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에마.”
정신을 차린 밀레나 황녀는 고개를 돌려 방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황녀의 방은 그녀가 던진
물건들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요.”
밀레나의 또래로 보이는 수수하고 차분한 인상의 여인은 엉망이 된 방에 눈길 한번 주지 않
은 채, 그저 걱정을 가득 담은 다정한 눈빛으로 밀레나에게 다가왔다.
밀레나 역시, 그녀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귀족 영애들과 티타임이 있으셨던데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에마는 밀레나 황녀를 모시는 시녀 중 가장 높은 지위의 수석 시녀로, 몰락한 자작가 출신이
었다.
황녀의 시녀는 신원이 검증된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 중에서 뽑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시녀들 중에 밀레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 겨우 몰락 귀족이라니.
황녀가 직접 골랐고, 각별히 총애하는 수석 시녀에 대해서 대놓고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시녀들 사이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며 그녀를 질
투했다.
그럼에도 에마가 굳건히 밀레나의 옆을 지킬 수 있던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서 제국이 자랑하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꽃, 밀레나의 본성을 아는 몇 안 되는 사
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밀레나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에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밀레나가 오랜 시간 숨겨온 알렌에 대한 애정을 알고 있는 것도, 이렇게 밀레나가 발작하듯
흥분할 때마다 그녀를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도 오직 에마뿐이었다.
“절대, 절대로 그 계집이 알렌과 함께 하는 꼴을 볼 수 없어.”
밀레나는 초조한 기색으로 손톱을 물어뜯기 위해 입 근처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에마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그것을 막았다.
마치 어머니같이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시녀를 보며 조금 진정한 밀레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
였다.
언제나 자신을 위로해주고, 편이 되어주는 사람인 에마에게 진심으로 의지했다.
“우리 황녀 전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건 무엇일까요?”
에마의 목소리는 시녀가 황녀를 대하는 것보다 오히려 언니가 어린 동생을 타이르는 것 같았
다.
“그녀를 벌하고 싶어.”
하지만 누군가가 봤다면 무례하다고 했을지 모를 그녀의 말투에 오히려 황녀는 한층 침착해
졌다.
“감히 내 것에 함부로 손을 대려고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손톱을 물어뜯을 수 없자 밀레나는 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노여움을 표현했다.
“맞아요, 정말 괘씸하네요. 감히 우리 황녀 전하의 알렌 님을….”
어린아이를 어르듯 다정하고 온화한 에마의 목소리에 밀레나는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젤라가 알렌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묘안이 떠오른 건 아니다.
황녀라고 해도 허울 좋은 신분일 뿐이다.
실상은 귀족 영애보다도 자유롭지 못했다.
황실에는 황녀의 시중을 들어주는 수많은 사용인이 있지만, 그녀의 음습한 명령을 따를 만큼
충성스럽고 행동력 있는 이는 없었다.
“미천한 제가 올리는 의견이니 무시하셔도 좋습니다만….”
에마가 눈썹을 살짝 내리며 말끝을 늘였다.
밀레나는 그녀의 말에 반색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말해 봐.”
“사실 말이죠, 전하.”
에마는 목소리를 낮추곤 밀레나에게 귓속말했다.
북부 지역의 가장 험준한 곳에 살던 멸족한 소수 민족이 있습니다.
마녀라고 불리던 그들은 자신의 핏줄들에게만 내려오는 일족 고유의 마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
마법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운 것들로 대부분이 남을 해하는 것이죠.
이 꿈의 비술이라는 마법은 마녀가 아닌 자도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마법이지만, 저주를
걸 상대를 진심으로 증오하는 사람이 걸어야만 효과가 있어…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웠습니다.
제가 이걸 어떻게 갖고 있냐고요?
‘그분’께서 황실을 떠나실 때, 저에게 맡기고 가셨습니다.
우연히 얻으신 건데 혹시 황녀 전하께서 필요한 순간이 있으면 보여드리라고 하셨어요.
마법 자체는 대단치 않습니다.
그저 꿈을 꾸면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 자신이 꾼 꿈을 사실로 여기게끔 만드는 저주
이죠.
하지만 현실에 거짓을 적절하게 섞는다면 최악의 악몽을 선물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보통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면 방금까지 생생했던 꿈이 사실이 아님에 안도하고 잊어버리면
되죠.
하지만 잠에서 깼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 * *
여러 명의 남자가 그녀를 폭행한다.
나체가 되어 주저앉아 있는 그녀의 앞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수군거린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알렌이 그녀를 향해 팔짱을 끼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다.
- 저것 봐.
- 안 돼…….
- 저 여자 봐.
- 아냐, 아냐….
안젤라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지만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비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저것 봐, 저것 봐, 저것…….
다음 날, 밀레나를 모시는 침실 시녀 중 한 명이 급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달려왔다.
사색이 된 얼굴을 한 시녀가 입을 열었다.
