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그런데 넌 왜 함께 온 거지.”
에른스트 공작가의 마차는 확실히 덜컹거림이 적었다.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 조용한 마차 안에는 불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알렌은 마차의 창가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눈앞의 상대를 마뜩잖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샤의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그녀가 증여받게 되는 영지가 어떤 곳인지 알 필요가 있지.”
시어도어는 자신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기더니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비즈니스 파트너….”
알렌은 고개를 한층 삐딱하게 숙였다.
대체 언제부터 너랑 사샤가 비즈니스 파트너였으며, 두 사람이 무슨 사업을 함께 하려는 생
각인지, 그리고 왜 나는 그런 걸 듣지 못한 건지.
같은 의문이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우선 알렌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시어도어에게 던졌다.
“그런데 왜 내가 너랑 같은 마차를 타고 있는 거지.”
“사샤랑 랑앤첸 꼬마 아가씨가 먼저 내 마차를 타고 출발했으니까.”
“….”
“….”
알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계획했던 일과 너무 달라졌다.
사샤를 데리고 영지에 가서 앞으로 사샤의 것이 될 마을을 소개해주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
려고 했는데.
뭐, 좋다.
사샤가 자신과 둘만 가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랑앤첸 백작 영애와 함께 가는 것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랑앤첸 백작 영애는 조금 많이 수다스러워서 시끄러울 때도 있지만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도
없고, 무엇보다 사샤와 가장 친한 사이이다.
이번 여행으로 그녀에게 점수를 따놓는다면 사샤의 옆에서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해주는 것
도 기대할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이 남자, 시어도어 프레데릭은 계산 밖이다. 왜 이 멀리까지 굳이 따라오겠다는 거야
.
……여하튼 어떻게 백번 천번 관대한 마음으로 시어도어 프레데릭의 동행까지는 용인해줬다고
해도.
대체, 어째서, 왜. 이 남자와 마주 보면서 마차를 타고 가야 하냐고.
물론 시어도어가 사샤와 단둘이 타고 가거나, 자신을 빼놓고 저 세 사람이 한 마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야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샤와 둘이서 갈 생각에 부풀어 있던 기대가 깨진 알렌의 얼굴에서 불쾌한 빛이 떠
나지 않았다.
‘정말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이군.’
시어도어는 이미 알렌이 자신을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띤 모습은 퍽 우습기도 했다.
아카데미에 있을 때의 알렌은 항상 같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가도, 시험에서 1위를 해도, 수석을 놓치지 않고 졸업을 하며 다
시 단상에 올라가는 그 순간에도.
모든 것이 지루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 견디고 있을 뿐이라는 얼굴이었다.
그때의 알렌은 어떤 대단한 화가가 그려낸 평생의 역작인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 같았다면,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는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다양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남자가 되어 있
었다.
이렇게 몹시 맘에 안 든다고 대놓고 표현하거나, 당황하거나, 사샤를 보며 홀린 것처럼 집중
하기도 하고, 밝게 웃는 사샤를 따라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까지.
‘나쁘지 않네.’
피식 웃고 마는 시어도어였다.
* * *
나넬과 한참 수다를 떨던 사샤는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조금씩 초조함을 느꼈다.
사샤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나넬 역시 그녀에게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비슷한 풍경의 끝에 도달하고 택지로 들어섰을 때,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영지의 입구 역할을 하는 작은 숲을 지나니 너른 벌판과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펼쳐졌다.
사샤는 마음이 벅차오르면서도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의구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실감했다.
알렌이 공작이 되고, 사샤가 공작가를 나오면 두 사람의 악연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곳을 상속받게 된다면 에른스트 공작가와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기는커녕 더욱 강해
지게 된다.
계속 이렇게 에른스트와, 알렌과 엮여도 되는 걸까.
사샤는 두 팔에 얼굴을 묻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입니다, 알렌 님!”
영지의 성안으로 들어가서 마차에 내리자, 나이가 지긋한 집사가 달려와 몹시 기쁜 얼굴로
알렌을 반겼다.
“로베르트, 잘 지냈어?”
알렌 역시 옅은 미소를 띠며 집사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 지역은 원래 헤른 남작의 영지였다.
이곳이 헤른 남작의 손아귀에 있었을 때, 마을 사람들과 사용인들은 차라리 지옥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붙여서 영지민들에게 무거운 조세를 수탈하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마을 처녀들은 정기적으로 남작의 성에 끌려갔다.
남작의 기분이 나쁜 날 그에게 두들겨 맞은 사용인들이 밤마다 반송장이 되어 실려 나갔고,
이런 영지의 상황을 알리려던 영주의 부하는 쥐도 새도 없이 실종되었다.
악마 같은 영주 아래에서의 생활은 매일같이 비참하고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끝이 없을 것 같던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모두를 구해준 것이 에른스트의 소공작이었
다.
몇 해 전 알렌이 아카데미 방학 중 남부지역을 순찰했을 때였다.
그는 이 마을을 덮고 있는 비정상적이고 불우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체계적인 조사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는 걸 알게 된 알렌은 이 지옥 같은 남작령
을 뿌리부터 뒤집어엎기로 결심했다.
알렌은 곧바로 남작에 대한 탄원서를 작성하고 증거와 증인을 모아 재판을 열었다.
재판은 알렌의 주도 아래 헤른 남작의 부패와 탈세, 영지민의 수탈 행위 등 추악한 죄를 낱
낱이 까발렸다.
