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번에도 알렌이 게이트를 먼저 빠져나왔다.
알렌이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고 붙잡은 사샤는 그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발을 디뎠다.
“속은 어때?”
“괜찮아요. 어제랑 똑같아요.”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왜 마법 사용자가 아닌 사샤가 게이트를 타는 데도 아무 부작용이 없는 거지?
어제는 우연이었다고 해도 두 번 연속이나 무탈하다는 것은 그녀에게 뭔가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오셨습니까.”
칼라일이 시간에 맞춰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할 얘기가 있어, 사샤.”
알렌은 저택으로 들어가려는 사샤의 뒤에서 말을 걸었다.
“아까 출발하기 전 네가 한 이야기에 대해서.”
사샤는 뒤를 몰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피곤할 테니 들어가서 쉬었다가 저녁 식사를 같이 하지 않겠어?”
“그래요.”
사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하자, 알렌은 소공작 집무실 쪽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다녀오셨어요?”
“네, 안나 씨.”
그녀를 못 본 건 겨우 이틀인데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이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사샤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자 안나 역시 해맑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먼저 목욕부터 하실 것 같아서 준비해놨어요.”
“정말 고마워요…. 간절했어요.”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잘 알아주는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눈빛이나 상황만으로 빠르게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안나
가 고마웠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이곳의 생활이 더욱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저, 드릴 말이 있어요.”
욕실 쪽으로 향하던 안나는 고개를 돌려 사샤를 바라보았다.
“안나 씨…,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샤는 주먹을 움켜쥐며 목에 걸린 가시를 뱉어내듯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네?”
“조만간 여기서 나가게 됐어요.”
“공작가를 나가신다는 뜻인가요?”
안나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맞아요. 정확히 언제 나갈지는 오늘 저녁에 소공작님과 다시 얘기해 봐야 하지만요.”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네요….”
“그렇긴 하지만.”
사샤는 눈을 내리깔며 한쪽 팔로 다른 팔을 감싸고 쓸쓸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살아있을 확률이….”
사샤를 바라보는 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서 나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안나 씨에게 이 말을 꼭 먼저 하고 싶었어요.”
“…아가씨.”
사샤는 고개를 들고 애써 밝은 표정을 짓기 위해 양쪽 입가를 살짝 올렸다.
“그동안 잘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전 언니는 없지만, 안나 씨 같은 상냥한 언니가 있
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자서 많이 생각했어요.”
안나는 리타가 없는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자신을 버티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오늘도 죽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다행이면서도 울적
한 감정이 함께 들 때, 안나의 시중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우울함은 사라졌다
.
“당신도 아마 진짜 아가씨도 아닌 저를 돌보는 게 꺼리는 일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런 내색하
지 않고 살갑게 대해 주셔서, 정말로 고마워요.”
그래서 언젠가 이곳을 나가게 될 때 안나에게 이 고마움을 꼭 전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안나 씨의 다정함은 잊지 않을 거예요.”
사샤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으며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가
득 고여서 흔들리고 있었다.
“저야말로….”
안나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하나하나 떨어졌다. 그녀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다.
사샤 역시 그 모습에 코끝이 시큰거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안나를 위로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사샤가 욕조에 들어갈 때쯤, 욕조 물은 조금 식어 있었다.
눈가가 빨개진 안나는 얼른 따뜻한 물을 더 가져오겠다고 서둘러 욕실을 나갔고, 사샤는 온
기가 꽤 남아 있는 물에 몸을 푹 담갔다.
다리 근처가 따끔거렸다.
물 밖으로 다리를 들고 확인해보니 어제 달리다 넘어진 상처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기다리셨죠.”
안나가 금방 데운 따뜻한 물을 갖고 와서 사샤의 욕조에 부어주었다. 따뜻한 물이 들어오자
몸이 더욱 노곤하게 풀어졌다.
“씻는 걸 도와드릴게요.”
처음 목욕 시중을 들어주던 날처럼, 안나는 정성스러운 손길로 사샤가 목욕하는 것을 도왔다
.
전날 고생스러웠던 일정 때문인지 사샤의 눈꺼풀이 어느새 사르르 감겨 왔다.
욕조 속에서 잠깐 졸고 있던 사샤는 안나가 깨우자 그때야 정신을 차리고 욕실 밖으로 나왔
다.
사샤는 그대로 포근한 침대에 몸을 던지고 눈을 감았다. 이제 얼마 후엔 느끼지 못할 고급스
러운 이불의 촉감을 즐기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창가 너머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오후였다.
소공작께서 저녁 식사를 초대했다는 사용인의 말에 사샤는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
으켰다.
알렌은 이미 식당에서 짙은 색의 정장을 차려입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항상 자신과의 약속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샤 역시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짙은 색의 원피스를 차려입었다.
