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황녀의 넓은 방에는 두 사람뿐이었지만 에마는 누가 듣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춘 채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공작 서임식에서 열릴 무도회에서 에른스트 소공작은 분명히 그 여인을 파트너로 삼을 거라
고 생각합니다.”
분하지만 그렇겠지.
밀레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적으로 귀족 영애들 앞에서 분노를 산다면, 혹여 그 여자가 잘못되더라도 특정하기 힘
들지 않을까요.”
“그럴듯한 생각이야.”
부끄럽게도 최근 그 계집과 관련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성이 약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 그
녀의 조언은 귀중했다.
밀레나는 제 옆에서 몸과 마음으로 힘써주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에마에게 서랍 안에
있는 보석함을 가져오도록 명하였다.
에마가 보석함을 가져오자 밀레나는 몇 년 전 착용하고 더 이상 쓰지 않는 목걸이를 내밀었
다.
“네 조언은 항상 달게 듣고 있어.”
“아닙니다, 황녀 전하.”
“나의 고마움이니 받게.”
그럼 감사히, 에마는 황송해하며 밀레나에게 목걸이를 받아 들고 소중하게 품었다.
그래, 그를 십 년 전부터 기다렸다.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밀레나의 입에 가벼운 미소가 스몄다.
“다음 주에 에른스트 소공작이 황성에 입궁한다고 합니다.”
“아바마마를 만나러 오나 보군.”
“그때 티타임을 요청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 미리 편지를 써둬야겠어.”
어쨌든 그녀를 내보낸다는 건 알렌의 마음이 돌아섰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여자가 제 발로 공작가를 나간다고 했으니 둘의 사이가 단단히 틀어졌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오해가 풀렸다면 여자가 괜히 에른스트를 나간다고
하지 않았겠지.
“알렌과의 티타임은 오랜만이군.”
“한동안 다망하셨으니까요, 두 분 다.”
“이번 티타임에서는 뭔가가 변했으면 좋겠네.”
밀레나는 자신의 숱 많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만족스레 웃음 지었다.
* * *
모든 첫사랑이 아름답고 순수한 것은 아니다. 뒤틀리고 질척해져 버린 첫사랑도 세상에는 얼
마든 존재한다.
밀레나의 어머니인 황비는 그 무렵 히스테리가 한창 심했다.
사람들 앞에서 아름답고 상냥한 황비라고 칭송받는 모습은 가면을 쓴 가짜 모습이었다.
사실은 황후와 금실이 좋은 황제 사이에서 그의 총애를 독식하지 못하는 질투와, 황위 계승
권과 멀어진 자녀에 대한 열등감이 그녀를 내면부터 갉아 먹고 있었다.
틈만 나면 황비는 밀레나와 남동생에게 트집을 잡으며 학대하기 일쑤였다.
밀레나는 그녀에게 폭언을 들으면서도 아주 가끔 내비치는 애정을 갈구하며 자라났다.
그날은 오랜만에 황비가 아이들을 불러 티타임을 갖던 오후였다.
날씨가 몹시 좋았고, 황비는 드물게 기분이 좋았기에 밀레나와 동생은 과하게 들떠 있었다.
- 누님, 우리 공놀이해요!
두 사람은 신이 나서 공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동생이 던진 공이 황비가 있는 테이블로 순식간에 튀어 올랐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찻주전자가 테이블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 지금 뭐 하는 짓이죠?
황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 어마마마….
- 서 제국의 황녀와 황자씩이나 돼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철이 없나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북해의 얼음보다 차갑고 날카로웠다.
- 죄, 죄송해요.
- 특히, 밀레나.
황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벌벌 떨고 있는 밀레나에게 다가갔다.
- 이 쓸모없는 것.
- 어, 어마마….
- 기껏 낳아 놨더니 품위 없는 짓만 골라서 하고. 정말 너란 아이는….
짜악, 순간 눈앞에 별이 보이고 시야가 땅으로 흩어져 내리고 나서야 얼얼한 고통이 찾아왔
다.
- 어마, 마마, 죄송, 죄송해요.
- 여봐라.
욱신거리는 뺨을 붙잡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사죄하는 밀레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황비는
시종을 불렀다.
- 네, 황비 마마.
- 당장 이 공을 치워버려. 꼴 보기 싫으니까.
- 어마마마, 그. 그건.
아바마마께서 생일 선물로 주셨던 건데….
밀레나는 독살스러운 표정의 황비를 보며 두려움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 하아.
황비는 밀레나를 향해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당장 치워버려.
- 네, 네. 황비 전하!
- 밀레나는 저쪽에서 벽을 보고 서 있어요. 요한은 이리 오고. 다시는 그런 철없는 짓을
하면 안 돼요?
황비는 표정을 다시 온화하게 바꾸며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덜덜 떨고 있는 밀레나의 남동생
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황비는 시종들에게 티 테이블을 정리할 것을 명하고 밀레나만 남긴 채 남동생을 데리
고 황궁으로 돌아가 버렸다.
- 어, 어마마마…….
어마마마, 왜 저만 혼내시는 거예요. 밀레나가 미우세요? 왜 저만 두고 가시나요.
밀레나는 모두가 정리를 하고 난 뒤에도 혼자 벽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아무도 그녀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공을 찾아야 해. 아바마마가 주신 공이야. 아바마마께서 직접 주신 선물이라고.
밀레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티타임이 열렸던 자리를 돌아다니며 공
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디에도 밀레나의 황금 공은 보이지 않았다.
어서, 어서 찾아야 하는데. 내, 공. 잃어버리면 아바마마께서 실망하실 거야, 어마마마께
미움받을 거야….