결국 남작은 작위와 영지를 모두 뺏기고 험준한 북부 지역의 광산의 노역형에 처해지는 것으
로 마무리가 되었다.
제국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제국민이 영지에서 귀족에게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은 엄연한 서 제국 황실과 중앙 귀족의 실책이었다.
그나마 알렌이 은밀하고 재빠르게 정보를 수집해서 사건을 해결한 덕분에 그나마 황실로서도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또 스물이 되지 않은 젊은 소공작이 치밀하게 준비하여 공명정대하게 밝혀낸 사실은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그러한 알렌의 공로를 인정하여 헤른 남작의 작위와 영지를 에른스트 공작가에 영구
귀속하기로 했다.
에른스트 공작가에서는 가주의 신임을 받는 충직한 고용인을 보내 영지를 건실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영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기 좋은 곳으로 변했다.
성안의 사용인과 영지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은인이나 다름없는 에른스트 소공작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이런 일도 했었구나.’
사샤는 갑작스럽게 알게 된 의외의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회귀한 이후로 지금까지 사샤의 눈으로 본 에른스트 소공작으로서의 알렌은 사용인들에게 난
폭하게 대하지도 않고, 별다른 추문도 없었다.
본인의 업무에 충실해서 항상 바빠 보였고, 그의 보좌관인 칼라일은 주인에게 끔찍하게 충성
했다.
오늘 처음 만난 로베르트 집사 역시 한시도 알렌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웃음을 만면에 띄우고 있었다.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애틋한 눈빛을 하고.
‘알렌의 악한 모습을 본 사람은 결국 나 하나뿐인 거야…?’
대체 어떤 모습이 진짜 알렌일까.
사샤는 알렌과 그에게 꼭 붙어 있는 집사를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쪽은 이제 영지의 권리와 작위를 상속받을 알렉산드라 양.”
“아, 말씀 주셨던….”
집사의 시선이 사샤를 향하자 그는 사샤에게도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로베르트라고 합니다. 궁금하신 점은 얼마든지 편하게 여쭤봐 주십
시오.”
로베르트가 그녀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자 사샤는 당황해서 두 팔을 저으며 고개를 숙였다
.
“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로베르트는 유능한 사람이야. 그의 말대로 편하게 물어봐도 좋아.”
“아닙니다, 소공작님,”
알렌의 칭찬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더 피어날 수 없을 만큼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이쪽은 친구인 프레데릭 소후작과 랑앤첸 백작 영애.”
“모쪼록 편하게 계시다 가시길 바랍니다.”
집사는 두 사람에게도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소공작님이 날 친구라고 불러주셨어.’
‘우리가 친구….’
나넬과 시어도어는 알렌의 ‘친구’라는 말에 온 정신이 쏠려 집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본관의 사용인들이 로베르트에게 와서 마차에 있는 짐을 모두 각자의 객실에 옮겨 놓았다고
전하자,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렌에게 말했다.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식사는 바로 올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래?”
“난 괜찮아.”
“출발 전에 식사를 하고 왔더니 아직 허기지진 않네요.”
“다들 괜찮다면 시내부터 보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로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는 멀지 않으니 걸어서 가도록 하지. 날씨도 좋으니까. 마부와 말을 쉬게 해줘.”
“네, 알겠습니다. 소공작님.”
영지는 영지민의 수가 많지 않은 곳이라 시내도 아주 작았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어 곳곳마
다 청결하고 기운이 넘쳤다.
“로베르트 님, 안녕하세요.”
마을 사람들은 집사를 알아보자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로베르트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
어 보였다.
“뒤에 계신 분은… 소공작님이시네요!”
“소공작님, 오랜만에 뵈어요!”
“어머, 소공작님이 오셨어?”
마을 여인들이 알렌을 발견하자 기쁜 얼굴을 감추지 않으며 달려와 인사를 했다.
수도에서는 알렌을 알아보는 평민이 적을 뿐 아니라, 설령 그를 알아봐도 눈을 마주치고 인
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 마을 사람들은 알렌은 알아보자마자 수도에 있던 손자가 내려온 것처럼 반가워
하며 살갑게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다.
“겨울인데 생활에 불편함은 없나?”
“그럼요, 조세도 감면해주시고 지원도 해주셔서 아주 잘 지내고 있습지요.”
“그래도 부업거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에구, 소공작님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도 마! 자네 작년에 재산을 그만큼 모았다고 자랑했
으면서.”
“아니, 내가 아니라 이웃집 할멈 말이야.”
마을 여인들은 눈앞에 소공작이 있는 것을 잊은 듯 자기들끼리의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굉장히… 수도랑 분위기가 다르네요.”
“황실이나 귀족의 영향력이 적으니까. 수도가 멀어질수록.”
“영주가 어떤 사람인가가 영지민들에겐 훨씬 중요하죠.”
이런 곳이구나. 사샤는 시끌벅적하고 건강한 기운이 넘치는 이 마을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
조금이라도 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나도.
부업거리. 사샤는 마을 여인들의 수다에서 스치고 지나간 단어를 혼자 되뇌어 보았다.
“저, 집사님.”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알렉산드라 님.”
“영지에 들어오면서 숲을 봤는데요.”
“아, 그곳 말입니까? 여기서도 보입니다. 이쪽 탑으로 올라오시죠.”
로베르트는 흔쾌히 마을의 작은 교회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