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랑엔첸 백작 영애가 에른스트 공작가 로비에서 씩씩대며 돌아간 이후, 며칠 뒤부터 그녀는
매일같이 사샤를 찾아왔다.
소공작 집무실에서 일을 마친 사샤가 방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응접실 담당 메이드
가 그녀를 찾아와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아가씨, 백작 영애께서 아가씨를 뵙기 위해 오셨습니다.”
“…외출했다고 해주세요.”
“아가씨, 백작 영애께서….”
“아프다고 해주세요, 열이 한 60도쯤 올랐다고.”
“아가씨……, 오늘마저 만나주지 않으시면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셔요….”
그동안은 사샤가 핑계를 대면 바로 돌아갔던 백작 영애가, 오늘은 버티고 앉아서 사용인들을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네, 알겠어요.”
사샤는 난감해하는 메이드의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안 만나드린다고 했을 텐데요, 분명히.”
응접실의 소파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백작 영애는 사샤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오늘도 두 갈래로 묶은 머리를 붉은 리본으로 정성스레 장식하고, 화려한 분홍색 실
크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드디어 나오셨군요.”
“…백작 영애씩이나 되시는 분이 왜 이러시죠. 사용인들이 곤란해 하잖아요.”
사샤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떫은 목소리로 응대했다.
“분명히 소공작님 문제는 알아서 하시라고….”
“소공작님!”
백작 영애는 사샤의 말을 자르며 우물거렸다.
그녀의 표정은 처음 봤던 날처럼 호전적인 기색은 전혀 없고 오히려 수줍음 많은 소녀같이
양 볼을 붉히고 있었다.
사샤는 그 모습에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소공작님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에요.”
그리고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은 채 비장하게 외쳤다.
“당,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저를 왜요?”
“……나에게 큰소리를 친 사람, 당신이 처음이란 말이에요.”
기대와 동경이 가득한 백작 영애의 반짝이는 눈을 마주한 사샤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네?”
“알렉산드라 님.”
백작 영애는 처음으로 사샤에게 경칭을 붙여 불렀다.
“……저의 언니가 되어 주세요.”
“언니요?”
사샤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욱 일그러졌다.
“네. 언니 동생, 할 때 그 언니요.”
“싫은데요.”
사샤의 즉답에 백작 영애는 의외라는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왜요?!”
그녀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랑 교류하면 당신에게 나쁠 게 없잖아요!”
“일단 첫 번째는 귀찮고요. 두 번째는…, 당신을 만나는 게 나한테 득 될 게 없어요, 전혀
.”
지금도 사샤는 눈앞의 꼬맹이 때문에 곤란해하는 사용인들을 위해 내려온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아가씨는 저번에 말했던 대로 소공작님이나 잘 꼬셔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언니!!”
백작 영애는 다급한 손길로 뒤돌아 가려는 사샤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뭔가 필요한 건 없어요? 언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뭐든 할 테니까!”
사샤는 그녀에게 치마를 붙잡힌 채 성가신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사샤는 등을 돌
리고 엄지손가락과 검지를 둥글게 말아 백작 영애의 눈앞에 보여줬다.
“돈이요.”
“….”
백작 영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언제나 우아하고 고상한 세상에서 살아온 그녀에게 이런 속물적인 대답은 처음이었다.
“그럼 잘 가세요.”
스커트를 잡고 있던 백작 영애의 손의 힘이 스르르 풀리자, 태연히 돌아서는 사샤의 등 뒤로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마음, 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되는데, 얼마면 되는데요!”
“…얼마나.”
사샤는 처절하게 외치는 백작 영애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그녀에게 향했다.
“줄 수 있는데요?”
사샤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 * *
“아무튼 나랑 뭘 하고 싶은 건데.”
나넬의 부탁으로 사샤는 반쯤 억지로 그녀에게 말을 놓았다.
나넬은 백작 영애의 이름인 마리안네의 애칭이었다,
애칭으로 불러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보채는 바람에 사샤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나넬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냥 언니랑 자주 만나서 수다를 떨고 싶어요.”
그녀는 아까부터 양손을 턱에 괴고 반짝이는 눈으로 사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귀찮아.
안 받아주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기세라 일단 어리광을 들어줬건만 오히려 더 귀찮은 일을
만든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샤는 나넬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리고 차를 마셨다.
“아, 그러고 보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
갑자기 머릿속에 스치고 간 생각에 사샤가 나넬에게 말을 걸었다.
“네! 언니, 뭔데요?”
나넬은 그녀의 말에 신나서 꼬리를 마구 흔드는 강아지 같은 눈빛으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소공작님에 대해서 좀 알려줘.”
“알렌 님이요?”
“그분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상대할 때 곤란한 게 많거든.”
사샤는 그의 성적 취향 말고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음, 한때 제가 열중했던 분이라 다른 아가씨들보다 더 많이 알긴 하죠.”
나넬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제는 언니가 훨씬 좋아요.”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말도 덧붙였다.
“에른스트 소공작님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응.”
“서 제국의 아이돌이에요.”
“뭐라고?”
사샤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넬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흥분한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아이돌이요. 우상이죠.”
“…아이돌이라고.”
사샤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그 단어를 한 번 더 되뇌어 보았다.
물론 알렌의 껍데기만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다른 영애들처럼 외모만 보고 동경
하기에는 사샤는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가문도 서 제국에서 가장 고위 귀족인 공작가에, 아드님은 알렌 님 한 분뿐이라 다음 공작
이 되시는 것도 정해져 있고요.”
이건 사샤도 아는 사실이다.
“황실 아카데미 창립 이래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하신 유일한 분이에요.”
