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샤와 알렌만이 그를 따라 올라가자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숲이 보였다.
“저기 보이는 숲에 나무들은 무슨 나무인가요? 다 한 종류의 나무로 보여서요.”
사샤는 마차를 타고 오며 유심히 보았던 나뭇잎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앙상한 겨울 나무숲을
가리켰다.
“아주 예전부터 이 숲에서 자라던 나무입니다. 생명력이 강하고 잘 자라더군요.”
“어떤 과일이 열리나요?”
사샤의 질문에 집사는 끄응, 신음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겼다.
“그게 말이죠, 저렇게 많은 나무에서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는데 영 상품성이 없어서. 마을
여인들이 말려 놓은 게 있을 텐데 보시겠어요?”
여인에게 받은 말린 과일은 오렌지와 비슷한 종류로 청색 껍질에 레몬 같은 과육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 향은 시큼하고 쌉쌀했다.
사샤는 말린 과일을 입에 넣어보았다.
천천히 과일의 맛을 음미하던 사샤의 눈이 커다래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맛이 특이하네요.”
“말려서 시장에 팔아 볼까 했는데 여기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요즘은 그냥 나
무를 겨울에 베어서 장작으로 쓴답니다.”
수다스러운 마을 여인이 덧붙여 설명했다.
“과일은 그루 당 얼마나 열려요?”
“말도 못 하죠, 어느 나무고 할 것 없이 주렁주렁 열리는데 저걸 못 써서 아쉽답니다.”
“흠….”
“뭐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어?”
나넬과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있던 시어도어가 끼어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확실히 그냥 먹을 만하진 않아서 다르게 써볼까 하고요.”
“어떻게?”
“설탕에 절여서 청으로 만들려고요. 청으로 차를 만들거나 아니면 아예 말린 과일을 차에 넣
으면 풍미가 생길 것 같아요. 아주 얇게 저며서 초콜릿에 박아서 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과일이 쓸모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 사샤는 신나서 말을 이었다.
“오렌지나 레몬이랑은 다른 풍미가 있어서,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어
쨌든 중요한 건 유통인데, 그쪽은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샤는 시어도어와 알렌 쪽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인이나 여성들에게 소소한 부업거리가 될 것 같아요. 힘든 일이 아니니까.”
조금 전에 스쳐 지나가는 듯이 했던 마을 여인의 말을 듣고 계속 고민했던 거구나, 알렌의
눈동자에 경탄의 빛이 감돌았다.
“확실히 괜찮을 것 같아요, 언니.”
“과일청으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상단에 제의해 보면 좋겠어요.”
“내가 알고 있는 상단이 있어, 소개해 줄게.”
시어도어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알렌이 불쑥 끼어들어 먼저 선점했다.
“우선 해보고요.”
사샤는 방금 과일을 먹으면서 엄청난 기시감을 느꼈다.
‘나 이 맛을 알고 있어.’
이미 지금의 몸에 있기 전에 먹어 봤던 맛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커피도, 지금 이 과일도. 여기 사람들이 즐기지 않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 하
지만 내가 가치 있게 만들어 보겠어.
지금은 나처럼 쓸모없고, 외면받지만.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어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야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 * *
“주무시기 전에 다 같이 카드놀이 어떠세요?”
하루 일과의 마지막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넬이 집사에게 받아온 카드를 모두에게 보여주
며 호기롭게 외쳤다.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 심심한데 해보자.”
“게임에 내가 빠질 수 없지.”
사샤가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며 나넬의 옆에 붙여 앉고, 시어도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참전을
선언했다.
“……알겠어.”
사샤까지 하겠다고 하니 분위기를 깰 수 없었다.
알렌 역시 떨떠름한 얼굴로 승낙했다.
집사는 알렌이 유희를 즐긴다는 얘기에 반색하며 지역에서 나오는 전통 와인, 치즈를 가져다
주었다.
네 사람은 둥근 테이블에 모여 앉아 카드를 집었다.
모두 함께 게임을 한다는 사실에 들떴는지 나넬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카드를 섞었다.
사샤는 오랜만에 하는 카드 게임이 익숙지 않아 나넬에게 귓속말로 속삭이며 룰을 물었다.
시어도어와 알렌은 진지한 얼굴로 카드가 나뉘는 테이블에 시선을 향했다.
원래 시어도어는 승부에 집착하는 성향인데다 아카데미에서 늘 알렌에게 밀렸던 기억을 게임
에서라도 만회하고 싶었다.
알렌 역시 사샤의 앞에서 시어도어에게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각자 다른 생각을 품은 채로 카드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넬이 제시한 게임은 손에 가진 카드를 전부 버리면 이기는, 운과 약간의 수 싸움이 필요한
게임이었다.
시어도어가 가볍게 첫 번째 게임을 이기자, 그때부터 알렌은 눈에 불을 켜고 게임에 집중했
다.
이번에는 알렌이 쉽게 두 번째, 세 번째 게임의 승리를 가져갔다.
“후아암, 졸리다….”
몇 번 게임이 오가면서 시어도어와 알렌의 대결이라는 일방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자, 흥미
를 잃은 사샤는 와인 잔을 입을 대며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이탈했다.
“머리를 쓰니까 배가 고파졌어요.”
사샤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자 나넬도 몸을 들썩였다.
“먹을 것 좀 부탁하러 갈까?”
“네, 간단하게 간식이라도 먹어요.”
