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 소문이 사실인가요?”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웃는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그녀 역시 제자리에 서서 시어도어를 바라보았다.
알렌만큼 크지는 않아도 꽤 장신인 그를 보려면 고개를 들어올려야 했다.
“당신이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당신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
“당연히 관련이 있죠.”
그는 사샤의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제가 아가씨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뭐라고요?”
“에른스트의 아가씨.”
그는 사샤의 오른손을 잡으며 미소를 띤 채 달콤하게 말했다.
“당신과 앞으로 진지하게 교제하길 원합니다.”
당혹스러운 눈을 한 사샤와 달리 시어도어는 태연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대답을 당장 들을 수는 없겠죠?”
“아니, 저기….”
“내일도 아가씨를 뵙고 싶군요. 시내에 있는 티하우스에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사샤가 입을 열어 거절의 의사를 밝히려고 하자, 그가 먼저 운을 떼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이건 동 제국 식 인사입니다. 그는 그녀의 뺨 가까이 입술을 갖다 대고 쪽 소리를 내었다.
그의 숨결이 사샤의 뺨을 간지럽혔다.
“프레데릭 후작가의 영식이요?!”
나넬은 깜짝 놀라 티타임 테이블을 쾅 치며 일어섰다.
트레이가 흔들거리면서 떨어지려는 쿠키를 사샤가 붙잡았다.
“알고 있는 사람인가 보네,”
“서 제국 동 제국 통틀어서 모르는 아가씨가 없을걸요.”
그런 유명 인사였나. 사샤는 프레데릭의 곱게 휘어지며 눈웃음 짓던 녹안을 떠올렸다.
“집안도 집안이고, 매너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굉장히 잘생기셨잖아요.”
“음, 그런 것 같긴 하더라.”
날카로운 인상의 알렌과 달리, 그는 부드러운 미남의 정석이었다.
확실히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있을 법한 얼굴이었지.
“알렌 님과 동갑이실 거예요. 그분을 노리는 아가씨만 해도 제가 알기로 양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을 정도예요.”
“흠….”
“아직 약혼자도. 따로 교제하는 분도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분이 가면무도회에서 언니에게 춤을 신청했던 그 사람이에요?”
“응.”
“게다가 어제 찾아와서 교, 교제를… 신청하셨다고요?”
“그랬지.”
차를 한 모금 마신 사샤는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나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너무… 너무 멋져어어어어어!”
나넬은 붉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기….”
“서 제국의 다이아몬드 소공작 알렌 님에 동 제국의 에메랄드 프레데릭 소후작님이라니….”
서 제국의 뭐라고? 사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되물으면 다시 그 끔찍한 단어를 들어야 하는 것이 두려워 차라리 잊어버리자며 그녀
는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을 쓰다듬었다.
“전 대체 누굴 응원해야 하죠? 하아, 너무 고민되잖아요….”
사샤는 나넬의 폭주를 말리느라 한참 애를 써야 했다.
한동안 혼자 흥분해서 떠들다 기진맥진한 나넬과 사샤는 자리에 앉아 식어버린 차를 마셨고,
그 모습을 본 메이드가 그녀들의 잔에 차를 다시 따라주었다.
서 제국의 다이아몬드라니.
다시 떠올려도 온몸이 오그라드는 단어는 쉽게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사샤는 고개를 여러 번 저으며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어떡하실 거예요, 언니?”
나넬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물었다.
“근데 말이야, 좀 이상해.”
“이상하다고요?”
“뭐라고 설명하긴 힘든데….”
사샤는 찝찝한 표정으로 홍차 풍미가 가득한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나넬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어제 말했던 대로 시어도어는 그녀를 다시 찾아왔다.
사샤가 막 알렌의 집무실에서 일을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소후작님.”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왜 동 제국의 에메…, 어쩌고 별명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녹색 눈이 가늘어지며 짓는 눈웃음은 뭇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사샤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차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같이 나가시지 않겠습니까?”
“하아….”
“요즘 서 제국의 사교계에서 가장 유행하는 티하우스인데 예약을 하려면 한 달은 걸리는 곳
입니다.
겹겹이 쌓은 부드러운 크레이프 사이에 달콤한 마스카포네 크림이 일품인 크레이프 케이크가
가장 유명하지요.”
청산유수로 케이크를 설명하는 시어도어의 설명에 홀린 사샤의 눈빛이 호의적으로 변했다.
“…그럼 잠깐만, 가볼까요?”
시어도어는 가느다란 미소를 흘리며 사샤를 에스코트했다.
“어제 드린 말씀에 대해 생각해보셨습니까?”
그가 말한 대로 이곳의 크레이프 케이크는 대단한 맛이었다.
얇게 부쳐낸 크레이프를 포크로 한 줄 걷어내어 먹으니 꿀과 생크림이 입안을 풍부하게 채웠
다.
사샤는 케이크를 먹는데 정신이 팔려 그가 다시 한번 불렀을 때야 대답을 했다.
“교제요?”
“네, 아가씨.”
“흠….”
그녀는 여전히 포크로 크레이프를 말면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믿을 수 없네요….”
“그러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면무도회에서 당신을 처음 보고.”
“아니, 그게 아니라.”
사샤는 의도적으로 시어도어의 말을 차단했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것처럼.
