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24화 (24/101)

24.

공작이 깨어났다.

눈을 뜬 공작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아들인 알렌도, 사고가 났을 때까지 함께 있던 신부

마르가리타도 아니었다.

사, 샤.

그는 말라붙은 입술을 힘겹게 떼어 의붓딸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었다.

알렌과 사샤가 급히 공작의 방에 들어왔을 때, 레오폴트 공작은 커다란 침대에 누워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어제 알렌이 그를 찾아왔을 때까지도 여전히 의식불명이던 공작이었다.

갑작스레 깨어났지만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빛이 점멸되기 전 마지막으로 반짝이듯, 공작은 자신의 마지막을 위해 사력을 다해 의식을

차린 것이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두 사람의 기척을 느낀 공작이 충혈된 눈을 천천히 돌려 그들을 바라

보았다.

“리타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신부가 된 여인의 안위를

물었다.

알렌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꾸역꾸역 삼켰다.

그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사고로 그를 보내야 하는 건, 너무나.

“리타는.”

공작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나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쇠약한 모습이었다.

“마차가 떨어질 때 나를 감쌌어.”

“….”

“머리에, 피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공작의 몸이 새우처럼 굽어져 쿨럭이는 소리를 냈다.

알렌이 다급한 손길로 다가가자 기침과 함께 검붉은 피가 섞여 나와 알렌의 손바닥을 적셨다

.

“공작님!”

“어서, 어서 조치를 취해…, 빨리!”

두 사람의 뒤에 있던 주치의가 달려 들어와 공작의 입가를 거즈로 닦아냈다.

공작은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을 전하려는 듯 폐부 깊숙이에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알렌.”

공작은 무척 버거워하는 목소리로 알렌을 불렀다.

“……아버지!”

소공작은 허공에서 움찔거리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사샤를 부탁해.”

몸의 떨림이 눈에 보일 만큼 강해졌지만, 죽음에 임박한 이의 눈에서 강한 이채가 번득였다.

“리타의 아이, 은인.”

“……흐읍….”

사샤는 제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만 줄줄 흘렸다.

행여 울음소리가 절규처럼 터져 나올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에른스트를, …사샤를.”

피 묻은 입술이 들썩이다 점점 굳어갔다.

심지 끝에 남아 흔들리던 미약한 촛불이 꺼지듯 서서히 공작의 눈이 감겼다.

* * *

공작의 장례식은 서 제국 황실의 주요 행사를 담당하는 성당에서 주교의 미사 아래 엄숙하게

행해졌다.

서 제국의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이자 인망 있는 성품이었던 레오폴드 공작의 마지막을

애도하기 위한 수많은 귀족과 황실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제국의 황제까지도 오랜 기간 친우였던 레오폴드 공작을 위해 이례적으로 직접 모습을 드러

내었다.

알렌은 정장을 갖춰 입고 굳은 얼굴로 인파의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사샤는 내내 구석진 자리의 뒤에서 공작의 장례식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짙은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써서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게 가리고 있었다.

알렌과 함께 있으면 조문객들의 입방아에 오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

었다.

지금도 그들에 대해 소곤거리는 사람들은 충분할 만큼 많았으니까.

어느새 도착했는지 나넬이 다가와 까만 상복을 입고 울먹거리는 얼굴로 사샤의 손을 잡았다.

장례식장에 오기 전부터 울고 있던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사샤는 입가를 억지로 움직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시어도어도 다녀갔다.

그는 훌륭했던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며, 위로의 말 몇 마디를 건네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심 어린 말들은 그녀에게 전혀 닿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졌다.

처음으로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죽었다.

공작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서야 깨달았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나만 죽었는데도 계속해서 돌아오고 있어.

기어이, 뻔뻔히, 어이없게.

왜 나는 자꾸 돌아오는 거지?

대체 왜.

이곳을 도망치고 싶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리타가 공작을 감쌌다고, 떨어지면서 머리

를 다쳤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애써 외면한 채 지냈다.

리타…, 당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웃고 떠들던 시간이 우스꽝스러웠다. 하루하루 살아냈다는 핑계로 가장 중요하고

괴로운 진실은 가슴 깊이 묻어 놓고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샤는 입안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고통으로도 자책감이 씻어지지 않았다.

“혹시, 에른스트 공작가의 양녀가 되신 아가씨입니까.”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사샤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어두운 낯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짙은 피부색의 젊은 남자였다.

“누구시죠.”

“전 막시밀리안이라고 합니다. 마법사의 탑 소속의 마법사로….”

알렌의 오랜 친구입니다. 그는 그렇게 덧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을 뵙고 싶었는데 인사드리게 된 곳이 이런 자리라 안타깝습니다. 아가씨의 이야기를

알렌에게 들었던 터라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었습니다.”

“…네.”

알렌에게 무슨 말을 들었든,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샤는 그저 그의 말에 기계적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공작님과 어머님 일은 유감입니다. 마음이 많이 좋지 않으시겠지요.”

