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42화 (42/101)

42.

“그나저나.”

칼라일의 목소리가 사샤의 생각에 온 정신을 쏟고 있던 알렌을 깨웠다.

“여행에서 새콤달콤한 일은 없으셨나 보군요.”

칼라일은 능청스럽게 말하며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새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앞으로 그녀를 만나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 종일 괴로웠던 귀로였는데.

알렌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지는 것을 눈치챈 칼라일은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황성에 가실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그래, 벌써 내일이지.”

알렌은 한숨을 흘리며 위스키 잔을 한 바퀴 흔들었다.

황금빛 위스키는 유리잔 속에서 보기 좋게 흔들리며 작은 파도를 만들어 냈다.

“왠지 이번 입궁은 유독 내켜 하시지 않는군요.”

“좋고 말고가 어딨어.”

정곡을 찔렸지만 알렌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칼라일은 그가 며칠 전에 황녀에게서 온 편지를 받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사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황녀 전하와의 티타임을 걱정하시는 거 아닙니까.”

“….”

역시 칼라일에게는 뭐든 숨기는 것이 불가능했다.

알렌의 충직한 친우는 그의 안색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귀신같이 맞추곤 했으니까.

“더 이상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녀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   너는 내 죽은 여동생의 아이이다.

알렌이 처음으로 황성에 입궁했을 때, 황제가 그의 어깨를 잡고 귓가에 속삭인 말이었다.

아홉 살이던 알렌은 왜 황성에 초대됐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설레했다.

그리고 황제를 알현하고 나서야 그동안 알렌 자신을 감싸고 있던 여러 가지 의문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와 전혀 닮지 않은 것, 어머니께서 조금도 사랑해주지 않았던 이유 같은 것들.

에른스트 공작가의 어린 후계자는 그날 황실의 사생아가 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많은

것을 포기했다.

조금 더 잘하면 어머니께서 기뻐해 주실 거야, 하나 더 배우면 아버지가 좋아하실 거야.

이 모든 노력이 헛된 것이었다.

공작 부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가문을 지켜내는 의무뿐이었다

.

그다음 해 공작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알렌은 울 수조차 없었다.

친아들이 아닌 자신에겐 공작 부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 자격이 없으니까.

그날부터 알렌은 사랑받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의 마음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높은

벽을 견고하게 세웠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사랑할 자격이 그에겐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래서 그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여인들의 구애에 조금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밀레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황녀는 그동안 알렌의 앞에서 단 한 번도 그녀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알

렌은 밀레나의 열띤 눈빛을 이미 읽어낸 지 오래였다.

그녀의 연심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모래성같이 허무한 것이다.

두 사람이 혈연관계가 아니었다고 해도 알렌의 마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황녀에게 한 줌의 기대도 주지 않으면 언젠가 포기할 거라고, 적당히 생각했다.

그래서 황녀의 티타임 초대에도 여러 핑계를 대며 거절하고, 정 어쩔 수 없을 때만 승낙했던

거였는데.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누군가의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분명히 말해야만 전달되는 때도

있었다.

내 감정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감정도 소중하니까.

사샤를 처음 만났을 때 그토록 눈이 부셨던 건 그동안 그가 아주 오랜 시간 눈을 감고 살아

왔기 때문이었을까.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사람이 한순간 그의 망막에 모든 색을 각인한 듯

강렬했다.

도대체 왜 그녀만 특별하고, 그녀만 이렇게 달라야 했는지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어서 언젠

가부터 알렌은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이 사샤를 붙잡을 수 있거나 붙잡아야만 하는 의무가 될 수는 없었다.

밀레나가 아무리 애절하게 자신을 원해도 그녀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것처럼.

* * *

알렌은 유리온실 한가운데에 정성스럽게 차려진 티 테이블에 앉아 황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온실 유리 벽 옆에는 남쪽 지역과 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희귀한 식물들이 환한 햇빛

을 듬뿍 받고 있었다.

이 온실은 여러 명의 장인이 오랜 시간에 걸쳐 공들여 만들어낸 서 제국 황실의 자랑으로,

그런 만큼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알렌은 눈이 부시도록 밝게 빛나는 풍경과 상반되는 짙은 색감의 스리피스 정장 차림에 모자

를 쓴 채, 화려한 온실의 어떤 풍경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밀레나가 시녀를 대동하고 들어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밀레나가 입은 드레스는 맑고 투명한 흰색의 비단으로 만들어져 부드럽게 온몸을 감싸 마치

한 마리의 나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목에 걸린 금빛 목걸이는 상등품의 다이아가 박혀 가느다랗게 여러 겹으로 쇄골을 감

싸며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밀레나는 항상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특히 매혹적인 여신 같은 자태를 뽐냈다.

“에른스트 소공작.”

나른하면서도 노래하는 것 같이 매력적인 목소리를 내며 밀레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황녀의 기분은 오랜만에 아주 고조되어 있었다.