이건 전혀 몰랐다.
“그리고 마법 사용자이신데 그 마법이 또 굉장히 희귀해요.”
이건 진짜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실이었다.
“성격이 워낙 차갑고 냉정하셔서 제대로 소공작님과 대화를 나눠본 귀족 영애가 없을 정도예
요.”
그 찐따가?
사샤는 매번 자신을 귀찮게 불러대거나 말을 걸어오는 소공작을 생각하며 한쪽 눈을 찡그렸
다.
“황실에도 자주 인사드리러 가시고, 희귀한 마법을 지니고 계시니까 정기적으로 마탑에도 가
셔야 하고요.”
나넬은 알렌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 이야기하듯 양팔을 올리고 흥분하며 자랑했다.
“그런 것 때문에 제국 아가씨들에게는 오르지 못할 절벽 위에 핀 꽃 같은 분이시죠.”
“근데 나넬 너는…….”
가만히 나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샤는 원래 그녀에게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질문을 던졌
다.
“왜 약혼자라고 했어?”
* * *
나넬이 처음 찾아와서 난장을 피우고 간 날, 사샤는 정말 알렌 놈에게 저런 모지리 약혼녀가
있는 건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다음 날 소공작 집무실에 출근했을 때, 사샤는 칼라일에게 알렌의 정혼자에 대해 물
어봤었다.
그러자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주인님께 정혼자는 없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었는데, 나넬은 왜 나를 만날 때 알렌의 정혼자라고 한 거지.
“헤헤, 사실 저의 작은 소망이었어요.”
“뭐라고…?”
나넬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며 사샤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이 되바라진 꼬맹이는 정말 알렌이랑 아무 사이도 아닌 주제에 나뿐만 아니라 리타까지 욕한
거야?
“돌아가신 공작 부인께서 저희 아버지의 친척이셔요. 그래서 다른 영애들보다는 에른스트 공
작가와 교류가 있었어요.”
“….”
“아주 어릴 때 소공작님을 보고 반했었어요. 동화책 속 왕자님 같았거든요.”
“….”
“그런데 언니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소공작님은 언니 같은 분이 훨씬 잘 어울려요.”
“…하.”
나넬은 사샤의 표정이 점점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신나게 말을 이어갔다
.
“언니랑 알렌 님은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소설 속 주인공 같아요. 그 주인공이 신분 차이를
딛고….”
“…이.”
“이?”
“이 건방진 꼬맹이가.”
아무리 철없는 꼬마가 한 일이라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해야 한다.
사샤는 오른손 중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고 나넬의 이마 정중앙으로 향했다.
커다란 응접실 안에 따악, 하는 경쾌한 딱밤 소리가 울렸다.
“먼저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않아…? 요 정도를 모르는 꼬맹아.”
나넬은 생각지도 못한 딱밤에 울먹이면서 꼬박 30분 동안 죄송했다고, 잘못했다고, 앞으로
다시는 거짓말이나 못된 소리를 함부로 하지 않겠다고 사과하며 눈물의 반성문을 쓴 후에야
사샤에게 용서받을 수 있었다.
“언니….”
한참을 훌쩍거리던 나넬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고 나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샤를 바라보았
다.
“왜.”
“저어….”
나넬은 사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못했을 때 이렇게 혼나본 거 처음이에요.”
나넬은 랑앤첸 백작가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부모님과 형제들이 오냐오냐해
주며 자란 전형적인 귀족 영애였다.
“누구한테 이렇게 오랫동안 미안하다고 한 적도 없었어요.”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반성도 모르던 나넬의 앞에 처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알려주고 사과하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내일도 언니를 보러 와도 돼요?”
* * *
“당치도 않는 소리 마라!”
황궁 접대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황제가 공식적인 국사를 보는 알현실과 달리 접대실은 개인적으로 신하를 보거나 은밀한 독
대를 원할 때 사용하는 장소였다.
알현실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황제가 드물지 않게 방문하는 곳이기에 황제의 취향에 맞게
고상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접대실 밖에 있던 시종장과 시녀장은 노기를 띤 황제의 고함을 듣고는 긴장해서 손을 모았다
.
서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는 성난 얼굴빛을 감추지 않으며 자신의 앞에서 예를 갖추고 서
있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애초에 에른스트 공작이 결혼하겠다고 할 때부터 허락하지 말아야 했어.”
황제는 중앙 높은 곳에 위치한 옥좌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 팔걸이에 올린 그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그저 짐은 레오폴드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 윤허한 것인데.”
황제는 서 제국에서 ‘인자왕’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 평소 신하에게 공정하고 백성을 연
민하는 서 제국의 아버지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어떤 일에도 크게 분노하지 않고 너그러운 성품의 황제였지만, 그로서는 드물게 크게 화를
내며 눈앞에 있는 은발의 젊은 청년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제 너까지 짐의 속을 썩이겠다는 게냐!”
“폐하….”
알렌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얼굴에 두려움이나 경외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넌 황가의 일원이다. 짐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제가 황가의 일원입니까?”
“뭐라?”
“….”
황제는 치통으로 곤란해하는 사람마냥 한쪽 얼굴을 감싸 쥐고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댔다.
평소 신하들 앞에서 보이는 위엄 있는 모습과 달리 지금은 그저 속 썩이는 자식을 보는 피곤
에 찌든 중년 남성 같은 얼굴이었다.
요지부동으로 서 있는 알렌을 보며 황제는 이제 세상에 없는 여동생을 추념했다.
레오나…. 정말, 너와 똑같아. 저 고집 부리는 표정이. 네 아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