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아직 날이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서너 시간 정도 남아 있을 듯했다. 알렌은 소파 위에 불편한 자세로
앉아,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며칠간의 고생으로 조금 수척한 안색이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반짝이는 은발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며 흔들렸다.
언제나 단정하게 올렸던 머리카락은 장례식 이후로는 쭉 아래로 내려진 채 이마를 가리고 있
었다.
머리카락 색 때문일까.
낮보다는 밤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너무나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소공작에 대한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알렌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그녀가 죽을 때 보았던 알렌의 본색이 함께 떠올랐
다.
표독한 눈빛, 잔인무도한 말과 생생한 고통이 사샤의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저 남자가 정말 나를 좋아한다고?
그럼 대체 왜 매번 잔악하게 날 부수고, 잘근잘근 짓이겨 놓아야만 했지?
‘꿈에서 리타가 한 말은….’
-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해.
리타가 말한 ‘그’가 알렌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단히 틀린 문제를 반드시 시정하려는 사람처럼 비장했다.
- 그때에 얽혀있지만 말고, 지금의 그에 대해서만.
사샤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알렌에게 죽을 각오를 하고 욕을 했던 날부터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욕을 먹고 허세를 부리려고 내 방에 오긴 했지만, 키스를 당하고 금방 도망가 버렸지
.
그러고 나서는 식사를 챙겨주고, 티타임에 초대하고, 다 입지도 못할 만큼 많은 드레스와 장
신구를 선물하고, 사용인들 앞에서 나와 리타의 누명을 벗겨 줬다.
그리고… 점점 그가 자주 웃기 시작했다.
내가 스쳐 지나가듯 했던 말을 기억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순간이 많이 존재했다.
그에게 했던 고맙다는 말이나 미안하다는 말이 인사치레가 아니었던 적도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리타는 왜 그런 말만 하고 가버린 거야.
무시해버릴 수도 없게.
사샤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내었다.
차라리 나가자. 에른스트를 떠나 버리자.
좋은 일이라고는 전혀 없던 지긋지긋한 곳.
소공작도 에른스트 공작가도 꼴도 보기 싫다.
그저 리타를 기다리며 언제 또 죽을지 몰라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했던 이곳을 떠나서 자유롭
게 살고 싶었다.
이제 리타도 없다.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공작가에 있던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어.
사샤는 그 생각을 단정 지으려는 듯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샤는 지금 집을 구할 돈은커녕 당장 운신할 여비도 넉넉히 갖고 있지 않은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숙식이 가능한 곳에서 사용인으로 일하려면 신분을 증명할 서류나 추천장이 필요하다.
둘 중 어떤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신이 갈 곳은 그녀가 살았던 동네뿐이다.
이전에는 리타 덕에 치안이 나쁜 유흥가에서도 그나마 여자 둘이서 생활할 수 있었다.
사샤 혼자서 한 푼도 없이 돌아가면 그때만큼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제 리타가 없는 음습한 골목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몸을 양팔로 감싸 쥐
었다.
다시 가고 싶지 않아, 리타도 없는 그곳은.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
사샤는 무언가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무릎을 모아 양팔 안에 넣고 자세를 한껏 웅
크렸다.
무너지면 안 돼. 강하게 마음을 다잡아야 해.
이제 날 지킬 사람은 세상에 나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해도 현실적인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알렌 폰 에른스트의 도움을 받는 것.
‘비참하다.’
가장 의지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의지해야 하는 모순이 괴로웠다.
나는 왜 이런 세상에 태어나버린 걸까. 왜 혼자 남겨진 걸까.
어느새 사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시야가 뿌옇게 물들자, 그녀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제 리타의 일 외에는 절대 울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정신 차려.
사샤는 눈치도 없이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멈추기 위해 양손을 들고 그대로 손바닥으로 자신
의 볼을 때렸다.
찰싹,
통증에 비해 너무 큰 소리가 방을 한가득 울렸다.
잠깐 눈을 붙이고 있던 알렌이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고 사샤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히 잠을 깨웠네요.”
사샤는 볼에 양손을 떼지 못한 채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멋쩍음을 애써 감춘 여상한 말투였
지만, 귓볼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알렌은 품 안에 있던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자리를 옮긴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는 자세를 고치며 뭉친 근육을 조금이나마 풀어 보았다.
알렌이 다시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전 당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아요.”
