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알렌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창문으로 그의 반듯한 콧날이 그대로 비추어 보였다.
“사샤의 행복….”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시어도어의 말에 알렌은 머리
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알렌은 오늘 하루 종일 자신을 피했던 사샤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기분 탓인가 했지만, 그녀는 오늘 명백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
었다.
-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려 해요.
그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알렌도 그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사실 사람의 감정이
란 한순간에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것이 사랑이나 증오 같은 강렬한 감정이라면 더더욱.
공작의 장례식 날 사샤가 그에게 보였던 증오는 무엇보다 생생하고 격렬했으니까.
내가 너에게 느끼는 사랑은 쉽게 접을 수 있는 게 아님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네가 나에게 감추지 않고 드러냈던 적의와 원망은 순식간에 풍화되길 바랐을까.
멍청하고 덧없는 희망이었다.
내가 너무 미워서, 에른스트 공작가를 나가는 것이 그녀의 인생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라면.
…혹시 나를 더 이상 마주치지 않고 자신만의 인생을 사는 것이 사샤의 행복이고 바람이라면.
그녀를 다시는 찾으면 안 되겠지.
알렌은 소파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겼다.
사샤를 다시 볼 수 없다 해도 그의 일상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곧장 집무실에서 아침 업무를 본다.
오전 내내 몰두하던 일이 끝나면 연무장으로 가서 기사단과 함께 훈련을 하겠지.
땀에 젖은 몸을 씻어 내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와 차를 마시며 간단한 요깃거리로 빈속을 채
운 후 공작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
저녁은 손님이 오거나, 그들의 초대를 받고 찾아가기도 하면 지루한 하루가 끝을 향해갈 것
이다.
가끔은 무도회에도 참석해야 하고, 황제께서 부르시면 그를 뵈러 가야 한다.
공작령의 영지에도 사람을 보내기만 할 수는 없으니 분기별로 방문해 줘야 하고.
그리고…….
“정말 별거 없는 인생이구나.”
아주 잠깐 너를 알았을 뿐인데.
스스로도 어이없을 만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니.
이런 기분으로는 도저히 바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알렌은 다시 겉옷을 챙겨 입고 정원으로 향했다.
남작령의 정원은 에른스트에 비하면 반의반도 되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정원사가 정성스레
관리한 태가 났다.
수도에 비해 남쪽에 있어서인지 겨울인데도 식물들도 좀 더 생기 있어 보였다.
알렌은 느릿한 걸음으로 정원을 따라 걸었다. 밤의 정적이 그를 감싸고도는 조용한 분위기였
다. 정원 밖 어딘가에 있는 쏙독새의 구슬픈 울음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알렌?”
그때, 그가 간절히 바랐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사샤.”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고 나온 산책이었건만, 사샤는 그 심란한 마음의 원인을 눈앞에서 맞닥
뜨렸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괜히 산책을 나선 선택은 자충수였다.
사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어떤 말을 하면 그에게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빨리 이 자
리를 뜰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 산책 나오셨나 보네요. 전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럼 이만. 소공작님도 안녕히
주무시고요.”
알렌의 눈을 피하며 폭풍처럼 인사말을 쏟아낸 사샤는 뒤를 돌아 본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
다.
‘…쫓아오려나?’
이렇게 사샤가 그를 피하거나 자리를 뜨려고만 하면, 항상 알렌은 아쉬워하며 그녀를 붙잡았
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응?’
이때쯤이면 그가 잠시 이야기라도 하자며 그녀의 팔을 잡거나 이름을 불러야 할 텐데.
그녀의 팔 옆으로 서늘한 밤공기만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사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을 때는 이미 어디에도 알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그저 어둡고 스산한 정원 사이로 휑한 바람 소리만 들렸다.
“웬일이람.”
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뭔 짓을 한 거냐,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사샤는 뺨을
긁적였다.
“덕분에 오늘은 편하게 자겠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사샤는 멋쩍은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 *
“너무너무 즐거웠어요!”
마차의 창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나넬이 목소리를 드높였다.
“응, 나도.”
다음 날은 일찍 조식을 먹고 오스만 상선이 들어오는 항구를 구경했다.
과연 커다란 범선이 여러 척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항구였다.
기억 속에는 익숙한 바다였지만, ‘사샤’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을 들이마시며 사샤는 자연스럽게 리타를 떠올렸다.
리타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휴양지의 바다를 보러 떠나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
아무 일 없었다면 지금쯤 리타는 공작님과 행복한 신혼여행을 자랑하는 편지를 매일 같이 보
냈겠지.
나는 엄마의 편지를 읽으며 빨리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에른스트의 객식구 생활을 하고
있었을 테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정말 많은 것들이.
“……언니!”
“으, 응?”
나넬이 몇 번이나 불러도 딴생각에 잠겨 있던 사샤의 귀에 닿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왜, 나넬?”
“그게 아니라, 혹시 언니….”
나넬은 사샤의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를 꺼냈다.
“소공작님이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니?”
“어제부터 두 분이서 대화도 별로 없고, 원래 알렌 님은 언니만 보고 계시는데 오늘은 서로
눈도 잘 마주치지 않는 것 같아서 이상해서요.”
언제 관찰했는지 나넬은 조식 때부터 달라진 두 사람의 분위기를 조심스레 언급했다.
사샤도 알고 있었다.