“화, 황녀님. 큰일이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소란이죠.”
아직 침대에 앉아 있던 밀레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은근히 불쾌함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너무 급작스러운 비보라….”
시녀는 숨을 삼키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코헬 후작 영애가 갑자기, 스스로 목숨을….”
“뭐라고요?”
밀레나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였다.
“오늘 아침에 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잠시, 혼자 있게 해줘요.”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 밀레나는 몹시 슬픈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황녀님. 푹 쉬시고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황녀의 침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시녀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얼굴을 찡그렸다.
가장 가깝게 지내던 귀족 영애 중 한 분이었는데, 어쩜 좋아, 우리 황녀님….
어느새 시녀의 눈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시녀가 방을 나가자 밀레나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번, 비술을 쓴 것뿐인데.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반신반의했는데.
그렇잖아, 마녀의 저주라니. 그런 게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가… 그런데.
밀레나의 입가가 덜덜 떨리더니 몹시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방금까지 그녀가 덮고 있던 섬세한 자수가 돋보이는 부드러운 촉감의 이불 위에 천
천히 얼굴을 파묻었다.
“푸, 푸흐, 푸하하하… 푸흐하하하하, 꺄하핫!”
이렇게 효과 있을 수가, 최고야, 정말 최고라고!
설마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고까지는 기대도 안 했는데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안젤라, 당신에게 유감은 없지만 어쩌겠어요.
나의 알렌을 주제넘게 입에 담은 죄, 감히 그를 탐낸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지 않겠어요?
밀레나는 양팔로 몸을 감싸 안고 멈추지 않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 * *
그로부터 반년 뒤, 레오폴드 공작이 결혼한다는 소식은 돈을 주고 산 공작가 사용인의 보고
로 밀레나의 귀에도 금방 들어왔다.
공작이 평민과, 그것도 술집 작부인 여인과 결혼한다는 사실도 기가 막혔지만 그녀가 데리고
왔다는 알렌과 비슷한 나이라는 딸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출신은 천하지만 제 어미를 닮아 보통 미모가 아니더군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설마 알렌이 그런 여자에게 빠질 리 없다 해도, 공작이 그 여자의
모친에게 홀렸듯, 딸도 알렌을 꼬드기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을까.
그 계집의 행보에 주의를 집중하기로 했다.
“황녀님, 레오폴드 공작께서 신혼여행에서 마차 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지금 공작가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의식이 없고 위독하십니다.”
황녀의 눈썹이 씰룩였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공작이 죽어가고, 그의 새 신부는 실종되었다. 이 기회에 어린 계집까지 정리한다면 알렌은
완전히 혼자가 된다.
알렌이 그 여자에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옆에서 눈에 띄며 걸리
적거리는 존재는 사라지는 게 낫다.
그럼 혼자 남게 될 그를 위로하고 품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겠어.
밀레나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던 때가 왔다.
그 천한 계집에게도 저주를 쓸 때가.
감히 한 달간 알렌과 같은 공간에서 살았다는 것도, 그를 홀릴지도 모르는 미모를 가진 것도
모두 괘씸했다.
안젤라보다 더한 환상을 선물해야겠군요.
술집 작부의 딸이면 후작 영애 때처럼 겨우 순결로는 부족하겠죠?
의붓오라비 손에 억울하게 죽는다면 어떨까요.
한 여덟 번 정도?
어떨 때는 목을 졸리고 어떨 때는 칼을 맞고 언젠가는 독약을 받죠.
그 정도면 정신이 붕괴하지 않겠어요?
설령 하층민 계집이 벌레처럼 살아남더라도 자신을 죽였다고 믿는 제 오라비에게 연정을 품
는 게 가당키나 하겠어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꼬리가 밟힐지 모르는 누군가의 손으로 없애는 것도 아니고, 꼴
보기 싫은 계집들이 스스로 사라져준다니.
“그야말로 나를 위해 존재해주는 저주 같군요.”
밀레나는 몹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핑크 다이아몬드를 녹인 것 같은 머리카락을 쓰다
듬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기대와 다르게 여자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 계집은 되레 공작가의 사용인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심지어 감히 알렌이 황제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오게 만들어?
황제와 함께 레오폴드 공작의 장례식에 참석한 밀레나는 인파들 뒤에서 금방 사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게 안색이 나쁜 그녀를 보며 통쾌함과 못마땅한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뻔뻔하게 안 죽고 살아있다니.
아직도 정신을 놓지는 않았지만 몰골을 보아하니 조만간일 테니. 또 조그만 장난을 쳐줘야겠
어요.
검은 베일 사이로 밀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알렌, 당신은 최후의 최후에는 나에게 와야 해요.
아주 잠깐 한눈을 판 건 용서해줄 수 있어요. 지금은 언젠가 나를 사랑하기 위한 조금 험난
한 과정일 뿐이니, 모두 용서해줄게요.
난 너그러운 에른스트 공작부인이 될 여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