“네?”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요.”
사샤가 그를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자, 그녀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시
어도어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당신의 의도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으나 하나 확실한 건 (알고) 있습니다.”
“….”
“당신의 교제 신청이 거짓말이라는 걸요.”
어느새 시어도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조심스럽게 제가 하나 가정해 봐도 될까요?”
이번에는 사샤 쪽에서 그를 보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은 제가 아니라 혹시, 에른스트 소공작님 아닌가요?”
사샤는 소공작이라는 말에 시어도어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당신은 저에게 다가오면서 에른스트의 아가씨냐고 여쭤봤죠. 오늘도 그렇고요.
당신은 제게 흥미가 있는 게 아니라 이 집안 자체에 흥미가 있어 보였어요.”
그날 가면무도회에서 그가 싫어하는 그녀를 잡아끌며 세 곡 연달아 춤을 출 때, 사샤는 이상
함을 느꼈다.
춤을 추는 내내 가면 속 그의 눈은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에른스트의 소공작께 무슨 목적이 있으셔서 절 이용하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
그는 정곡을 찔린 듯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는 그런 영혼도 없는 눈으로 저에게 거짓 교제 신청을 하지 마시고 제대로 도움을
청해보세요.”
사샤는 그녀의 눈앞에서 씨알도 안 먹힐 어설픈 거짓말이나 늘어놓는 허술한 남자를 너그러
운 눈으로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당신이 저의 서류상 오라비에게 품은 것이 악의이든 호의이든,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
지 않겠습니까.”
동 제국 최대의 부호의 아들.
그에게서 나는 강렬한 돈 냄새에 사샤는 그녀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
의 편이 될 수 있음을 어필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황실 아카데미 입학식이었지.”
두 번째 티팟이 테이블 위에 도착했을 때, 시어도어는 어느새 푸념을 시작하고 있었다.
“저기, 이 타르트 타탱도 하나 더 부탁드려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사샤는 웨이터에게 디저트를 더 주문했다.
“차석 입학이라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자고 간 거였어.”
그는 몇 년 전 일을 어제인 것처럼 생생하게 말했다.
“어떤 놈인지 만나면 콧대를 눌러주겠다고 벼르고 있었거든.”
“음, 네.”
“그리고 그 녀석이 단상에 올랐을 때, 나는 깨달아 버린 거야.”
조심스럽게 말하는 시어도어의 얼굴은 어느새 설핏 붉어져 있었다.
“…왜 내가 어떤 영애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었던 건지.”
높은 단상 위에 올라선 그에게서는 신화에 나오는 미형의 인물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신
성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가 입학생을 대표하는 선언서를 읽기 시작하자, 낮지만 깊은 목소리가 모두를 단숨에 사로
잡으며 강당을 울렸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새하얀 정복을 입고 선언을 하는 알렌의 모습은 방금 전 일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 알렌 폰 에른스트?
- ?
- 난 시어도어 프레데릭이다.
난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강당을 나가는 그에게 가서 말을 걸었지.
- 동 제국 프레데릭 후작 가문의 후계자로, 나의 누이는 서 제국의 황태자비 아그네스 님
이지.
- ….
- 그러니까 나에게 잘, 어디 가는 거야! 내 말 아직 안 끝났….
그 뒤로 난 그에게 아카데미에 있는 2년 내내 무시를 당했어.
그 녀석은 언제나 인상 나쁜 빨간 머리랑만 다니면서 내 말에는 대꾸조차 해주지 않았지.
“2년 동안 그 녀석보다 옆에 있는 빨간 머리랑 얘기를 더 많이 했다고 하면 믿어져?!”
“여기, 에클레어도 두 개 주시겠어요?”
“그 녀석의 관심을 끌려고 별짓을 다 해봤지만 철저하게 무시로 일관 당했다고….”
시어도어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괴로운 듯 중얼거렸다.
사샤는 그런 그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방금 나온 눅진한 타르트 한 조각을 입에 넣었
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게 뭐죠?”
“그 녀석과 친해지고 싶어.”
하 뭐야, 이 수줍고 순수한 바람은.
사샤는 고개를 돌려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해지세요, 그럼.”
“나를 상대 안 해준다니까!”
그는 다른 테이블을 의식하면서도 애타는 목소리로 조용히 외쳤다. 어느새 그의 눈은 눈물이
고일 것처럼 글썽거리고 있었다.
“뭐, 일단. 당신의 딱한 사정은 잘 알았어요.”
“아가씨….”
시어도어는 감동 받은 눈길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아직도 그는 사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겨우 이런 정성으로 누굴 유혹하려고 한 거야.
사샤는 너무나 허술한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입매를 비틀었다.
“근데 그건 당신의 사정이니까.”
“응?”
“당신을 도와드리면 저에게도 뭔가 이득이 있어야겠죠?”
“뭘 원하는데?”
사샤는 아무 말 없이 오른손을 올려 엄지손가락과 검지를 붙이고 익숙한 동그라미를 만들어
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세상은 러브 앤 머니랍니다, 프레데릭 님.”
결국 그녀는 시어도어에게 앞으로 동서 제국의 주요 무역 상품의 흐름 및 파생상품 매수 시
점 등, 돈 될 만한 정보를 건네받기로 약속하고 그를 돕는 모종의 약속을 타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