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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38화 (38/101)

38.

“황실에서 인편이 왔습니다.”

알렌은 칼라일에게 황실에서만 사용되는 황금색 편지 봉투를 받아들었다.

편지를 봉하고 있는 붉은 인장에는 향제비꽃 문양이 찍혀 있었다.

서 제국에서 이 꽃을 상징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다.

1황녀 밀레나. 그녀가 보낸 편지임이 틀림없었다.

알렌은 책상 위에 올려둔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를 열었다.

편지에는 알렌이 황성에 입궁할 때 티타임을 원한다는 내용이 단정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알렌은 짧게 한숨을 쉬면서 긴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곤란한 내용이라도 있으십니까.”

심상치 않은 알렌의 표정에 칼라일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냐, 황녀께서 티타임을 초대해서.”

“황성 입궁이 다음 주였죠.”

“그래.”

알렌은 휘갈겨 쓰다시피 빠르게 완성한 답장을 칼라일에게 넘겼다.

“시종에게 전해주도록.”

칼라일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편지를 받아 집무실을 나갔다

.

* * *

가게를 만들 자리가 구해지자 다음부터는 모든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시어도어가 소개해준 유명한 업자를 통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사샤의 가게로 개조하는 공사

에 들어갔다.

사샤는 매일 같이 현장에 가서 인부들의 일을 돕거나, 그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가며 하루

를 보냈다.

사샤를 따라가기로 하고 사직서를 제출한 안나는 서임식 전까지 공작가에서 일을 하기로 했

다.

그래서 가게를 만드는 현장에 자주 오지 못하는 걸 굉장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 대신 사샤는 매일 공작가로 돌아오면 그녀에게 오늘 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힘들지는 않아요?”

“제가 뭘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보통 나넬이 와서 놀아주느라 바빠요.”

“후후, 랑앤첸 영애께서 매일 오시나 봐요.”

“그렇죠.”

뼛속까지 귀족 영애인 나넬은 옆에 있어도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래도 나넬이 사샤의 옆에 붙어 하루 종일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그냥 그

녀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힘이 났다.

“언니, 그래서 제가 저번엔 동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티하우스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그게

….”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나넬은 사샤에게 찾아와서 폭풍같이 수다를 늘어놓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지?”

그때 비가 내렸는지 검은색 장우산을 짚고 있는 시어도어가 그녀들 앞에 나타나 인사를 건넸

다.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네?”

“안녕하세요, 소후작님.”

나넬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어도어를 향해 공손하게 드레스 자락을 잡고 인사를 했다.

“랑앤첸 백작 영애, 안녕하셨는지.”

시어도어 역시 그녀에게 정중하게 답례했다.

-   프레데릭 소후작님도 멋있긴 한데 전 역시 알렌사샤 파라서 소공작님 쪽이 더 좋네요!

시어도어를 티하우스에서 만나고 나서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나넬의 대답이었다.

사샤는 나넬이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끔 저 아이는 저렇게 영

문 모를 얘기를 하곤 한다며 가볍게 흘려 넘겼다.

“사샤 네가 부탁한 걸 알아보고 오는 길인데.”

“벌써요?”

“안 그래도 상단에 볼일이 있어서 들르는 길이었거든.”

시어도어는 고민스러운 듯 신음을 뱉었다.

“내가 아는 상단 쪽에서는 동서 제국 통틀어서 오스만과 무역하는 곳은 없는 모양이야.”

“흠…. 그렇군요.”

제국민은 편의상 동, 서 제국으로 부르지만 서 제국은 프랑크, 동 제국은 알비온이라는 각각

의 이름이 있었다.

두 제국은 고대 황제의 아들들이 나눈 조약으로 둘로 나누어져 평화와 반목을 일삼으며 지금

까지 온 것이기에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제국어를 쓰고, 비슷한 문화를 영위해왔고 제국민들의 생김새도 크게 차이가 나

지 않았다.

하지만 오스만은 동서 제국과 전혀 다른 종교와 언어, 문화를 가진 완전한 타국이다.

게다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 동서 제국과 달리, 오스만은 바다를 건너 까마득

히 멀리 위치해 있었다.

선박 기술과 게이트를 통한 이동 마법이 발달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이민족의 나라인

오스만과의 교류는 거의 전무했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에른스….”

“오스만이 왜?”

그들 뒤에서 듣기 좋은 저음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

가 난 방향으로 이목을 집중했다.

구두 소리와 함께 알렌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샤는 알렌을 의식하자마자 바로 하던 일에 집중하는 척하며 눈길을 돌렸다.

알렌은 또 왜 나타났지.

아침에 시내로 나올 때 알렌이 없어서 내심 안심했었는데.

요즘 알렌의 얼굴을 보는 게 이상하게 껄끄러웠다. 예전에는 둘이서 있어도 좀 귀찮고 짜증

날 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얼마 전부터 왠지 모르게 알렌을 보고 있으면 불편하고 도망치

고 싶어졌다.

“에른스트 공작가가 소유하고 있는 상단에서 오스만과 무역을 하고 있단 얘기를 하고 있었어

.”

“그렇지, 오스만에서 찾는 거라도 있나?”

