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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28화 (28/101)

28.

리타는, 살아있을 수 없구나.

이제 인정해야 했다. 리타는 이 세상에 없다. 더 이상.

나는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알렌은 그저 뒤에서 망연자실한 사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가갈 수도, 말을 걸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그저 무력하고 이기적인 자신

을 탓하는 것 말고는.

두 사람이 자신의 현실과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삼십 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사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옷에는 달리다 넘어진 흔적으로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사….”

알렌은 그녀를 부르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고 닿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덟 번이나 죽는 동안, 리타도 그랬던 거구나.”

두 사람 사이의 거리 때문에 알렌에게는 그녀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아팠을까.”

사샤의 입에서 바람 빠진 것처럼 공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하핫, 하…….”

리, 타도 그랬, 구나….

허탈한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사샤는 속절없이 주먹으로 흙모래를 쥐었다 펴며 이 세상에 자신만 남았음을, 완전히 외톨이

가 되었음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 * *

-   딸, 다녀왔어! 우리 딸 별일 없었….

-   리타.

일을 마치고 리타가 돌아왔을 때, 현관 앞에 작고 어린 사샤가 그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사샤의 앞에는 커다란 종이봉투가 두 개 놓여 있고, 리타를 바라보는 사샤의 표정은 자못 심

각했다.

어린아이치고는 홀쭉한 뺨에 안색이 좋진 않았지만, 워낙 예쁘장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이 있

어서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렸다.

-   리타가 출근했을 때, 어떤 아저씨가 이거 주고 갔어.

-   어머, 소시지랑 햄이잖아. 정육점 한스가 주고 간다는 게 이거였구나.

-   그 사람이 리타 좋아해?

-   그럼, 사샤. 세상 모든 남자는 날 좋아한단다, 호호호!

리타는 한 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 높여 웃었다.

그런 리타의 장난스러운 웃음에도 사샤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   그럼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낡고 헤져서 솜이 삐져나온 인형을 끌어안은 사샤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   리타는 그 아저씨랑 결혼할 거야?

리타는 웅크리고 앉아 사샤와 눈을 맞췄다.

-   사샤, 엄마가 결혼하는 게 싫어?

리타의 질문에 사샤는 아무 말 없이 눈을 피하며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   나는…

사샤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웅얼거리자, 리타는 가만히 미소를 띠며 그런 사샤를 사랑스

럽게 바라보았다.

-   사샤, 엄마는 사샤뿐이야.

리타는 말캉한 사샤의 볼에 두 손바닥을 대고 만지작거렸다.

-   어차피 세상 모든 남자들은 다 엄마의 발밑에 있지요.

리타의 미소가 다시 장난스럽게 바뀌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헝클

기 시작했다.

사샤는 리타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대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사샤에게 장난치고 싶을 때

리타가 즐기는 애정 표현이었다.

-   엄마는 사샤 너만 있으면 돼.

한참을 사샤의 머리를 헝클던 리타의 얼굴에서 짓궂은 기색이 사라지고 사샤를 품에 끌어안

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   정말 정말 너뿐이니까.

-   혹시 내가 결혼하게 되더라도,

-   그건 전부….

다음에 중얼거린 리타의 말은 바깥에서 갑자기 들린 요란한 소리 때문에 들을 수 없었다.

-   응?

-   아니야.

다시 표정을 바꾼 리타는 미소 지으며 사샤의 머리를 다시 한번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안 그래도 곱슬곱슬한 사샤의 머리가 더욱 엉망이 되었다.

-   으앙, 하지 마!

-   이리 와, 우리 이쁜이. 같이 씻고 머리 다시 묶어 줄게.

리타는 사샤의 손을 잡고 씩씩한 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향했다.

사샤의 입가에는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 안심하는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그건 전부…,

널 위해서야.

* * *

현장에서 이동해 알렌과 사샤가 도착한 곳은 마차 사고를 담당하고 있는 치안대였다.

알렌이 들어오자 그를 알아본 치안대장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에른스트 소공작님.”

알렌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오셨을 때와 상황은 거의 다르지 않다는 보고는 받으셨지요.”

이미 여러 번 현장에 방문했던 알렌은 치안대장과는 구면이었다.

공작이 돌아오자마자는 물론, 마탑에서 사고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나서도 이곳을

방문했었다.

“말씀드린 대로, 치안대에서도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뒤를 따르던 기사들의

증언으로는 갑자기 마차가 기울어지더니 절벽 아래로 순식간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치안대장은 사뭇 긴장한 얼굴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가며 알렌에게 보고를

했다.

