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항상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흑발의 남자.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놈이 분명했다.
동 제국의 가문이 어쩌고, 자신의 누이가 어쩌고 하며 결투라도 벌일 듯 비장하게 다가오는
모습에 일부러 더 상대해주지 않았었다.
“매번 귀찮게 했던 그 자식이군.”
“맞습니다. 저와는 사담도 꽤 주고받았지요.”
칼라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알렌이 불쌍할 만큼 그를 무시하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칼라일이 시어도어와 더 많은 이야기
를 주고받았다.
칼라일의 기억 속 시어도어는 항상 저돌적인 기세로 알렌에게 말을 걸어왔다.
늘 알렌에게 처참하게 무시당하기 일쑤였지만.
시어도어 프레데릭은 자신의 주인에게 어마어마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누이가 황태자비라고 하셨나.”
“그렇습니다.”
프레데릭가는 첫째 딸을 서 제국 황태자에게 시집보낼 정도로 동 제국에서 대단한 위세를 떨
치는 가문이었고, 시어도어는 그 명문가의 후계자이다.
알렌에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귀찮게 달라붙어서 간과했던 사실이지만, 다른 이가 보면 집
안도 신분도 빠질 게 없는 남자였다.
“알렉산드라 아가씨와 상당히 친밀해 보였다더군요,”
칼라일은 사용인에게 사샤의 신변 보호를 위해 미행을 맡겼고, 그에게 며칠간에 사샤의 행적
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알렌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그날 이후로도 빈번히 만나고 있었나.’
잠시 인상을 쓰던 알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눈앞에서 칼을 든 채로 노려보던 사샤를 떠올렸다.
- 연정? 당신은 처음부터 역겹기만 했어.
그녀는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저주하듯 미움을 퍼부었다.
알렌은 그 눈빛을 보고서야 부끄럽게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은 착각이었다.
사샤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속으로 되뇌자 다시 가슴 한쪽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어쩔 수 있는 자격이 애초에 없던 거군.”
알렌은 이마를 짚으며 쓴웃음을 내뱉었다. 그를 보는 칼라일의 눈빛이 한층 심각해졌다.
“…저희가 처음부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칼라일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자신이 주인을 당초에 말렸더라면, 또는 더 현명한 조언을 할
수 있었더라면.
알렌은 집무실 위의 달력으로 시선을 향했다. 벌써 일주일이 반이나 지나가고, 공작 서임식
이 3주 남짓밖에 남지 않은 시기였다.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네.”
자조 섞인 혼잣말에 칼라일은 답답함을 숨기지 못하고 모노클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잘못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면 지금부터 고쳐갈 시간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제게 책임이 있습니다.”
“…아냐, 네가 무슨.”
알렌은 손을 뻗어 그에게 아니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칼라일은 부관으로서 자신의 장단에 맞춰준 데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오판의 책임은 온전히
알렌에게 있었다.
“당분간 일은 제게 넘기시고 그녀에게 신경을 쏟아 주십시오.”
“무슨 말이지.”
“물론 업무도 중요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지 않잖습니까,”
알렌은 고개를 살짝 들어 곧게 서 있는 칼라일에게 시선을 던졌다.
칼라일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 모습을 보자 알렌은, 소년이었던 두 사람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칼라일은 무릎을 꿇고 알렌에게 평생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은 채 알렌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나는 참 좋은 사람을 옆에 두고 있군.
“그러면.”
알렌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당분간 업무는 밤에 하는 거로 해도 될까.”
“그렇게 하시지요.”
“고마워.”
그때, 누군가 소공작 집무실의 문을 노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바로 사샤에게 달려가려던 알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으로 향했다.
알렌이 들어오라고 명하자 공작가의 젊은 사용인이 인사를 하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소공작님, 여기 황실과 마탑에서 추가적으로 급편을 보냈습니다.”
“….”
“….”
사용인이 한 움큼 들고 온 서류 뭉치를 바라보며 알렌은 조용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 * *
사샤가 공작가로 귀가했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안나가 방에서 달려 나왔다.
“저녁은 하셨어요?”
“아, 네. 간단히 먹고 왔어요.”
“시간이 늦어져서 혹시 몰라 간단하게 먹을거리를 준비해 놓긴 했는데….”
“고마워요. 그럼 먹을게요.”
사샤는 안나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이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안나는 치즈를 끼운 따뜻한 빵과 우유를 금방 가져왔다.
“안나 씨는 식사했어요?”
“아, 네. 먹었어요.”
“괜찮으면 같이 어때요?”
사샤의 제안에 안나의 눈이 커졌다.
“제가 어떻게 감히….”
“안나 씨가 왜요?”
안나가 머뭇거리자, 사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전 원래 아가씨도 뭣도 아니잖아요. 그냥 편하게 대해주세요.”
사샤의 말에 동그란 안나의 눈이 한층 동그랗게 뜨였다.
