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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21화 (21/101)

21.

다음 날, 사샤가 여느 때처럼 소공작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익숙한 칼라일의 모습이 보이

지 않았다.

그 대신 거의 열흘 간 자리를 비웠던 알렌이 오랜만에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알렌은 흰 셔츠에 짙은 제복을 입고 앞머리를 말끔하게 쓸어 올려 평소보다 한층 더 격식을

차린 옷차림을 하고, 사샤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사샤가 그에게 인사하자, 알렌은 그때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황성에서 돌아오셨나 보네요?”

“응.”

알렌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한 뒤, 다시 책상 위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예민하고 말 걸기 쉽지 않아 보였다.

‘왜 저러지. 그동안 귀찮을 만큼 살갑게 굴었으면서.’

유난히 흐린 날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가 간간이 창문을 때렸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창가로 던졌던 사샤의 시선이 자연스레 알렌에게 옮겨 갔다.

“저, 소공작님.”

지금 아쉬운 사람은 나니까.

사샤는 최대한 살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붙였다.

“금요일에 가면무도회에 오셨던 거 맞죠?”

“그래, 맞아.”

알렌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누르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냥 갔어요?”

“잠깐 들러야 할 일이 있었어.”

가면무도회에 들릴 일?

거기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라도 있었나?

남자를 만나러 굳이 가면무도회에 올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여자라기에는 지금까지의 알렌

은 교제하는 사람은커녕 따로 만나는 사람조차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는 사샤가 혼자 있던 테라스에 일부러 들어와서 말을 걸었다.

-   하실 말이라도 있으세요?

-   …너는.

알렌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하지만 그에게 지금 물어본다고 해도 속 시원히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녀에게는 준비해 온 계획을 성공시키는 일이 훨씬 중요했다.

“갑자기 가셔서 서운했어요.”

사샤는 할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어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준비한 계획은 알렌의 기분이 지금보다 나아 보일 때 꺼내는 걸로 하고 우선 눈앞의 일을 하

기로 했다.

사샤는 자신의 책상 위에 정리되어 있는 서류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서운했다는 사샤의 말에 알렌의 푸른 눈동자가 뒤늦게야 그녀를 응시했지만, 이미 고개를 푹

숙이고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한 사샤는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한동안 집무실에서는 서류 넘기는 소리와 펜 사각거리는 소리, 그리고 창밖의 빗소리만이 들

렸다.

일을 하면서도 사샤는 계속해서 알렌을 힐끔거렸지만, 그의 분위기는 처음과 별반 달라 보이

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사샤는 결국 뺨을 긁적이고 알렌에게 준비한 말을 꺼냈다.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몇 장의 서류를 빠르게 넘기며 서명을 하던 알렌은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시면 혹시 내일 오후에 피크닉 어떨까 해서요.”

“피크닉?”

“네에, 내일은 날이 맑을 거라네요.”

겨울에 비가 내리는 일은 드문 곳이라, 오후가 되면 지금 내리는 비도 완전히 그치고 맑아진

다고 했다.

“어디를 가고 싶지?”

“겨울이 되면 온통 하얗게 된다는 근교의 호숫가가 있다는데. 거길 가보고 싶어서요.”

사샤는 시어도어와 미리 입을 맞춰둔 장소를 말했다.

마차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곳이지만 시어도어가 강력하게 그 호수를 주장하는 바람에 적당

히 가까운 곳에서 만나고 싶었던 그녀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슈베린 호수 말하는 건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알렌은 잠시 생각하더니 옅은 한숨을 쉰 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오후 두 시에 마차를 준비시켜 놓을게.”

“네!”

다행히 알렌은 가타부타 묻지 않고 군말 없이 수락해줬다.

사샤는 생각했던 것보다 시작이 순조로운 것을 기뻐하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내일은 여기 안 와도 되니까 오후에 나갈 준비를 천천히 해. 어차피 중요한 건 끝났어.”

“그래도 되나요?”

알렌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일까지 쉬어도 된다니, 이게 웬 떡이냐.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사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알렌의 얼굴에도 처음으로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내일 알렌과 시어도어가 친해지고, 나는 시어도어로부터 쓸모 있는 정보를 받는다.

그야말로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닌가.

시어도어의 도움이 있으면 예상한 것보다 더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공작가를 나갈 수 있을 것

이다.

그녀는 흥분으로 양 볼이 달아올랐다.

내일이 정말,

“기대되네.”

사샤는 자신이 하고 있던 생각의 일부가 말이 되어 나온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사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알렌은 그녀의 발갛게 물든 뺨을 보자 시선이 흔들렸다.

