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사샤 옆에 앉아 있는 모르는 사람에게 시선이 향하자 그의 연녹색 눈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안녕하세요, 프레데릭 소후작님. 저는 랑앤첸 백작가의 마리안네 데어 랑앤첸이라고 합니다
.”
나넬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하게 그에게 인사했다.
동 제국의 에메랄드와 실제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에 설는지 드레스부터 머리 모양까지 아
침 일찍부터 공들인 태가 났다.
시어도어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혼자 오라는 말씀은 없으셔서 친구를 데리고 왔어요.”
사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어쩐 일로 부르셨어요?”
“그날 이후로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얘기도 나누지 못했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시어도어는 자신의 앞에서 황홀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넬을 의식하며 어물거렸다.
“저는 잘 지냈어요.”
“그, 그렇군.”
시어도어는 알렌의 안부가 궁금해서 사샤를 불러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고 나서 본래 이곳에 온 목적을 잠시 접어
둔 채 보다 사교적인 표정으로 바꾸었다.
나넬은 시어도어와 30분 정도 훈훈한 분위기에서 수다를 떨고,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이렇게 우연한 자리에 소후작님을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었어요
.”
“백작 영애께서도 잘 들어가시길 바라오.”
나넬은 입 모양으로 사샤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하는 짓이야.”
시어도어는 나넬이 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뚱한 얼굴로 사샤를 노려보았다.
“죄송해요, 제 친구가 소후작님의 어마어마한 팬이라 너무 뵙고 싶다고 조르지 뭐예요.”
“별로 죄송해 보이지 않는데.”
그는 어느새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았다.
사샤는 검지로 뺨을 긁적이며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소공작께서는 잘 지내셔요. 바쁘신지 며칠째 뵙진 못했지만요.”
사샤는 시어도어가 자신을 불러낸 진짜 용건을 위해 입을 뗐다.
“꼭 그것 때문에 부른 건 아냐.”
그는 멋쩍은 듯이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너도 황망했을 거 아냐. 그 녀석 안부도 궁금했지만 네가 괜찮나 해서 불러낸 거야.”
시어도어는 정말로 사샤를 걱정하고 있었다.
슈베린 호수에서 일이 있자마자 공작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시어도어로서도 마
음이 편치 않은 며칠이었다.
“시기가 너무 나빴기도 하고, 너에게 괜한 일을 시킨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더군. 그래도
네 얼굴이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서 나도 마음이 놓인다.”
시어도어는 엷게 미소를 띠며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뜻밖의 이야기에 사샤는 시어도어의 녹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편안한 느낌을 받았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시어도어는 봄처럼 따뜻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보기보다 맹한 구석이 있어서 조금 놀리
고 싶을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호감 가는 사람이었다.
조금 더 친해졌어도 좋았을 텐데.
사샤는 해사하게 웃는 시어도어를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가 에른스트에서 알렌의 소식을 전해줄 수 없게 되면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
“사실 죄송한 말씀을 드리러 왔어요.”
사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바뀌자 시어도어의 눈빛에도 금방 진중한 빛이 감돌았다.
“사실 소공작께서 공작 위를 받으면, 전 에른스트 가를 나갈 거예요.”
“갑자기?”
“그래서 앞으로는 소후작님을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어디로 갈 생각인데?”
“아, 그게.”
사샤는 앞으로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가게를 열어본 적 있어?”
사샤의 말을 진지하게 듣던 시어도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뇨, 직원으로만 일해 본 게 다예요.”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직접 여는 건 직원으로 일하는 거랑 전혀 다른 건 잘 알 테고.”
“네, 그렇죠.”
“내가 도와줄게.”
시어도어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잠시 고민을 하더니 흔쾌히 말했다.
“왜 그렇게 발 벗고 도와주시려는 거죠.”
사샤는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솔직히 제가 소후작님께 그렇게 도움이 된 것도 아니고, 방금은 모르는 아가씨까지 데리고
와서 당신을 곤란하게 했잖아요.”
“너도 내가 화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
“그, 그건.”
사샤는 예상치 못한 시어도어의 호의에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원래라면 사샤 같은 평민이 동 제국 명문가의 후계자인 시어도어에게 장난은커녕, 지금처럼
마주 앉아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두 사람이 동등한 관계일 수 있던 것은 사샤가 에른스트에 있다는 특수한 상황이어서도 있지
만, 시어도어가 그만큼 아무런 편견 없이 사샤를 대해줬기 때문이다.
“아까 만났던 어린 아가씨.”
