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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25화 (25/101)

25.

사샤는 대단히 평범했다.

평범한 사람 중에서도 가난하고, 존중받지 못할 환경의 하층민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주 조금 특별하다면, 남들에게는 없는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지식은 그녀를 대단하거나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

변하는 진실이었다.

‘난 이곳의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사샤는 지금까지 보통 사람들이라면 숨 쉬듯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아와의 일체감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고, 자신의 뛰어난 외모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누군가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대신 사는 것 같은 사샤가 유일하게 소유했던 존재가 마르가리

타였다.

사샤에게 리타는 어머니라기보다는, 그녀가 이 땅에 발 디디고 살 수 있는 유일한 지반이자

은신처에 가까웠다.

아주 가물가물하게 기억이 나는 ‘저쪽 세계’의 동화가 있다.

부모도 친척도 없는 불쌍한 오누이에게 하늘에서 그들을 구원할 동아줄이 내려와 그것을 잡

고 올라간다는 이야기였다.

그 동화처럼 사샤에게 리타는 동아줄이었다.

이야기의 끝이 어땠더라, 동아줄이 끊어져 버려서 오누이는 하늘에 올라가지 못했던가.

‘딱 지금의 내 모습이네.’

우물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에게 줄이 하나 내려왔는데 그 줄이 끊어져 버린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려던 오누이의 동아줄이 끊어진 것처럼 그녀를 지탱하던 단 하나의 존재가 사

라졌다.

리타가 사고로 실종된 이후에도 사샤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리

타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샤에게 리타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고, 그렇기에 그녀가 죽었을 리 없다고 믿었

다. 리타가 사라졌다는 것조차 사사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샤는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난간 너머로 어두운 정원이 보였다.

“리타, 정말 죽은 거야?”

아니라고 말해줘.

눈을 뜨면 다시 우리 집에서 날 깨워줘. 서툴게 만든 아침을 먹여줘. 머리를 빗질해줘.

아냐, 아냐, 그런 거 하지 않아도 좋아.

여느 때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소파에 누워서 손톱을 다듬어도 돼.

왜 나는 자꾸 리타가 사고가 난 날로만 돌아가는 거야? 계속 죽어야만 한다면 리타를 볼 수

있는 날로 돌아가면 안 될까?

몇백 번 몇천 번 후회했어.

-   사랑해, 내 딸.

그날이 리타를 볼 수 있는 마지막인 걸 알았다면 당신을 붙잡고 사랑한다고 끝도 없이 말했

을 텐데.

나도 엄마를 사랑한다고. 리타뿐이라고.

아니, 리타가 가지 못하게 말렸어야 했는데. 너무 후회해.

리타, 리타, 리타.

……리타.

-   그녀를 따라가.

사샤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따라가면 되잖아.

아, 그렇구나.

내가 스스로 죽으면 다시 그 빌어먹을 날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몰라.

“왜 이제야 알았지.”

사샤는 소리 높여 웃었다.

그래, 그렇지.

내가 선택하면 되는 거였어. 내 죽음을.

“리타, 보고 싶어….”

가느다란 달이 미약한 빛을 내고 구름이 가득 낀 밤이었다. 지독하던 고통이 이제야 끝나는

느낌이었다.

사샤의 귓속을 끊임없이 윙윙거리던 소리가 그치고, 정원보다 먼 어딘가에서 새들이 낮은 소

리로 불규칙하게 울어 대고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사샤는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녀는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 난간 위에 꼿꼿하게 섰다.

찬바람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엄마를 만나러 갈게.”

그곳에서 만나면 날 너무 혼내지 말고, 그냥 안아줘.

사샤의 가느다란 다리 한쪽이 난간 밖으로 빠져나와 천천히 허공을 갈랐다.

* * *

황성 아주 깊은 곳, 누구도 들어오지 않을 만큼 조용한 곳에서 여인은 홀로 만족스러운 웃음

을 터트렸다.

“어머, 드디어 결심해준 건가요. 착하게도.”

밀레나 루도비카는 기분 좋게 길게 뻗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언젠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귀족 영식이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자신을 사모한다는 내용이 담긴 구구절절하게 길고, 구질구질한 쓰레기 같은 글이었지만 딱

한 구절 기억나는 부분이 있었다.

-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허무한 말인가.

하지만 그 말을 조금만 바꾸면 상당히 그럴듯해진다고 생각했다.

당신을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 * *

매달 정기적으로 열리는 황녀의 사교 모임을 위해 이른 시간부터 레이디들이 한자리에 모이

는 날이었다.

내로라하는 고위 귀족 영애들이라면 모두 초대받고 싶어 하는 모임이었다.

상냥하지만 까다로운 밀레나 황녀의 선택을 받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귀족 영애들 사이

에서 황녀가 여는 사교 모임의 일원이 되는 것은 기사들의 훈장에 버금가는 일이라는 우스갯

소리도 돌 정도였다.

“안젤라 양, 정말요?”

“저도 가까이에서 이야기 한 번 나눠봤으면.”

“황녀님이 들어오십니다.”

단장을 마친 제 1황녀 밀레나가 전실에 나타나자 모두 들떠서 재잘거리던 수다를 멈추고 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핑크 블론드의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땋아내려 부분부분 작은 꽃 장식들로 꾸민 황녀는,

몸매가 은근히 드러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상앗빛 드레스 자락을 쥐고 살짝 고개를 끄

덕였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계셨나요?”