안절부절못하던 알렌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가버렸지만,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

얼대며 즐겁게 일을 마쳤다.

* * *

“나 내일 휴가야, 칼라일.”

사샤가 할당량을 마치고 집무실을 나간 뒤, 칼라일과 둘만 남은 알렌이 입을 열었다.

“한동안 고생하긴 하셨죠. 계획이라도 있으신가요?”

“사샤가 슈베린 호수에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슈베린 호수요?”

알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들이 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그 호수 말이군요.”

칼라일은 여상한 말투로 대꾸했지만, 주인의 데이트 소식에 대단히 반색했다.

여성이 가장 청혼받고 싶은 장소 중 한 곳이기도 한 슈베린 호수에 남녀가 함께 가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제국민은 없다.

사샤가 슈베린 호수를 가고 싶다고 하자마자, 알렌은 그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일.”

알렌은 등을 돌려 창문을 열었다.

오후에는 그친다고 했던 겨울비가 여전히 내리며 정원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살랑이며

부는 바람에 빗물이 조금 섞여 알렌의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다.

“사샤에게 모든 걸 말하겠어.”

더 이상 망설이지도, 혼자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다. 막시밀리안의 조언대로 사샤에게 내 마

음을 모두 이야기하겠다.

알렌은 금으로 세심하게 작업한,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밝은 파란색 마법석 목걸이를 손

에 꽉 쥐며 다짐했다.

* * *

“저 왔습니다.”

새벽이 거의 다 된 시간, 알렌은 홀로 레오폴드 공작이 누워있는 침실로 찾아갔다.

공작의 옆에서 간병인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알렌은 자신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하고, 공작의 머리맡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의 이마를 수건으로 한 번 닦아준 알렌은, 깍지 낀 손등 위에 이마를 기댔다.

-   죄송합니다, 공작님…. 바, 반년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고가 나기 훨씬 전부터, 에른스트 부자는 레오폴드 공작의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

고 있었다. 공작의 건강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주치의와 달리, 두 사람은 이성적으로 시한부 판정

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레오폴드 공작은 갑작스럽게 평민 여성과, 그것도 술집에서 일하는 작부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알렌의 극심한 반대에도 결국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결혼을 밀어붙였다.

알렌은 눈을 감고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를 유혹한 여인과 그녀의 딸. 알렌의 눈에는 두 여자가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디 얼마나 잘난 낯짝을 하고 있는지 보러 가줘야겠군.

알렌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소공작 집무실에서 일어나 응접실로 향했다.

-    알렉산드라라고 합니다….

여인의 딸이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의 이름을 말한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정지하며 알렌의

시선에는 오로지 눈앞에 있는 여자의 모습만이 가득 찼다.

갈색이 섞인 어두운 금발이 여자의 움직임과 함께 찰랑거렸다. 긴장했는지 겁을 먹은 갈색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스스로 어설프게 다듬은 머리 모양과 나름대로 차려입었지만 서민의 취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옷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표정까지, 별 볼 일 없을지 모르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더욱 알렌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왜 모든 빛이 저 여자에게만 향하는 거지?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눈가에 잔뜩 힘을 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의 딸은 차를 마시는 척하며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해도, 알렌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감정이 그의 온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작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왔을 때야 정신을 차린 알렌은 핑계를 대고 다급하게 그곳을 벗어

났다.

제정신이 아니다. 당장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녀를 본 순간부터 알렌은 사랑에 빠졌다.

-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잠시라도 아껴주고 싶은 사람과 함께 하고 싶구나.

레오폴드 공작이 결혼을 하겠다며 유례없이 강직한 목소리로 말했을 때, 알렌은 그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에게 이 가문은 무엇이며, 아무리 제 핏줄이 아닐지언정 후계자인 나는 무엇이란 말입니

까.

당신의 생 마지막에 선택한 게 왜 하필이면 그 여자입니까. 그를 원망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거였군요.”

이런 감정이라면, 이런 폭풍 같은 감정이라면, 사나운 파도가 끊임없이 일고 있는 것 같은

이런 감정이라면.

아무리 이 감정을 속이려고 해봐도 사샤의 미소 한 번에 모든 의구심이 녹아 버린다.

하물며 생의 마지막에 그런 사람을 만났다면.

“이젠, 조금이나마 당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알렌은 양 주먹을 꽉 쥐고 마음에서 깊숙이 우러나온 목소리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당신도 이렇게 깨어나시지 못하고, 사샤의 어머니도 찾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당신이 사

랑한 여인의 딸을 제가 지키고 싶습니다.

“사샤와 함께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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