사샤는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단단한 오해를 깨고 싶었다.
“…알고 있어.”
알렌은 그녀를 차분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히려 아주 미워해.”
“그래.”
선선히 대답했지만, 알렌의 마음은 파도처럼 요동쳤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 사샤에 대한 미안함, 또 확실하게 그녀에게 들어
버린 거절의 말에 대한 아픔이 가슴을 쿡쿡 찔렀다.
“하지만 당신은.”
나지막한 사샤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단 며칠이었지만 그래도 리타의 가족이었으니까….”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던 리타의 모습은 어제 일보다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리타는 레오폴드 공작의 팔짱을 끼고 가벼운 걸음으로 결혼식장을 나섰다.
그녀의 뒤에 불투명하고 하늘거리는 베일이 나비의 날개처럼 나풀대며 따라왔다.
그때의 마르가리타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리타가 당신을 증오하는 걸 바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꿈에서까지 나와서 그를 미워하지 말라고 한 건가요, 엄마?
“….”
“그리고 누굴 원망하면서 이번 생을 보내고 싶지 않아.”
알렌이 끔찍하게 미워서 칼을 들기도 했고, 자신이 너무 미워서 난간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여덟 번이나 죽을 때 간절히 바랐던 저 남자에게 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으면서, 미움의 불
길에 마음이 뒤덮여 나 스스로를 내팽개치려 했다.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려 해요.”
“…그래.”
“그러니까, 돌아가면….”
그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눈앞에 있으면 자꾸 여러 감정이 그녀를 얽매고 괴롭혔다.
사샤는 말라버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나서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공작가를 나가겠습니다.”
“…뭐라고?”
“돌아가면 바로 정리해서 공작가를 나가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사샤의 말에 알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가서 일을 구하려고 해요. 신원 보증을 해주실 수 있나요.”
“…왜 에른스트를 나가려는 거지.”
알렌은 다급하게 물었다.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 만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전 공작님 자녀도 아닐뿐더러, 이제 두 분 다 돌아가셨으니 스스로 살아가야죠.”
“….”
“그런데 맨몸으로 나가면 제대로 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완전히 뜻밖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리타의 죽음을 인정한 사샤가 더 이상 에른스트에 남아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일 것이다.
“돈이 한 푼도 없거든요. 제대로 된 일이라도 하려면 공작가의 신원 보증이 필요해요.”
알렌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마른세수를 하며 그녀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그렇다 해도, 너무 빠르지 않은가.
이제 사샤가 없는 공작가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신원 보증을 받아서, 무슨 일을?”
알렌은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어 사샤에게 물었다.
“신원 보증을 해주시면 귀족가의 사용인 일을 구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예요.”
알렌의 질문에 사샤는 마음속으로 정해둔 대답을 했다.
“그냥……, 에른스트에 있으면, 안 될까.”
자존심을 버리고 사샤를 붙잡는 물음을 던지는 알렌의 낯빛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제 인생을 살아야죠. 소공작님도 당신의 인생을 살고요.”
사샤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알렌과 명확한 선을 그었다.
그게 당연한 것일 텐데도.
알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
눈가에서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난.”
난 너와 함께 하고 싶어, 라는 말이 스스로도 뻔뻔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알렌의 다음 말이 없자 두 사람 사이에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가족은 무리였지만.”
누구도 원하지 않은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자신만의 판단으로 서로를 재단하며
정작 상대의 마음은 조금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최악의 가족이었다.
“언젠가는 당신과 친구는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굴레 따위 버리고, 미움과 증오도 잠시 접어둔 채 온전한 사람과 사람
의 관계라면, 지금보다 나은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면 당신의 여동생으로 살면서 나쁜 일이 더 많았어요.”
알렌은 그녀의 말에 아주 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가는 사샤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좋았던 적도 조금은 있던 것 같아요.”
“….”
“그 기억만 남길 테니까. 우리 더 이상 나쁜 가족으로 남지 말아요.”
알렌은 반쯤 눈을 내리깔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길고 섬세한 속눈썹 아래 밤보다 어두운 그
늘이 만들어졌다.
사샤는 멍하니 그가 만들어내는 음영을 바라보며 알렌의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
사샤의 제안에 알렌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줘.”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자 한층 정신이 또렷해지며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생겼다
.
당장 자신에게는 사샤를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자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관계, 그게 사샤와 자신의 현재 상
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