긴 머리는 하나로 땋아서 둥그렇게 말아 올리니 단아함이 돋보였다.
알렌이 그녀에게 시선을 향하자 샹들리에의 빛이 반사되며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우선, 네게 의사를 물어볼 것이 있어.”
“무엇이죠?”
사샤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사샤가 들어오자 사용인들이 카트를 끌고 와 저녁 식사를 분주하게 올렸다.
전식은 크림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양송이 수프와 샐러드였다.
“마르가리타 씨의 장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네?”
예상치 못한 알렌의 물음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낸 큰 목소리를 내버렸다.
“네가 괜찮다면, 마르가리타 씨의 장례를, 공작 부인에 준하는 장례식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데.”
“….”
“어디까지나 너의 의견을 존중하겠어.”
알렌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몹시 조심스러웠다. 어휘를 하나하나 골라서 말하는 것이 사샤에
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리타의 장례….
사샤가 깊은 생각에 잠기자 알렌은 더 이상 부언하지 않았다.
잠시 뒤 사샤는 조금 망설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리타의 무덤을 에른스트 공작가에 만들어 준다는 말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마르가리타를 에른스트 공작가의 묘지에 묻을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
“공작님은 공작 부인 묘 옆에 묻히시는 게 당연하고.”
리타를 찾아갈 때마다 느낄 선대 에른스트 가의 사람들과의 위화감이 싫었다.
그녀는 무엇을 원했을까.
언제나 그랬지만, 결혼에 관해서는 더더욱 리타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항상 자유롭고 밝은 리타가 있기에는 공작가의 묘지는 너무 엄중하고 무거운 곳 같았
다.
“그리고 리타는 제가 갈 곳 근처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네 생각은 잘 알겠어.”
알렌은 예상했던 사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네가 말한.”
에른스트를 나가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
알렌은 일부러 직접적으로 입에 담진 않았다.
“그것도 그렇게 해줄게.”
메인 디쉬가 나왔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대지 않았다. 알렌은 여전히 우아하고 꼿꼿한 자세
를 한 채 입을 열었다.
“알렉산드라 양의 신원 보증은 물론, 당신이 자립하는 데 필요한 비용과 장소는 전부 에른스
트 공작가에서 책임지겠소.”
에른스트 소공작은 예를 갖춰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한 말투로 알렉산드라 양의 자립을 후원하
기로 약속했다.
알렌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눈앞에 놓인 메인 디쉬인 오리고기 스테이크를 균일한 크기로
썰어서 입에 넣었다.
멍하니 그를 보고 있던 사샤도 허둥지둥 알렌을 따라 식사를 이어갔다.
“레오폴드 공작께서 널 잘 부탁한다고 하셨지.”
“….”
“아마 공작께서 계셨으면, 충분히 그 이상으로 해주셨을 거야.”
공작은 아마 마지막까지 리타 모녀가 고생스럽지 않게 준비해 놓고 갔을 것이 분명했다.
눈을 감는 순간에도 공작은 바싹 말라버린 입을 힘겹게 들썩이며 사샤를 걱정했다.
공작의 마지막이 떠오른 두 사람은 잠시 그를 추모했다.
“다만 조건이 있어.”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알렌이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며 정적을 깼다.
“정말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길 바란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할 궁리를 하거나 그저 막연하게 이곳을 벗어나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귀족가의 사용인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좋은 가문을 소개해줄 수도 있지만.”
저명한 공작가인 에른스트에 우호적인 귀족 집안이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사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친절하고 기품 있는 가문에 에른스트의 추천서를 써서 보내줄 수
있었다.
“그저 운신을 위해서였다면, 걱정하지 말고 정말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봤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뜻밖의 제안에 사샤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알렌은 그녀가 당황한 것을 눈치채고 매끄럽게 웃음 지었다.
“뭘 하든 에른스트는 알렉산드라 양의 선택을 지원할 테니까.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해.”
그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말을 덧붙인 뒤 알렌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알렌은 크리스탈로 만든 반짝이는 유리컵을 들고 물을 한 모금 삼키고는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놓았다.
“나에게도 시간을 줄 수 있을까?”
그러고 나서 그는 해가 바뀐 첫 달의 가장 마지막 날을 읊었다.
지금부터 약 한 달 뒤였다.
“그날 황궁에서 서임식이 있을 예정이야. 네가 원하는 곳에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고. 또, 그 사이에 에른스트의 신분도 정리해줄 테니.”
알렌은 가문의 수장에 어울릴 만큼 점잖은 어조로 말을 이었지만, 사실은 그녀를 붙잡고 싶
은 마음을 꾹 누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에른스트에, …곁에 있어 줬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