시어도어는 불쑥 나넬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아가씨 같은 눈빛을 평생 보고 살아왔어.”
자신을 동경하는 반짝거리는 눈길.
“그게 싫다는 건 아냐, 누군가가 나에게 호감을 품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
사샤는 진지한 얼굴로 양손을 모은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꽤 편리한 일이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레이디들의 호감을 사업적 수완으로 사용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날 그런 눈으로 보지 않은 사람이 두 명 있어.”
사샤는 시어도어의 깨끗한 하얀 얼굴과 대비되는 까만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한 명은 알렌 폰 에른스트이고, 또 한 명이 너야. 사샤.”
시어도어의 입이 호선을 그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의 눈에는 고마움과 친애가 담겨 있었
다.
“게다가 넌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내 마음을 알아차려 줬잖아.”
시어도어는 오른손을 들어 심장 근처의 가슴에 가져다 대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 감정이 괴롭고 힘들었어. 그래서 부정했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
시어도어는 언젠가 사샤에게 꼭 말하려고 했던 속마음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네게 교제를 신청한 건 널 이용하려 한 게 맞아.”
사샤는 갑작스러운 그의 이야기에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
었다.
“그런데 사샤 네가 내 마음을 알아채 주고, 그 감정에 대해서 어떤 판단도 내려주지 않아서
.”
자신 역시도 꼭꼭 숨기며 부정했던 마음이다.
사샤는 그런 그의 마음을 한눈에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이상하다거나 특이하게 대하
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그저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는 평범한 연정으로 생각해주었다.
“물론 우리 의도대로 풀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아….”
“너랑 계획을 짜고, 이야기하고. 그런 것만으로도 꽤 즐거웠거든.”
사샤의 입술이 달싹이며 할 말을 찾자, 시어도어는 소년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널 꽤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정말 고마워요.”
사샤의 얼굴이 미안함과 민망함으로 조금 붉게 물들었다.
“전 당신을 이용해 먹을 생각만 가득했는데.”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
시어도어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사샤의 입가에도 가벼운 미소가 흘렀다.
“앞으로도 서로 이용하는 친구가 되자고.”
“좋아요.”
시어도어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자 사샤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사샤의 오른손을 잡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등에 살짝 입을 가져다 대고 쪽 소리
를 내었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도 네게 이용당해 주려고.”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 담긴 미소가 피어 있었다.
“가게 여는 걸 도와줄게. 어렸을 때부터 상단이나 가게들이 어떻게 운영을 하는지 지켜보고
함께 일도 했어. 네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사샤 역시 시어도어를 보며 비로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
다.
* * *
공식적으로 업무에 복귀한 알렌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이 수많은 서류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의 사후 정리는 물론이고, 완전히 자신의 몫이 된 공작가 가주의 일에 치여 알렌은 며칠
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일을 했다.
“칼, 나 왔어. 별일 없었나.”
알렌이 북쪽의 공작령에서 막 복귀하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칼라일이 주인을 맞이했다.
“별일이 있었다고 할까요. 사실 주인님께서 너무 바쁘셔서 보고를 드려야 하나 망설였습니다
만.”
“뭐지?”
외투를 벗고 집무실 책상에 앉으려던 알렌은 고개를 들어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알렉산드라 님에 대해서입니다.”
사샤의 이름에 알렌의 눈썹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러고 보니 며칠째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만나기는커녕, 칼라일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온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업무에 치여 제
대로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알렌의 푸른 눈동자가 칼라일을 똑바로 향했다.
“그녀가 왜.”
“요즘 매일 같이 외출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칼라일은 자세를 곧게 하며 주인에게 자신이 조사한 사실을 고했다.
“가게를 얻을 자리를 구하러 시내에 다니는 것 같더군요. 프레데릭 소후작님과 함께.”
“프레데릭?”
어딘가 낯익은 이름에 알렌은 미간을 눈에 띄게 찌푸렸다.
“네, 당신께서 알고 계신 그 시어도어 프레데릭 소후작입니다.”
시어도어 프레데릭.
가면무도회에서 사샤와 춤을 췄던, 그리고 슈베린 호수에서 자신에게 이해할 수 없는 수작을
부렸던 놈.
어딘가 낯설지 않다 했더니.
그의 이름을 듣자 까맣게 잊고 있었던 동창이 떠올랐다.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었지, 소후작과.”
“…그러셨죠. 2년 내내요.”
아카데미에 있을 때 스쳐 가며 보았던 것 같은 흐릿한 모습이 비로소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