막시밀리안의 진심 어린 위로에도 그녀는 일말의 미동도 없이 굳은 듯 서 있었다.

“어머님도 마탑에서의 조사 결과만 보고 너무 절망하지 마시고 기다려보시면….”

“…그게 무슨 말이죠?”

이어지는 막시밀리안의 이야기에 그제야 사샤의 흐린 눈이 천천히 크게 떠지기 시작했다.

* * *

알렌은 새벽이 다 된 늦은 밤이 되어서야 방에 돌아왔다.

느슨하게 매여 있던 넥타이를 풀러 테이블 위에 던져 버리고 지친 몸을 소파에 기댔다.

“후….”

제대로 자지 못해 눈이 아플 만큼 피로감이 느껴졌다. 알렌은 깊은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그때 불길할 만큼 길게 끼익 울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방문이 열렸다.

알렌이 이마를 짚은 자세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문 쪽에 시선을 돌리자, 짙은 그림자가 그의

방 앞에 길게 깔려 있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짐을 진 채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천천히 다가오던 걸음이 그의 앞에 멈췄다.

“사샤?”

알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샤를 살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때문에 사샤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짜인가요?”

사샤의 목소리는 꽉 잠겨있던 수도를 억지로 비틀어서 여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였다.

“사고 현장에서 공작님과 마부 것이 아닌 치사량의 혈흔이 발견되었다는 게.”

“…어디서 들었지?”

알렌의 당황한 표정은 그녀의 물음을 대신 대답해주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신이.”

그때야 그녀는 고개를 들고 알렌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말한 내 어머니의 결백이, 그 혈흔 때문이었어?”

사샤는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런 것만은 아니야. 마차에는 어떤 조작도.”

“리타가 죽어서 우리 결백이 밝혀진 거냐고!”

사샤는 등 뒤에 숨겨 왔던 단검을 꺼냈다.

양손으로 꼭 쥔 칼날을 알렌에게 들이대며 원망하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넌 처음부터 그랬어. 우리를 천한 여자들에 범죄자 취급했지. 마르가리타가 죽은 게 확실해

지니까 그때야 믿는 척한 거야?”

“사샤….”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개자식아.”

“….”

“내 어머니의 죽음을 감추고 날 농락하는 게 재밌었니…?”

하, 하하, 끄흐, 끅….

사샤의 웃음은 기괴할 만큼 비통했다.

놈과 희희낙락거렸던 순간들이 역겹게 느껴져서 참을 수 없었다.

이번 생에도 알렌 폰 에른스트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살인마에 지나지 않았

는데. 잠시나마 저치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그를 연민했던 자신이 멍청해서 견딜 수 없었다.

저 남자가 날 죽이지 않은 건 그저 이번 생에 내 반응이 재밌어서 그랬던 거야.

이번엔 혹시 다른 게 아닐까, 안일하게 생각했다. 저 남자의 눈빛을, 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짓말을 믿으려고 했던 내가 바보였어.

사샤의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알렌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라….”

네가 상처받을까 봐 숨겼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난 정말 네가 상처받을 것을 걱정해서 전하지 않은 건가?

네게 들을 원망을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가슴이 싸늘하게 굳어진다.

알렌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널 죽일 거야.”

사샤는 비틀거리며 알렌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알렌의 앞에 선 사샤가 그에게 칼날을 겨누자,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칼이 복부에 닿을 만

큼 가까워졌다.

한 번만 더 다가가면 돼. 이대로 힘을 주면 돼. 그러면 칼이 박히고 피가 흐르고…….

양손으로 칼을 붙잡고 있는 손이 벌벌 떨렸다.

칼날이 반짝이며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위로 떨어진 눈물방울에 칼날이 번져 보였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사샤….”

“이렇게 네 놈이 증오스러워도, 찢어 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도. 차마 죽일 엄두가 나지 않

는데. 어떻게 매번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날 죽였지?”

사샤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렀다.

“무슨, 말이지…?”

알렌은 사샤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누굴 죽여? 매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결코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혼란스러움이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단 하나였다.

그녀에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아니, 자존심 때문에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마음을 전하는 것보다 먼저여야 했다.

네 앞에서 난 항상 내 감정이 우선이었다.

멋대로 널 미워하고, 널 사랑하고, 널 판단했다.

“…미안, 하다.”

알렌은 굳어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미안해, 사샤.”

“늦었어.”

“……미안해.”

“필요 없어, 당신의 사과 따위.”

“사샤….”

“필요 없다고!!”

쥐어 짜내듯 지른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알렌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사샤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와 내가 연정?”

사샤는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두 사람 사이에 평생 존재하지 않을 단어를 말하며 까득까득

이를 갈았다.

“언제나 난 네가 역겹기만 했어.”

그녀는 쉬어버린 목소리로 힘없이 말하며 엉망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바닥에 떨어진 단검이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반짝였다.

이윽고 사샤의 몸이 뒤를 돌아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알렌의 방을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