“옆에 앉아서 같이 먹어요. 쭉 그러고 싶었어요.”
사샤는 애정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안나는 뭔가를 결심한 듯 자리에 앉아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네.”
“부탁드릴 게 있어요.”
“무슨 일인가요?”
안나는 두 주먹을 꼭 쥐고 간절한 목소리로 사샤에게 부탁을 했다.
“아가씨를 따라가면 안 될까요?”
“네?”
“…아가씨와 함께 가고 싶어요.”
안나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얼마 전까지 삼촌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어요. 괴롭히거나 하시
진 않았지만 늘 눈칫밥을 먹느라 힘들었죠.
그래서 16살이 되자마자 삼촌 집을 나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솔직히 어디든 삼촌 집보
다 좋았어요, 제힘으로 돈을 벌고 밥만 먹을 수 있다면.
그런데 아가씨를 돌보다 보니까, 처음으로 일이 즐거워졌어요.
자기 전에 아가씨랑 떨어지는 게 아쉽고 아침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아가씨가 에른스트를 나간다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고,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무해서 일이 손
에 잡히지가 않고…….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어디든 같이 가서 아가씨의 도움이 되고 싶어요.
안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사샤는 눈을 접으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럼 저도 부탁이 있어요.”
사샤의 옅은 갈색 눈이 반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앞으로는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고, 사샤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안나 씨를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요.”
어느새 안나의 얼굴에도 화색이 가득해졌다.
“영광이에요.”
“같이 가요, 안나 언니.”
사샤는 안나의 손을 꽉 잡았다.
사샤보다 두세 살 정도밖에 많지 않은 그녀의 손은 거칠게 부르터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한 걸까.’
안쓰러움이 밀려들어 사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데 많이 줄 수 없을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저도 모아 놓은 돈이 꽤 있어요.”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 손을 맞잡은 채로 화기애애하게 수다를 떨었다.
밤이 깊어지고 안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사샤 역시 가게 후보가 될 장소를 적어 둔 메모지를 정리해놓고 침대에 누울 준비를 했다.
그때 규칙적인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자신을 찾을 사람은 한 명뿐이거니와, 노크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간 그를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사샤는 들어오시라고 대답했다.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자정이 다 된 시간인데도 알렌은 여전히 정장을 갖춰 입은 채였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지만.”
알렌은 정말 면목 없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요.”
조금 피곤했지만 굳이 이 시간에 찾아온 이유가 있겠지.
게다가 알렌의 표정이 왠지 거절하기 힘들기도 했다.
“날이 춥지 않은데 밖에서 산책은 어때?”
알렌의 제안에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 위에 올려놓았던 숄을 걸쳤다.
희끄무레한 달빛이 정원을 은은하게 비추고,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깨웠
다.
“바쁘셨어요?”
한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은 것도 그렇고, 일하다 온 것 같은 차림새도 그렇고. 곧 공작이
될 테니 바쁠 것 같긴 했다.
“응. 조금.”
알렌은 방금까지도 사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업무에 시달리고 왔지만 굳이 내색
하지 않았다.
“가게를 낼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며.”
알렌의 시선이 달빛이 그려낸 그림자로 향했다,
“네, 맞아요.”
며칠간 그가 자리를 비워서 제대로 말할 기회가 없던 사샤는 알렌에게 빵과 케이크, 홍차를
파는 가게를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요리가 제일 자신 있으니까. 조그맣게 시작해 보려고요.”
에른스트에서 지원을 해준다면 빚지고 시작하는 건 없으니, 어느 정도만 운영이 된다면 안나
와 둘이서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듯했다.
“요리를 잘하는 건 몰랐어.”
“여기 오기 전까지 집안일은 다 제 몫이었는걸요.”
“무슨 요리 하는 걸 제일 좋아하지?”
알렌의 질문에 사샤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다 좋아해요. 빵 굽는 거나, 파스타, 수프. 요즘같이 추울 땐 수프를 많이 끓여 먹었어요.
리타가 수프를 좋아하기도 했고. 제가 끓인 감자 수프는 파는 것보다 맛있다고 칭찬했어요.”
막연하게 리타와 돈을 모아서 가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빵과 수프를 팔고, 저녁에는 조명을 바꿔서 낮보다 어둡게 켜고 맥주나 위스키를 내주는 조
그만 가게.
자신이 요리를 하고 리타가 손님을 맞이하는 그런 가게를 만들면 어떨까.
두 사람의 수입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가끔 그런 꿈을 꾸기도 했었다.
“앞으로 나도 같이 다닐게.”
알렌의 말에 사샤는 고개를 들어 그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가게를 보러 다니는 일. 나도 같이 다녀도 되겠지?”
그녀가 가게를 내는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에른스트 공작가이고, 공작가의 가주는 알렌이다.
그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하세요.”
사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알렌은 입꼬리를 올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몇 가지 말해줄 게 있는데 잠시 이쪽에 앉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