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알렌의 살짝 그늘진 속눈썹 아래로 한 쌍의 푸른 눈이 사샤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나직이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사샤는 갑작스럽게 가슴 부근에서 원인 모를 통증을 느꼈다.
복잡해진 생각을 안은 채 사샤는 억지로 식은 고기를 입에 밀어 넣었다.
분명히 훌륭한 맛일 텐데 왠지 고무를 씹는 것 같이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알겠어요.”
굳게 닫혀 있던 사샤의 입술이 열리며 잠시 동안의 침묵이 깨졌다.
“에른스트에 남아 있을게요. 그날까지는.”
사샤의 대답에 알렌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비치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자 사용인들이 후식을 내왔다.
홍차와 주방장이 직접 만들었다는 레몬 소르베였다.
“후식까지 함께 먹는 건 거의 처음인 것 같군.”
알렌이 조금 짓궂은 목소리로 운을 띄우며 차를 마시자 사샤 역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함
께했던 이전의 저녁 식사가 떠올랐다.
사샤의 말에 당황한 알렌이 후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를 먼저 떴던 일들을 떠올리니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풉, 웃음이 나왔다.
아까까지 조금 무겁던 공기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 알렌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사샤를 따
라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어제 준 빵, 맛이 나쁘지 않았어.”
“그랬나요.”
사샤는 소르베를 한 스푼 뜨며 대답했다.
고기를 먹은 뒤에 상큼한 레몬 향의 소르베가 입에 들어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에른스트가의 솜씨 좋은 주방장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도 한 달 정도 남은 거구나.
이곳을 떠나면 주방장의 요리가 굉장히 그리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샤를 에스코트했다.
그녀는 알렌의 능숙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돌아온 사샤는 다시 한번 앞으로의 일에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낮에 잠깐 잤던 낮잠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의 일 때문인지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에른스트 공작가의 추천서가 있다면 어디든 수월하게 귀족 가문의 사용인으로 들어갈 수 있
다.
하지만 알렌 말대로 그에게 사용인으로 갈 수 있게 추천장을 써달라고 했던 것은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생각해낸 방법일 뿐이었다.
- 정말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봤으면 좋겠어.
“내가 하고 싶은 일….”
사샤는 우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헤아려 보았지만, 생각보다 할 줄 아는 일이 많지
않았다.
빨래, 설거지, 요리.
아등바등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래봤자 평민인 열아홉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에
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었다.
“휴….”
사샤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지금 나에겐 조금 더 앞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고 살아야 할까.
사샤는 자신이 가장 즐거울 때가 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을 마치고 자신보다 항상 늦게 끝나던 리타를 기다리면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시간.
- 우리 사샤는 어쩜 이렇게 요리도 잘 하니. 정말 맛있어.
리타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던 시간.
“…카페는 어떨까.”
시내에 조그만 자리를 얻어서, 멀지 않은 곳에 리타의 묘지가 있고.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손님이 찾아올 수 있는 곳에서, 내가 구운 빵이나 케이크를 차와 함께
팔 수 있는 곳.
무릎을 가지런히 모은 사샤는 그 위에 얼굴을 기댄 채 자신의 가게를 상상해 보았다.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면 테이블을 바깥에 놓고 나넬과 시어도어를 초대해서 케이크와 홍차를
대접한다.
이불 빨래를 하고 마당을 쓸고 있으면 단골손님이 와서 빵을 사가고, 수다를 떨기도 한다.
밤에는 바 테이블 위에 양주나 와인을 올려놓고 파는 거야.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 * *
“언니! 잘 다녀오셨어요?”
무사히 다녀왔다는 소식을 백작가에 보내자마자 다음 날 일찍 나넬이 급한 걸음으로 공작 가
에 달려왔다.
“응. 다녀왔어.”
나넬의 걱정스러운 얼굴과 눈빛을 보며 사샤는 조금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할 얘기가 있었는데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
사샤는 자신에 팔에 팔짱을 낀 채 딱 달라붙은 나넬과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날은 조금 쌀쌀했지만 바람이 적고 공기가 깨끗해서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사샤는 깨끗하게 정돈된 정원의 돌길 위를 천천히 걸으며 운을 띄웠다.
“한 달 뒤에 공작 서임식이 있어. 그 뒤에 이곳을 나갈 생각이야.”
“정말요…?”
나넬의 낯빛은 금방 사색이 되었다.
“서, 설마 소공작님이 나가라고 하신 건가요?”
사샤는 그녀의 물음에 빠르게 손을 저었다.
“내가 나간다고 했어. 더 이상 부모님도 계시지 않는데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사샤의 대답에 나넬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언닌, 이제 에른스트의 사람이잖아요.”
굳이 나가지 않으셔도…. 우물거리는 말에 사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넬.”
이미 결심을 한 사샤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난 원래 귀족도 아니고, 에른스트의 사람은 더더욱 아니야.”
“그래도….”