“…부인에 대해서는, 치안대가 샅샅이 주변과 이동 경로를 수색했지만 좋은 소식을 들려드리

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쭤봤던 것처럼 이곳은 작은 치안대라 인력의 수급에도 한계가 있어서

, 공작 가에서 보내주신 추가 인원들과 수색을 함께 하고 있지만….”

치안대장은 말끝을 흐렸다.

그만 의미 없을 수색은 종료하는 게 어떻겠냐는 회유를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귀족에게 직설

적으로 말하지 못해 어물거렸다.

“계속 찾아주시오.”

“…아니.”

알렌의 뒤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사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 해주셔도 돼요.”

“….”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어요.”

치안대장은 사샤의 말이 몹시 반가우면서도 내색하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를 했다.

“엄마가, 무사했으면…, 찾을 수 있는 시간이었겠죠.”

사샤는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며 치안 대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치안대를 나오자 벌써 날이 어둑해져 게이트는 다음날 새벽이 되어야 열린다고 했다.

두 사람은 가까이 있는 마을에 숙소를 구하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시내 중심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록달록한 밝은 빛이 여기저기를 밝히고, 시끄러운 음악 소리

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섞여서 요란스러웠다.

광장에는 수많은 노점상이 열려 있고 가로등에 매달린 알록달록한 장식이 아름답게 거리를

밝혔다.

아이들이 즐겁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삼삼오오 모여 큰 잔을 들고 건배를 하

고 있었다.

성탄제의 축제였다.

어느새 일 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은 평소에는 휴양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조용한 마을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성탄제가 열

리는 연말만은 예외였다.

이곳의 성탄제 마켓은 서 제국의 성탄제 축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였다.

서 제국의 전역에서 여행객들이 몰려와 북적였지만 사샤와 알렌은 그 축제를 즐길 기분이 아

니었다.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며 근처에 있는 여관에 들어갔다.

“어머, 죄송해요 손님. 만실입니다.”

원래는 관광지가 아닌 작은 마을이라, 이맘때면 늘 숙소가 부족하다고 했다.

다음 여관도, 다음 여관도 마찬가지였다.

“방이 있긴 한데, 작은 방 하나뿐이에요.”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낡은 여관에 들어가자, 주인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때 알렌보다 먼저 사샤가 대답했다.

“그 방으로 주세요.”

알렌은 뭔가 말하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알렌 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말했다.

“다른 곳도 자리가 없을 게 뻔해요. 하나라도 구했으니까 그냥 쓰죠.”

열쇠를 받고 방으로 들어가자 그럭저럭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침대가 눈앞에

있었다.

물론 공작가에 있는 침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오래되고 작은 크기였다.

알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숙소를 예약하고 와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놓쳤다니.

지금까지 알렌은 누군가 준비해주는 여행이나 출장을 다닐 뿐이었다.

숙박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칼라일이 평소와 같았다면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 그 역시 레오폴드 공작의 장례식과 밀린 업

무로 연일 과로의 연속이었다.

전날에 출발을 결정해서 게이트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알렌이 그런 생각을 하며 난처해하고 있을 때, 사샤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폭포 앞에서 넘어져 군데군데 찢어지고 흙먼지로 더러웠다.

이 차림으로는 침대에서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옷을 사야 할 것 같아요.”

사샤는 등 뒤에 있는 알렌을 돌아보았다.

“다녀올게요.”

아무 말 없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알렌의 눈빛에도 사샤는 무심히 그를 지나쳤다.

숙소 밖에서는 여전히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광장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밤이 되어도 아무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축제를 즐겼다.

소시지와 베이컨 같은 고기를 굽는 냄새가 사방에 퍼져있었다.

사샤는 문득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우선 옷부터 사자.”

옷가게는 이미 닫은 지 오래였지만 다행히 노점에서 원피스를 살 수 있었다.

축제 때 입는 옷인지 치마에는 레이스와 알록달록한 꽃무늬가 잔뜩 달려있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옷을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중에서 가장 무늬가 적은 원피스를 한 벌

구입했다.

옷을 산다는 목적을 달성하니 허기가 심하게 느껴졌다.

사샤는 가장 가까운 노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저걸로 주세요.”

사샤는 노상에서 빙글빙글 구워지고 있는 소시지를 가리킨 후, 잠시 고민했다.

“…하나 더 주시고, 포장해 주세요.”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능숙한 솜씨로 소시지를 빵에 끼워 사샤에게 내밀었다.

사샤는 노점 테이블에 서서 말없이 조촐한 식사를 했다.

따끈하고 육즙이 풍부한 소시지가 뱃속에 들어오자 허기짐이 조금 채워졌다.

“이렇게 돼도 배가 고프고, 음식은 맛있네.”

사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빵을 전부 먹어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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