오늘 알렌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아예 그녀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필요할 때는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말을
걸었지만, 그마저도 단조롭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갑자기 그러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뭐, 내가 그분 마음을 어떻게 알겠니.”
사샤는 무심하게 창문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런데 언니도….”
“응?”
“아, 아니에요.”
나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싱겁기는, 사샤는 보일락 말락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언니도 기운이 없어 보여서요.’
나넬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아 하려던 말을 삼켜버리고 사샤를 따라 마차 바깥의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른스트 공작가로 돌아온 후, 짐만 내려놓은 채 다시 가게가 열릴 자리에 다녀오는 바쁜 하
루가 간신히 마무리되고 어느새 깊은 밤이었다.
사샤는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 침대에 쓰러져 무거운 눈꺼풀과 전투를 벌였다.
‘아직 자면 안 되는데….’
메뉴 선정도 다 하지 못했고, 오늘부터 새벽에 공작가의 부엌에서 제과 제빵 연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1박 2일 동안 쌓인 여독과 피로로 사샤의 팔다리는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자면 안….’
잠의 마수가 사샤를 무겁게 누르며 어두운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 * *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여행은 무슨, 그냥 일이었지.”
알렌과 칼라일은 오랜만에 소공작 집무실의 소파에서 알렌이 북부 공작령에 갔을 때 사 온
위스키를 함께 마시고 있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자주 가질 수 있었던 친우로서의 시간이 점점 어려워지는 요즘이었다.
보좌관으로서의 칼라일도 손발이 잘 맞는 소중한 파트너였지만, 그보다 시답잖은 농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친우인 그가 그리웠다.
“알렉산드라 아가씨는 남작령을 마음에 들어 하시던가요?”
“그러지 않을까.”
사샤는 여행 내내 긴장되고 얼떨떨해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짧은 순간에도 영지민을 위해 도
움이 되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녀에게 헤른 남작령을 넘긴 건 잘한 것 같아.”
“다행이네요. 당신께서 애정을 갖고 계시던 곳이지 않습니까.”
사실 알렌은 사샤에게 거짓말한 것이 하나 있었다.
헤른 남작령은 레오폴드 공작이 모녀에게 양도한 게 아니었다.
물론 공작은 두 사람을 위해서 적지 않은 재산과 영지를 상속할 생각은 틀림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차 사고는 정말로 불의에 일어난 일이었고, 공작은 두 모녀를 위한 유언장이나 재
산 분할을 고려할 틈도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헤른 남작령을 사샤에게 양도하는 결정은 온전히 알렌의 판단이었고, 레오폴드 공작의 이름
을 빌린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둘러대지 않으면 사샤가 받지 않겠다고 할 것이 뻔했으니까.
“맘에 들어 할 거라고 생각해.”
“그렇죠. 좋은 곳이니까요. 조용하고 사람들도 순박해서 범죄도 거의 없고, 로베르트 씨도
친절하고.”
“응….”
“로베르트 씨는 잘 지내시던가요. 관절이 아프다고 하던데.”
“요즘도 편지를 주고받나 보군. 나에겐 별말 없었는데 워낙 나이가 많으니, 관절에 좋은 약
을 좀 보내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렌이 헤른 남작을 축출해낼 때 가장 큰 도움이 된 사람이 칼라일이었다.
칼라일은 알렌이 모아온 증거를 정리하고, 증인과 증언을 한데 모아 트집 잡힐 거리가 전혀
없는 완벽한 고소장을 만들어 냈다.
그가 없었으면 복잡해지거나 길어졌을지 모르는 재판을 깔끔하게 끝내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오스만 무역선이 들어오는 항구도 다녀오셨겠군요.”
“응, 사샤가 찾는 커피도 문의해놓았지.”
“커피라……. 실제로 있더군요.”
“그러게 말이야.”
워낙 오스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지만, 커피는 이미 오스만에서 홍차보다 사랑받는 음료
였다.
이렇게 유명하면 한 번쯤 동서 제국에도 들어올 법했는데.
이상한 마음에 칼라일이 조사해보니 실제로 커피는 오스만과 공식적으로 무역을 시작했을 때
, 상인들에 의해 들어왔던 적이 있었다.
다만 이미 홍차 문화가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있는 제국민들에게 커피는 홍차와 다른 낯선
맛인 데다 만들기 불편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뒷이야기였다.
“그런 걸 알렉산드라 아가씨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신기하군요.”
오스만에 대해서는 서 제국민 어떤 사람보다 박식하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다.
그들도 잘 모르던 오스만의 커피를 사샤가 알고 있다니.
“저번에 게이트도 그렇고, 평범한 사람들과 어딘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면 저의
과한 생각일까요.”
알렌은 칼라일의 의견에 말없이 동의했다.
장례식 날, 사샤는 알렌에게 칼을 겨눈 채 벌벌 떨면서 말했다.
- 이번에는…. 내가 널 죽일 거야.
- 어떻게 매번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날 죽였지?
그때는 그녀가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쏟아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분명히 이상한 점이 있다.
왜 사샤는 ‘이번에는’ 내가 널 죽인다고, 그가 ‘매번’ 자신을 죽였다고 얘기한 거지?
그녀는 그날 분노로 격앙되어 있었지만, 굳은 얼굴과 떨리는 입 끝, 찡그린 미간은 자신을
향한 적의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커다란 비밀이 사샤를 감싸고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