밀레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술집 작부의 딸이 에른스트에서 확실하게 쫓겨난다는 소식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렌이 드물게 그녀의 티타임 초대에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공을 들여 단장하고 그를 만날 준비를 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알렌은 그녀의 눈부신 미모에도 조금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며 절제된 동작으로 황녀에게 인

사를 했다.

“공사가 다망했죠.”

밀레나가 알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뒤에 서 있던 시녀가 옆으로 와서 그녀의 드레스를

정리해주었다,

“마음은 좀 추슬렀나요.”

자리에 앉은 밀레나는 그에게 먼저 레오폴드 공작에 대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네, 괜찮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그 이후로 기운이 없으셔요. 아바마마를 뵙고 왔나요.”

“오늘 저녁에 인사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아바마마는 당신을 아끼니까 위로가 되어 드리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전하.”

이후로는 두 사람의 티타임이 늘 그래 왔듯이, 황녀가 알렌에게 안부를 물으면 알렌의 짤막

한 대답이 이어졌다.

“곧 서임식이군요.”

“그렇습니다.”

“에른스트 공작이라….”

자애로운 미소를 띤 밀레나는 감회에 젖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대가 벌써 공작이 된다니 기분이 묘하네요.”

“….”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어렸던 소년이 어느새 에른스트 공작가의 가주가 되다니.

밀레나는 살짝 올린 입꼬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흡족한 시선으로 알렌을 샅샅이 훑었다.

머리색보다 짙은 눈썹 아래 긴 속눈썹. 곧고 가파른 콧대, 굳게 다물려 있어도 여인들을 설

레게 하는 금욕적인 입술.

그녀가 갖고 싶은 유일한 사람은 이렇게 한숨 나오도록 아름다웠다.

더 이상 그를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다.

방해되는 계집도 곧 그의 앞에서 사라진다.

알렌이 여전히 그 여자에 대한 호의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해도, 얼마 안 가 끝날 인연이다.

밀레나는 그에게 오랜 시간 품어온 마음을 지금 슬쩍 드러내 보이기로 했다.

그 여자에게 잠깐 끌린 건 내 마음을 알지 못해서였던 거죠, 알렌? 당신에게 진짜 어울리는

사람이 누군지. 알려줄 테니까.

밀레나는 붉은 입술을 벌려 유혹하듯 그를 불러낸 진짜 목적을 꺼냈다.

“…에른스트 공작가와 황실은 오랜 시간 긴밀한 관계였죠.”

에른스트 공작가는 선선대 황제의 외척이었던 가문으로, 동 제국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공을

세워 공작위를 받은 이후로 줄곧 황제의 가장 든든한 검이자 방패가 되었다.

하지만 황실과 더 이상 인척으로 묶일 수는 없었는데, 에른스트의 공작들이 전부 간신히 후

계만 유지할 정도로 손이 귀했기 때문이다.

알렌은 밀레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가라앉은 눈매에서는 어떤 생각도 읽히지 않았다.

“이제 혈연은 희미해지고 지연으로만 이어져 있는데, 황제 폐하와 에른스트 공작만큼 돈독한

관계가 계속 유지되려면 새로운 인연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밀레나가 빙긋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게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녀로서는 처음 드러내는 대단히 적극적인 애정 공세였다.

황녀는 오랜 시간 동안 끈질기게 알렌에게 구애받기를 기다렸다.

그것이 가능하고, 어렵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알렌과 가까운 여인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고, 그가 어릴 적부터 교류해 온 사람은 밀

레나 자신이 유일했다.

그가 혼인 적령기가 되어 결혼을 염두에 둘 때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를 사람이 밀레나

자신일 것에도 하등 의심이 없었다.

제국의 1황녀라는 신분이 그동안은 깊은 교제를 하는 데에 벽이었을지 모르나, 결혼에 있어

서는 공작가의 부인으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으며 오히려 얼마나 좋은 신붓감인지 깨달으리라

믿었다.

그 후에 감정이 시작되어도 좋았다. 부부가 되어 함께 살을 맞대고 살 때부터 애정이 생겨도

괜찮았다.

언제가 되어도 그를 가질 수만 있다면.

알렌이 바로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밀레나가 진짜 기대하는 것은 그동안 그에게 스며들어왔던 시간의 무게였다.

-     황녀 전하께서 나를…?

이런 생각이 촉매가 되어 알렌은 밀레나의 호감을 깨닫고, 그녀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알렌을 아끼고 생각해주었던 사람이 바로 밀레나 황녀였던 것을 깨

닫는다.

그러면 알렌은 고귀한 황녀 전하와 제 옆에 붙어 있는 천한 계집의 차이를 몸소 실감하겠지.

알렌 본인에게 진짜로 필요하고,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누군지 아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똑똑한 남성이니까.

‘내 옆에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밀레나는 그런 야심을 숨긴 채 여유로운 시선으로 눈앞의 사냥감을 관찰했다.

“……레오폴드 공작은.”

알렌은 그런 밀레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