“아, 아무것도….”

“황녀님 다름 아니라, 안젤라 양이 사모하는 분이 생겼다 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후작 영애 안젤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 양손을 저었지만, 다른 귀족 영애가 끼어

들어 황녀에게 방금까지 그들을 뜨겁게 달궜던 화제를 꺼냈다.

밀레나는 준비된 상석에 천사가 내려오듯 가볍고 고상한 몸짓으로 앉으며 그들에게 시선을

맞췄다.

“정말인가요?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안젤라 양이 마음에 둔 분이 누구인지 물어도 될까요?”

오늘 모임의 주제는 안젤라가 반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녀들의 대화 주제는 보통 수도에서 유행하는 드레스, 장신구, 귀족 자제들의 염문이었다.

드레스도 장신구도 전부 시간이 지나면 의미 없어질 화제였지만 귀족 자제들의 사랑 이야기

는 더더욱 그러했다.

누가 누굴 좋아하고 마음에 뒀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은 집안의 만남이고, 결혼 당사자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사실, 얼마 전에.”

머뭇거리던 안젤라가 조심히 입을 뗐다.

밀레나는 시녀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은은한 차향을 음미했다.

“…에른스트 소공작님을 뵐 일이 있었는데 그 뒤로 그분 생각밖에 나지 않아서요.”

“그 에른스트 소공작님이요.”

“어머!”

황녀가 오기 전에도 들었던 얘기지만, 에른스트라는 단어는 귀족 영애들을 다시 한번 반응하

게 했다.

그래서 찻잔을 든 황녀의 손이 잠시 떨리는 것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었다.

“소공작님을 어디서 뵈었나요?”

한 귀족 영애가 얼굴을 붉히며 안젤라에게 에른스트 소공작과 안면을 튼 계기를 물었다.

그가 어떤 여인과도 교제는커녕 교류를 하지 않는다는 건 서 제국의 아가씨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에른스트 소공작과 저 내성적인 안젤라가?

다들 약간의 질투가 섞인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희 집안이 얼마 전부터 향신료 무역 건을 체결했는데 에른스트 공작가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거든요.”

최근 건강이 부쩍 나빠진 공작의 대리로 후작가에 방문한 알렌이 후작의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그녀는 말로만 듣던 알렌을 눈앞에서 보고 며칠째 그의 생각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

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아버지께 했더니 생각보다 기꺼워해 주셨어요.”

“정말요?”

“어쩜 좋아, 정말 진심이시군요.”

“아버지께서 흔쾌히 소공작님과 둘이서만 있을 시간도 만들어 주시고 에른스트 공작님께도

이야기해주시겠다고….”

말끝을 흐리는 안젤라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아름답다고 하더니, 안 그래도 여성스럽고 단아한 안젤라의 얼굴이 환하

게 피어올라 미모에 물이 올랐다.

황녀는 그런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에른스트 소공작과는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사이예요.”

“그러게요, 황녀님. 소공작께서 오래전부터 자주 입궁하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그래서 제 아우 같기도 하답니다.”

밀레나의 입꼬리는 기품 있게 살짝 올라갔지만 왠지 서늘한 미소였다.

“그러면 소공작님을 차지하는 행운의 아가씨가 안젤라 양이 되는 건가요?”

“누가 소공작님과 결혼할까 했더니 그게 안젤라 양이 될지도 모른다니, 두근거려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두 분.”

레이디들은 웃으며 덕담을 한마디씩 건넸다.

안젤라의 집안이라면 서 제국에서도 영향력 있는 명문가이고, 절벽 위의 꽃인 알렌도 언젠가

는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야 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자신이 아는 아가씨가 소공작 부인이 되는 게 낫지 않나, 그녀들은 생각

했다.

게다가 안젤라라면 아주 조용하고 소심한 여인이라, 나서서 젠체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질투

심이 덜 나는 상대이기도 했다.

물론 알렌이라는 서 제국에서 가장 탐나는 신랑감이 누군가의 남자가 된다는 건 아쉬운 일이

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었다.

밀레나만 제외하고.

황녀는 질투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황제는 알렌을 사애하면서도 그를 황녀들과 혼인시킬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밀레나에게 들어오는 혼담 중에 단 한 번도 알렌은 없었으니까.

공작가의 후계자라면 황제의 사위가 되어도 전혀 밑지는 것이 없을 텐데도.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고, 몹시 불만스러웠지만 밀레나 본인의 입으로는 말할 수 있는 부분

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으로서는 일 년에 몇 번이고 들어오는 혼담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임이 끝나고 방에 돌아온 밀레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목에 감겨 있던 거추장스러운 목걸이

를 잡아 뜯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왜…,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밀레나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황녀의 방을 울렸다.

“알렌의 옆에 있을 사람은! 누가 봐도 내가 가장 어울리는데!”

그녀는 손에 잡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희귀한 보석으로 만든 목걸이가 끊어져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벽에 걸려 있던 값비싼 명화는

간신히 벽에 매달려 대롱거렸다.

설마 알렌이 저런 여자에게 넘어가는 건 아니겠지?

알렌의 팔짱을 끼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안젤라를 상상했더니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았

다.

절대 그녀를 알렌 옆에서 행복하게 만들 수 없었다.

“괘씸한 것….”

밀레나는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절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황녀 전하.”

그때, 밀레나의 등 뒤로 조심스레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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