나넬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테이블 위에는 시어도어와 알렌만이 남았다.
“종목을 바꿔볼까.”
정확히 절반씩 승리를 가져갔을 때, 알렌이 입을 열었다.
“좋지. 포커는 어때.”
시어도어의 제안에 알렌이 눈빛으로 응수하자,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카드를 섞기 시작했
다.
다시 승부욕이 발동한 시어도어가 카드 게임에 몰입해 있을 때, 알렌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
을 열었다.
“사샤를 어떻게 생각하지?”
시어도어는 고개를 들었다.
알렌은 어느새 카드를 테이블 위에 뒤집어 두고 그에게 시선을 향한 채였다.
사샤는 알렌에게 시어도어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저 남자가 가면무도회에서 사샤에게 접근하고, 슈베린 호수까지 나타난 게 그저 나와 친분을
쌓고 싶어서였다는 말을 완전히 믿기 힘들었다.
왜 굳이 그런 공을 들여가면서?
에른스트 공작가와의 친분이 필요한 건가도 생각해봤지만 가문 대 가문의 문제라면 거추장스
러운 계획 없이 가주 간의 대면을 청하면 되는 문제이다.
프레데릭가와 에른스트가는 지금까지 별다른 교류가 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대적일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알렌에게 시어도어 프레데릭이라는 남자는 경계의 대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
시어도어는 손에 카드를 쥔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나서 한숨 쉬듯 입을 천천히 떼었다.
“나는.”
시어도어가 입을 열자, 알렌의 푸른 눈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시어도어는 숨을 한 번 삼킨 뒤 말을 이었다.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
“…그런가.”
알렌은 예상치 못한 그의 대답에 조금 눈이 커지고 나서는 이내 흡족한 듯 미소를 흘렸다.
시어도어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알렌의 진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네가 마음에 둔 여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했을 때에야.
시어도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샤에게는 인간적인 호감만 있을 뿐이야. 좋은 아가씨니까.”
“그렇지.”
알렌은 그의 말에 매우 기꺼운 얼굴로 긍정했다. 시어도어가 사샤에게 마음이 없다는 사실이
퍽 만족스러운지 알렌의 목소리가 한껏 부드러워졌다.
“그나저나 날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널 걱정해야 하는 거 아냐?”
시어도어의 말에 알렌의 눈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가늘어졌다.
“무슨 뜻이지?”
“그녀가 널 딱히 의식하는 것 같진 않던데.”
“….”
허를 찔린 표정을 지으며 알렌은 테이블에 내려놓은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네가 상관할 바는 아냐.”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알렌의 목소리는 성마르게 초조해 있었다.
“솔직히 사샤는 너보다 날 더 편해하는 것 같아 보이던걸.”
이미 알렌을 약 올릴 생각이 만연한 시어도어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
“뭔 짓을 했기에 그녀가 네게 그렇게 경계하는 거야.”
그의 말에 알렌은 미간을 짚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그 여인과 잘 되어 가고 있나.”
알렌은 시어도어가 방금 말한 그가 마음에 두었다는 여인에 대해 물었다.
“나도 잘되진 않아.”
“어째서?”
당연히 연인이겠거니, 생각했던 알렌의 눈이 시어도어를 훑었다.
하긴 연인이 있었으면 이렇게 사샤와 가는 여행을 굳이 따라와서 방해하는 할 일 없는 짓을
하진 않았겠지.
저 남자에게도 나름의 사연이 있어 보였다.
“쉽지 않은 사정이 있어서.”
“…그런가.”
신분이 다르거나, 집안끼리 결혼할 수 없는 상황이라든지. 귀족의 연애가 잘되지 않는 이유
는 얼마든지 있다.
처음에 알렌 역시 사샤와의 관계에서 가장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했기에 어느 정도 시어도어
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시어도어 역시 알렌처럼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뒤집어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내가 그 사람과 잘되길 바라지 않아.”
“….”
“그저 그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걸 지켜보고 싶다.”
“그녀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건 내가 아니거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람의 모습도 보
기 좋아.”
그 모습조차 은애하고 있다.
“대단하군.”
단호하게 말하는 시어도어를 보며 알렌은 처음으로 눈앞의 남자에게 경탄했다.
사샤가 행복한 모습….
생각해보면 항상 그의 감정은 사샤를 원하고 옆에 두고 싶어 하는데 그쳤던 게 아닐까.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할 길을 고민해본 적이 있었나?
“너에게 중요한 사실을 배웠어. 고맙다, 프레데릭.”
“뭘.”
시어도어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도 알렌의 머릿속에는 사샤만이 가득 차 있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가슴을 때리는 둔탁한 통증을 느끼며 시어도어는 턱을 괸 채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름.”
“응?”
“아, 아니야. 아무것도.”
시어도어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넘겼다.
- 이름을 불러주지 않겠어?
알렌이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주고, 자신도 그를 알렌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알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샤나,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랑앤첸 백작 영애가 남몰래 부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불러버리면 그 이상 욕심이 날 것 같아서, 알렌이 행복한 모습을 그저 지켜보
려는 자신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웠다.
시어도어는 하고 싶던 말을 와인과 함께 전부 들이켰다.
“슬슬 잘까.”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어도어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먼저 들어가지, 잘 자.”
시어도어는 그가 일어나 버린 빈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조금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내가 이겼는데 소원을 빌 순 없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