수입하는 물품은 상당히 한정되어 있는데, 알렌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 그게. 오스만에 커피가 있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커피?”

사샤가 가게를 차리려고 준비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것이 커피였다.

동서 제국은 전부 차를 즐기는 문화였고, 커피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디에서도 발

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카페’라는 단어도 이 제국에서는 사샤만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이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신기하게 사샤가 원래 있던 세계와 이곳에서 쓰는 단어들은 대부분 일치했다.

커피가 진짜로 있다면 똑같은 명칭이지 않을까.

기왕이면 여는 가게에 커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찾아보고 있었다.

사샤로 인해 이곳에서 커피가 유행한다면 그걸로 짭짤한 재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와 함께.

“홍차 같은 음료인데, 색은 까만데 쓰면서 약간의 신맛이 나요.”

“알아볼게.”

알렌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직접 가보는 게 낫겠군.”

“네?”

“오스만을요?”

“거긴 배로도 열흘은 걸리는 곳이야. 게이트로 가겠다는 건가?”

시어도어와 나넬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씩 얹었다.

“오스만 말고, 사샤의 영지.”

“제 영지라면….”

“오스만에 가는 배가 들어오는 항구와 가까운 곳이거든. 같이 가보는 게 어때.”

그렇지 않아도 알렌은 사샤에게 조만간 영지를 보여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마침 좋은 기회였다.

“진짜요?! 꺅, 좋아요! 다 같이 여행이라니 너무 설레!!”

“오스만과 무역하는 항구를 직접 봐두는 건 나쁠 게 없지.”

나넬은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뛸 듯이 기뻐하고, 시어도어는 팔짱을 낀 채 끄덕였다.

“아니, 너희에게 한 말은 아니었는데….”

“언제 갈 건데요? 옷은 얼마나 챙겨 가지, 서남쪽이면 날씨는 더 따뜻할 테니 지금 입은 것

보다 더 얇은 드레스 위주로 챙겨 가고….”

“마차 한 대로 가면 비좁을 테니 내가 마차를 따로 가져오도록 하지.”

두 사람은 알렌의 얘기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벌써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니, 꼭 같이 가요. 나넬, 시간 낼 수 있지?”

사샤는 나넬의 손을 잡고 진지한 얼굴로 다짐을 받아낼 기세였다.

둘이서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넷이 가겠어, 시어도어가 바빠서 안 된다면 나넬이라도 꼭 데리고 가는 한이 있어도

둘이서는 가지 않을 거야…!

둘이서 마차만 같이 타도 불편한데 멀리 있는 영지를 둘이서 간다고?

사샤는 고개를 붕붕 크게 저었다.

“언니, 왜 그래요?”

“다 같이 가요! 시어도어 님도, 나넬도. 언제 갈까요?”

무조건, 사샤는 힘주어 강조했다.

* * *

이틀 뒤 에른스트 공작가의 정원은 여행 준비로 떠들썩했다.

사용인들이 나와 여행 짐을 추리고, 마부들은 마차와 말들을 점검하며 안전한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다.

사샤는 일찍 나와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짙은 보랏빛이 나는 드레스는 마담 모슬린이 정성스럽게 제작한 귀한 벨벳 원단

으로 만들어져 빛을 받으면 한층 밝은색으로 반짝였다.

“저 왔어요!”

나넬은 여행을 위한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 상기된 얼굴로 사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넬의 뒤에는 랑앤첸 백작가의 하인이 커다란 트렁크를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겨우 이틀 가는 건데 짐이 좀 많은 거 아냐?”

사샤가 척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트렁크를 보며 땀을 삐질 흘렸다.

“언니랑 첫 여행이라서 너무 무리했나 봐요! 드레스는 여섯 벌, 모자도 다섯 개 정도는 있

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챙기다 보니까….”

“가, 가서 우리가 할 일은 영지를 돌아보는 거랑 성에 머무르는 것밖에 없는데. 더 편한 차

림이 좋지 않을까?”

“그런가요….”

나넬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자 사샤는 그때야 깜짝 놀라 떠듬떠듬 그럴싸한 말을 덧붙였다.

“아, 근데 드레스랑 모자는 다양하면 좋지 뭐! 다 너한테 잘 어울리니까. 시내에서 식당도

갈 거고. 괜찮을 것 같아.”

“헤헤, 그렇겠죠?”

사실 이렇게 말하는 사샤도 나넬만큼 들떠 있었다. 이렇게 여러 명이 함께 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었다.

근교에 피크닉 정도는 가봤어도 마차를 타고 몇 시간이나 걸려서 자고 오는 일은 처음이었다

.

영지를 받는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일보다 친구라고 부르고 싶은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사샤를 더욱 두근거리게 했다.

“소공작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마부가 공손히 손을 모으고 알렌에게 아뢴 곳에는 에른스트가와 시어도어가 준비해온 두 대

의 마차가 서 있었다.

말들은 어느 쪽이고 털빛이 반지르르하게 빛나며 상태가 좋아 보였다.

길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출발할까.”

어느새 나타난 알렌이 끼고 있는 장갑을 다시 한번 매만진 뒤 출발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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