나넬은 고개를 들어 사샤와 눈을 맞췄다.
꽉 쥐고 있는 양손의 손가락이 불안한 듯 꼼지락거렸다.
“…언니, 만약에 나가게 되어도.”
사샤의 시선에 약간 붉어진 나넬의 눈가가 들어왔다.
“나넬과는 계속 만나줄 거죠…?”
안나가 언니 같다면,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나넬을 동생처럼 느끼고 있었다.
안나와 나넬은 짧은 시간 동안 공작가에서 얻은 소중한 인연이었다.
“나야말로 나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나넬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사샤가 할 말을 기다렸다.
“난 에른스트를 나가면 더 이상 알렉산드라 폰 에른스트가 아니야.”
첫 만남에서 나넬이 그랬듯, 원래라면 두 사람은 이렇게 친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아까 말했듯이 원래 귀족도 뭣도 아니었지만, 공작가를 나가면 정말 다시 평민으로 돌아가
.”
지금이야 사샤가 에른스트의 호적에 올라가 있어서 귀족에 한 발쯤 걸쳐두었다고 볼 수도 있
었지만, 곧 호적도 정리하기로 했다.
“귀족 아가씨인 너와 더 이상 친분을 쌓는 건….”
나넬을 예뻐했고, 아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녀가 혹시 에른스트 공작가를 동경해서 자신을
따르는 걸까, 라는 의구심이 아예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언니.”
그때, 나넬이 단호하게 사샤의 말을 가로막았다.
“전 언니가 어떤 신분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요.”
“나넬….”
“사샤 언니 그대로가 너무너무 좋은걸요.”
나넬의 눈동자에는 거짓 한 점 없는 애정이 듬뿍 배어 있었다.
“언니가 어딜 가든, 뭘 하든 나넬은 언니의 영원한 동생이에요. 겨우 그런 이유로 저와의
인연을 끊으려고 하신 거예요?”
나넬은 정말로 섭섭했다는 듯 입술을 쭉 내밀며 툴툴거리자, 사샤는 빙긋 웃으며 나넬의 어
깨에 살짝 양손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나, 가게를 차리려고 해.”
“가게요?”
“응, 시내에서 조그맣게 빵을 만들어서 팔고 싶어.”
소공작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며 사샤는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내일부터 자리를 보러 다닐 건데 같이 다녀 줄 수 있니?”
“당연하죠!”
나넬은 흥분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며 사샤의 품에 안기듯 뛰어들었다.
“그런데 언니….”
사샤의 품에서 고개만 빼꼼 든 나넬이 조심스레 입을 달싹였다.
“소공작님이 붙잡지 않았어요?”
“응?”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분은 언니를 보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요.”
“글쎄.”
알렌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그를 미워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마음의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려고 하면 다른 쪽이 함께 움직이며 아슬아슬하게 수평을 이
루는 것 같았다.
“당분간은 가게에 대해서만 생각하려고.”
어차피 에른스트를 나가면 알렌을 만날 일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그는 에른스트의 젊은 가주로서 가문과 영지를 돌봐야 하고, 나는 가게를 운영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그렇게 만날 일이 없어지고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서로에 대한 감정이 뭐가 됐든 옅어지지
않을까.
나는 그를 조금 덜 미워하게 될 것이고, 그는 나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겠지.
- 그때까지 만이라도 에른스트에, …곁에 있어 줬으면 해.
순간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알렌을 떠올렸다.
단어 하나하나 골라가며 조심스럽게 말하던 알렌의 목소리와 애절했던 눈빛.
“소공작도 얼른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
사샤는 일부러 더욱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말하며 시선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 * *
정원에서 나넬과 간단하게 티타임을 즐기고 돌아온 사샤에게 공작가의 남자 사용인이 말을
걸었다.
“프레데릭 소후작님께 전보가 와있습니다.”
그에게 넘겨받은 전보를 열어보니 하얀 편지지 위에 휘갈겨 쓴 필기체로 한 줄이 덜렁 쓰여
있었다.
‘내일 16시에 함께 갔던 티하우스에서.’
사샤는 시어도어의 전보를 보며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이건 마치 그녀의 일정 유무와는 상관없는 통보 같은 약속이었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시어도어에게도 어쩔 수 없이 귀족 특유의 자기중심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런 점은 알렌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끼며 사샤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 보니 나넬이 시어도어와 친분이 있는 자신을 부러워하면서 꼭 한 번 그를 보면 좋겠
다고 했던 말을 했던 적이 있었지.
사샤의 입가에 사뭇 장난스러운 미소가 띠어졌다.
다음 날, 약속한 시간에 맞춰 시어도어가 살롱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프레데릭님.”
예약한 자리에 앉아 있는 사샤를 보자 시어도어는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동자 색을 닮은 녹색 보석이 그가 메고 있는 크라바트 위에서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잘 다녀왔어? 응, 이쪽은….”
사샤는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