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17화 (17/101)

17.

레오나 황녀는 선황제의 막내딸이었다.

레오나의 친모는 프란츠의 모후였던 제 1황비의 시녀로, 선황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시침을

들고 아이를 품었다.

하지만 난산으로 그녀의 모친은 레오나를 낳자마자 숨을 거뒀고, 프란츠의 모후가 갓 태어난

황녀를 거두어 주었다.

그래서 프란츠와 레오나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동복 남매처럼 자라게 되었다.

프란츠의 모후인 1황비 역시 그의 어머니답게 대체적으로 온후한 성품의 여인이었지만, 레오

나를 대할 때는 친자식이 아님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레오나 본인 역시 천성이 자유분방해서 황궁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했다.

어디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황녀를 진심으로 챙겨주는 사람은 오빠인 프란츠뿐이었

다.

선황이 붕어하자 황태자였던 프란츠는 황위를 물려받았고, 성년이 다된 레오나도 혼례를 치

러야 했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   레오나는 정략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요. 오라버니 옆에서 결혼하지 않고 살면 안

될까요?

그렇게 차일피일 황녀의 남편에 대한 간택을 미루던 어느 날, 레오나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

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레오나는 열 달 뒤, 잘생긴 남자아이를 낳고 자신의 어머니처럼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둘 때까지도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눈을 감기 전, 황제가 된 그녀의 하나뿐인 보호자이자 오빠인 황제 프란츠에게

사력을 다해 애절하게 부탁했다.

-   이 아이를 저처럼…, 잘 거둬주세요, 오라버니….

황실의 사생아인 갓난아이를 황궁에 둘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황제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오랫동안 불임으로 아이를 갖지 못한 에른스

트 공작가에 레오나의 아들을 극비리에 입양시켰다.

에른스트 공작가는 남자아이에게 알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후계자로서 키웠다.

황제에게는 자식도 종친도 많았지만 유난히 알렌에게 눈이 갔다.

레오나를 꼭 닮은 이목구비와 푸른 눈을 보면 일찍 죽은 동생이 그리웠다.

나이를 먹을수록 알렌은 까다롭고 다소 오만한 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레오나를 떠올릴 만큼 알렌은 어머니를 많이 닮아 있었다.

게다가 알렌은 황족 중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마법 사용자인 데다 지니고 있는 마법도

아주 희귀한 중력 계열이었다.

황제는 그것을 핑계로 알렌을 두세 달에 한 번 황궁에 불러 머물다 가도록 했다.

알렌 역시 황실을 불편해하진 않았다.

자식만큼 마음이 가는 아이여서 혼사도 누구보다 신경 써서 좋은 가문의 영애와 연을 맺어주

려고 했는데 제 어미처럼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하다니….

“후….”

황제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황제가 불허한다고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알렌의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어미처럼 반대가 심할수록 불타오르는 고집 센 아이이다.

알렌은 애초에 자신의 마음을 허락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선언하려고 온 기세였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지.”

“…네, 폐하.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분고분히 대답했지만, 알렌의 눈빛에서는 내일은 반드시 원하는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뿜어져 나왔다.

황제는 물러가는 알렌의 뒷모습을 보며 지끈거리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 * *

“알렌, 오랜만이네요.”

접대실을 나오던 알렌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프란츠 황제의 딸인 1황녀 밀레나 루도비카가 시녀를 대동하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아바마마를 만나고 오는 건가요?”

은은한 분홍빛이 섞인 핑크 블론드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알렌보다는 옅지만 맑은

청안을 가진 미인이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황실의 여인임이 확연히 드러나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고아한 미소를 지으

며 알렌을 바라보았다.

“황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알렌은 오른팔을 들어 눈앞의 여인에게 예를 갖췄다.

그녀는 알렌을 향해 교태로운 눈웃음을 띠고 있었다.

“함께 티타임을 한 지 오래된 것 같네요.”

“…네.”

밀레나는 알렌보다 두 살 위로, 프란츠 황제와 2황비의 장녀였다.

알렌과는 그가 어려서부터 황실에 드나들며 봐온 사이였다.

그녀가 친밀한 말투로 대화를 건넸음에도 알렌은 다른 생각에 빠져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공작가에 돌아가기 전에 한 번 찾아와줘요. 누이와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

“그럼.”

그녀는 알렌이 대답하기도 전에 가볍게 인사하고 방금 전 그가 나온 황제의 접대실로 들어갔

다.

“아바마마.”

“…밀레나냐.”

황녀는 황제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심려된다는 표정으로 부황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의 접대실을 지나가다, 우연히 에른스트 소공작이 나오는 걸 보고 말았어요. 밀레

나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두 분 다 안색이 좋지 않으셔서 걱정이 되네요.”

밀레나는 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청초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했다.

“소공작은 어렸을 때부터 보던 사이라 마치 제 동생 같아 마음이 쓰여서요.”

황제는 여전히 언짢았지만, 황녀를 보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밀레나의 목소리는 진심으로 알렌을 걱정하는 듯한 누이의 말투였다.

“무슨 일인지 소녀가 여쭤도 될까요?”

“….”

“말씀하시기 저어하신 건가요.”

밀레나의 물음에 황제는 이 일을 말해야 하나 망설였다.

에른스트 공작 일로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는데, 이제는 알렌까지 평민과 결혼하고 싶다고 황

궁에 찾아왔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황녀 앞에서 하면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기분이

었다.