밀레나가 초조한 몸짓으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 저기….
- ….
- 뭘 찾아요?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음성에 밀레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뒤에는 밀레나보다 두세 살 정도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을
띠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의 미소년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귀한 원단으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는 고급스럽게 장식이 새겨져 있었
다. 차림새로 보아 귀족의 아들이나 타국의 왕족임이 틀림없었다.
- 혹시, 황금색 공을 찾고 있어요?
- 그, 그걸 어떻게….
- 저기 연못 위에 있는 걸 오면서 봤거든요.
남자아이는 황궁 정원 가운데에 있는 작은 연못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 우리 같이 공을 찾으러 가요!
남자아이는 웃으며 그녀에게 따라오라는 듯 앞서갔다. 남자아이가 뛰기 시작하자, 밀레나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주었다.
두 아이가 금방 달려 도착한 연못의 수면 위에는 정말로 황금빛 공이 둥둥 떠 있었다.
- …유모를 불러야겠어.
- 잠깐 기다려요.
밀레나가 말리기도 전에 소년은 연못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다지 깊지 않은 연못이었지만 소년의 허리까지 오는 깊이에 바지가 전부 젖어버렸다.
- 얼른 나와, 물이 더럽단 말이야!
밀레나가 말리는데도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능숙하게 연못 중심으로 헤쳐 들어갔다.
이윽고 소년은 날쌘 손길로 공을 집어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아직 젖지 않은 팔소매로 공을 슥슥 닦고 밀레나에게 내밀었다.
- 여기 있어요.
- 너, 옷이 다 젖었는데….
밀레나는 다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엉망이 된 그의 팔을 닦아 주었다.
소년은 활짝 웃어 보였다.
- 괜찮아요. 아끼던 공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 고마워….
눈물로 젖어 있던 밀레나의 눈이 반달 같이 휘어지며 미소를 지었다.
- 이제 울지 말아요. 그럼 잘 있어요!
밀레나가 고맙다는 인사를 마저 하기도 전에, 소년은 흠뻑 젖은 바지에 묻은 흙을 양손으로
툭툭 털어내고는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혼나겠다고 큰 소리로 혼잣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황궁 쪽을 향해 뛰어갔
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아직도 그날을 너무나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나무 그늘 밑에 쏟아지던 햇빛, 귓가를 살랑
거리던 기분 좋은 봄바람, 물에 젖은 채로 환하게 웃던 소년의 미소.
밀레나는 소년의 정체를 알기 위해 애썼지만, 황녀의 주변 사람 중에서는 소년이 누구인지는
커녕 그런 아이는 본 적 없다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밀레나의 모친인 황비는 신경 쇠약으로 궁 안에 틀어박힌 채 칩거 생활을
이어 나가다 그녀가 성년이 되기 전 먼 지방으로 요양을 떠났다.
소년과의 재회는 훨씬 오랜 뒤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였다.
황실 아카데미의 입학식에는 황족들이 참석해 축하해주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알렌은 입학
생 대표로서 모두의 앞에서 선언을 했다.
그간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밀레나는 단 한 번 만난 소년을 바로 알아볼 수 있
었다.
그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밀레나는 너무 반가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입을 틀어막아도 솟아오르는 환희는 참아낼 수 없었다.
분명히 맞아. 저 은발에 깊은 바다처럼 푸른 눈. 많이 컸지만 그 소년이 확실해,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 잘 지냈어요?
입학식이 끝나고,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더 이상 소년이라 할 수 없을 만큼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남자다워진 알렌은 그녀를 처음 보
는 사람처럼 고개 숙여 인사했다.
-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밀레나는 그때에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알고 싶던 그의 이름을 드디어 알 수 있었다.
알렌 폰 에른스트. 에른스트 공작가의 외동아들이자 후계자.
그가 왜 황궁에 혼자 있었을까?
에른스트의 가주인 레오폴드 공작은 황제의 가장 가까운 친우이기도 했다. 아마 그와 함께
왔던 거겠지.
그를 더욱 알고 싶다. 따뜻한 햇살 아래 웃어주던 그 미소를 한 번 더 보고 싶다.
그 후로 밀레나는 가끔 알렌을 티타임에 불러냈다.
하지만 알렌은 더 이상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살갑고 따뜻한 소년이 아니었다.
형식적인 예의와 의례적인 대답으로 밀레나에게 거리를 두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알렌은 오만하고 차갑기로 사교계에서도 이미 유명했다.
더 이상 그날처럼 웃어주지 않는 알렌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추억은 묻혀 있을 뿐
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날의 소년이 아닌 것은 아니었으니까.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 밀레나만큼 특별하고 소중하지 않더라도 알렌에게도 분
명히 남아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또 밀레나에게는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알렌은 다른 어떤 귀족 영식보다 유달리 황궁 출입이 잦았다.
표면적으로는 마법 사용자이기 때문에 황궁의 마법성과 교류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황제는
그가 입궁할 때마다 번번이 알렌을 불러내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는 했다.
황제가 알렌에게 특이할 정도로 베풀어 주는 사애는 레오폴드 폰 에른스트 공작의 외아들이
기 때문이라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황제가 아끼는 친우이자 신하의 아들을 사위로 두고 싶은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황제께서 밀레나가 알렌과 이렇게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아바마마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성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온 청혼서를 받아들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될 거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서임식까지만.”
그날까지만 꼭 참아주지.
네가 알렌의 눈앞에서 사라지면 그는 자신이 잠시 홀렸던 여자가 얼마나 볼품없었는지 깨달
을 수 있겠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거니까.”
그때까지가 네가 알렌의 옆에서 웃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야, 알렉산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