작을 잘 챙겨
주셨죠.”
칼라일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아주 자연스럽게 ‘때마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화려한 황녀의 방에서 다정하게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
황녀 전하는 미모로 유명할 만큼 아름답다고 하니 알렌과 틀림없이 잘 어울리겠지.
“그, 그렇군요.”
“소공작께서는 내일 돌아오십니다.”
“….”
“밤늦게나 오실 것 같군요. 밀린 업무가 많아서 아마 내일 이 시간에는 집무실에 계실 겁니
다.”
칼라일에게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의 스케줄을 예상하는 것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였다.
알렌의 성격상 아무리 피곤해도 밀린 일을 하고 쉬려고 할 게 분명했다.
“혹시 내일도 새벽에 여기 계신다면 알렌 님께 직접 여쭤보시는 것도….”
칼라일은 말끝을 부자연스럽게 흐리며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닙니다. 제가 쓸데없는 소리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라일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살짝 미소 지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사샤 씨 덕분에 든든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별말씀을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칼라일이 떠나고 부엌이 다시 조용해지자, 사샤는 준비해둔 달걀흰자로 머랭을 치기 위해 거
품기를 젓기 시작했다.
시선은 허공에 둔 채 팔만 기계적으로 저으며 사샤는 아까 칼라일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알렌과 황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알렌은 그녀 앞에서 황녀에 대한 이야기는 편린조차 꺼낸 적 없었다.
…물론 두 사람이 정말 어떤 사이라고 해도 그가 말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날 좋아한다며….
순간 사샤의 손이 삐끗했다. 거품이 반쯤 생긴 달걀흰자는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며 앞치마
와 선반에 잔뜩 묻어 엉망이 되었다.
“으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샤는 허둥지둥 물에 적신 수건으로 여기저기에 묻은 달걀흰자 자국을
닦아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일에 집중하자. 메뉴 구상할 시간도 부족하잖아.
더러워진 수건을 빨아서 잘 올려놓고 난 사샤는 다시 일에 집중하기 위해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것처럼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하지만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알렌과 얼굴도 모르는 황녀가 다
정하게 웃는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 * *
“1황녀 전하는 뵌 적이 있죠. 제가 데뷔탕트를 하던 해에 참석하셨거든요.”
나넬이 고개를 끄덕이자 곱게 땋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얼마나 아름다우시던지 그날 데뷔탕트를 한 레이디들 보다 훨씬 더 주인공 같았어요.”
“그렇구나.”
사샤는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준비한 다과를 먹기 편하게 나넬 쪽으로 조금 밀어주었다.
“다들 질투는커녕 남녀 할 것 없이 황녀 전하의 미모에 홀려서 바라볼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그랬고요, 나넬은 그때를 생각하는 듯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나 전하가 알렌 님과 친분이 있는 건 전혀 몰랐네요.”
첫 만남에서 알렌의 정혼자를 자칭했던 나넬이지만, 알면 알수록 이 아이는 알렌의 개인적인
정보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런데 황녀 전하는 갑자기 왜요?”
나넬은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이며 사샤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 같이 신난 표정을 짓는 나넬의 오해를 막기 위해 사샤는 한
손을 들면서 강력하게 부정했다.
“왠지 며칠 전에 헤른 남작령에 갈 때부터 알렌 님과 언니 사이에 분위기가 묘하다 했더니
.”
“진짜 아니라니까….”
“네네, 언니가 아니라면 아닌 거죠.”
사샤가 살짝 눈을 흘기자 나넬은 그때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접고 테이블 위에 있는 쿠키를
집었다.
“언니 이거 너무 맛있어요. 머랭을 구운 거예요?”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네요, 눈앞에 있는 쿠키를 행복한 표정으로 전부 먹어 보던 나넬
의 얼굴에 갑자기 아쉬운 빛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오늘은 소후작님도, 알렌 님도 안 계시니까 뭔가 쓸쓸하네요.”
“….”
사샤는 그에 별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 나넬이 느낀 감정을 실감하고 있었다.
요즘 네 명이 함께 있으면 즐거웠고, 평소보다 많이 웃을 수 있었다. 그만큼 두 사람의 부
재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너무 익숙해져서 무서울 정도야.’
어릴 적부터 혼자였던 시간이 길어서 옆에 있는 사람의 빈자리를 실감해본 적이 없었다.
리타는 바빴지만 늦게라도 꼭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녀가 없는 시간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자리는 완전히 비어버렸고, 사샤의 가슴에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뻥 뚫
렸다.
세상에 덜렁 혼자만 남은 사샤의 옆에 수다스럽고 귀여운 나넬이 생겼다. 시어도어와 안나가
있다.
그리고…….
자꾸 알렌이 그녀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의지하는 건 두렵다.
사샤가 정말로 사랑하고, 그래서 빈자리를 자각했을 때 정신이 나갈 것처럼 괴로웠던 사람은
마르가리타 한 사람만으로 충분했다.
친구들도 너무나 고맙고 좋은 사람들이지만 리타에게 그랬듯 완전히 의지하는 건 너무 두려
웠다.
이만한 구멍이 또 생기면, 난 정말 버틸 수 없을 거야.
이들만으로도 무서운데, 알렌마저 무섭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는 더욱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도.
“빨리 가게가 완성됐으면 좋겠어.”
사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끝나기 전에 로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알렌 님이 오셨나 봐요.”
자리에서 일어난 나넬이 주름진 드레스를 정리하고 있을 때, 로비에 있던 사용인이 응접실로
들어와 소공작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안녕하세요, 알렌 님.”
“랑앤첸 영애가 와있었군.”
“잘 다녀오셨어요.”
며칠 만에 보는 알렌은 평상시에 입던 짙은 색 정장이 아닌 화려한 흰색 제복을 차려입고 있
었다.
공작저로 돌아오기 전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드리고 바로 돌아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알렌의 제복 어깨 위에 빛나는 견장과 가슴 위에서 빛나고 있는 무거울 만큼 많은 훈장들이
에른스트의 권위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알렌 역시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생각지 못하게 자신을 맞이해주는 두 사람의 모습이 반가
웠다.
사샤가 응접실에서 나오는 모습에 며칠간 조용하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도록 의례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응, 별일 없었지?”
“…네.”
“다행이네.”
알렌은 사샤의 대답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나넬에게 말을 걸었다.
“편하게 쉬다 가요, 랑앤첸 영애. 그럼 난 이만.”
알렌은 목까지 단단하게 잠겨 있던 단추를 하나씩 풀어 가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사샤와 나넬은 멍하니 알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평소와 다른 것 같아요.”
“….”
그렇다고 알렌이 화가 나거나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저 이전에는 없던 벽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황성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
확실히 헤른 남작령에 갔던 둘째 날부터 알렌의 태도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그때 황성에 온
소식을 들은 거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혹시 황녀 전하와의 티타임….’
의도치 않게 그의 하찮은 모습을 많이 봐서 그렇지, 알렌은 얼마 뒤에 서 제국의 가장 젊은
공작이 될 남자이다.
신분도 재력도 능력까지도. 어디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겠지.
아직 미혼인 1황녀와 결혼한다면 황실은 에른스트라는 엄청난 우군과 혈연이라는 맹약을 맺
으며 더욱더 긴밀한 관계가 될 것이다.
“언니에게 뭔가 서운한 게 있던 건 아닐까요?”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나넬은 고민에 빠져있는 사샤를 곁눈질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잘 모르겠어.”
알 수 없었다. 그의 마음도, 사샤 자신의 마음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