“결례를 저질렀나 보네요.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녀가 드레스 끝자락을 잡으며 인사를 올리려고 하자, 마침내 황제는 입을 열었다.

“그래, 넌 알렌을 마치 제 동생처럼 예뻐해 줬지.”

밀레나는 빙긋, 아름답게 웃었다.

그 미소는 매끈하고 화려했지만, 마치 독을 품은 뱀이 기다리던 먹이를 물고 나서 만족스러

워하는 모습 같았다.

“알렌이 혼약하고 싶은 여자가 생긴 것 같은데, 짐이 보기엔 탐탁지 않아.”

“어머. 에른스트 소공작이요? 그도 그럴 나이가 되었지요. 벌써 스물이잖아요.”

밀레나는 눈꼬리를 내리며 자애로운 얼굴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아바마마께서 탐탁지 않으시다니, 어느 가문의 영애기에 그럴까요.”

“…그 아이는.”

황제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고 공작과 사샤 모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밀레나는 온화한 표정으로 황제의 말을 들으면서, 입가가 조금씩 꿈틀대는 것을 감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아바마마….”

황녀는 눈을 내리깔며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소녀에게 맡겨 보시는 게 어떨까요?”

“네게?”

“주제넘지만 여인의 일은 여인이 해결할 때가 빠를 때도 있답니다.”

“흠….”

밀레나의 말이 묘수일 수 있다는 생각에 황제는 조용히 반색했다.

“제가 그 아가씨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알렌의 결심을 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뿐더러 겨우 이런 일로 알렌과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아마 소공작은 지금 가주인 공작이 편치 못하셔서 현명한 판단이 어려운 걸 수도 있답니다.

그의 상대인 여인 쪽을 회유해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죠.”

황녀 중 가장 명민한 밀레나라면, 알렌의 상대인 여자 쪽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잘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기도록 하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바마마.”

황제의 얼굴에 그때야 조금 안도하는 기색이 비치었다.

밀레나는 기품 있게 드레스 끝자락을 잡고 부황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녀의 입가에 잔잔하면서도 불길한 미소가 번졌다.

* * *

다음 날 접대실에서 황제를 뵙고 나오는 알렌의 발걸음은 어제만큼 무겁지 않았다.

황제는 격노하던 어제와 달리, 상당히 차분한 모습으로 알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는 알렌에게 시간이 흘러도 네 생각이 변치 않는다면, 레오폴드 공작의 용태를 보

며 상황을 지켜보자는 완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닌 의견을 표명했다.

그것만으로도 알렌은 우선 한 발 짝 더 진전된 상황이 흡족했다.

이 정도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샤에게 돌아가 그녀가 바라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렌.”

알렌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의외의 인물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당연히 마

법사의 탑에 있어야 할 마법사 막시밀리안이었다.

“막시밀리안.”

“황성에서 널 보게 될 줄 몰랐네.”

“여기에 웬일이야?”

“나는 잠시 출장. 수도 마법 본부에 볼일이 있거든.”

막시밀리안은 우연히 황성에서 만난 친우를 반가워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알렌의 얼굴은 드물게 밝아 보였다.

평소에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알렌이었지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친분을 쌓았던 막시밀리

안은 알렌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은 볼일이 덜 끝났는데, 이따 저녁에 같이 식사라도 하겠어?”

“그러자. 안 그래도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

알렌은 막시밀리안의 저녁 식사 초대에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응했다.

두 사람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헤어졌다.

“마법석을 하나만 빨리 구해줄 수 있을까.”

“마법석? 갑자기 왜?”

“내 마법을 담을 마법석이 필요해.”

알렌과 막시밀리안은 황성을 나와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예약 없이는 들어가기 힘든 귀빈실에서 두 사람은 고급 와인을 함께 기울이며 디너 코스를

즐겼다.

“네 마법이면 보통 마법석으로는 안 될 테니, 바로 구하기 힘들지도 모르는데.”

“최대한 빨리 찾아봐 줘. 이번 주 안에.”

“이번 주? 무리야, 무리.”

막시밀리안은 손을 내저었다.

“갑자기 그게 왜 필요한데?”

“….”

“설마.”

막시밀리안의 눈이 반짝하고 떠졌다.

“저번에 마탑에 왔을 때 뺏어간 와인이랑 관련이 있냐.”

얼마 전 알렌이 마법사의 탑에 왔을 때였다. 그는 공작저에 바로 돌아가야 한다며 막시밀리

안이 애써 얻은 바스크 지방 와인 두 병 중 한 병을 들고 가버렸었다.

알렌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손에 들린 화이트 와인을 마셨지만, 그것은 무언의 긍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와, 네가 여자를….”

막시밀리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감탄하며 알렌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한 알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성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사교계에서는 물론이고 알렌이 마탑에 오면 어떻게든 그를 보려고 기웃대는 동료만 열 손가

락이 넘었지만 알렌은 늘 무심했다.

“그래서 대체 어떤 사람이야.”

“…쉽지 않아.”

알렌은 한숨을 쉬면서 와인 잔의 모서리를 톡톡 건드렸다.

처음 보는 알렌의 고뇌하는 모습에 막시밀리안은 이 상황이 재밌어서 견딜 수 없었다.

“고민되는 일이 있는 거야?”

“음….”

“나한테만 말해 봐. 친구 좋은 게 뭐야, 같이 고민해보자고.”

막시밀리안은 눈을 번뜩이며 알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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