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공작저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뭐?”
“저 뭐든 잘해요. 청소도 요리도 빨래도 어릴 때부터 해서 능숙해요.”
“잠깐.”
그는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넌 에른스트의 사람이야. 사용인과 같은 일을 시키는 건 불가능해.”
“아, 그런가요….”
어느 정도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럼 시내에 가서 할 일을 구해도 될까요?”
사샤는 그의 반응에 수긍하며 미리 준비한 차선책을 꺼냈다.
“웬만하면 출퇴근하는 일로 찾아볼게요.”
사실 숙식이 가능한 곳이면 마음이야 더 편할 수도 있지만, 리타의 소식을 최대한 빨리 들으
려면 불편하더라도 공작저에 남아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더불어 공작저의 맛있는 식사도 그녀가 이곳을 포기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였다.
알렌은 갑작스러운 사샤의 말에 고심하는 듯했다.
그들은 말없이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따뜻한 햇살과 바람이 기분 좋게 두 사람을 감싸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요즘 업무량이 급작스럽게 늘었어.”
고민 끝에 알렌이 입을 열었다.
“보좌관도 일손이 달려서 버거워하고 있지.”
“아, 네.”
레오폴드 공작이 쓰러지자, 알렌이 공작의 대리가 되어 가주로서의 업무를 전부 맡은 상황이
었다.
“소공작 집무실에서 업무 보조를 해주는 건 어떨까.”
“그래도 되나요?”
생각지 못한 알렌의 일자리 제안에 사샤는 반색하며 되물었다.
업무 보조라면 힘쓰는 일보다야 편할 것 같고 삼시 세끼 공작저에서 밥도 먹을 수 있을 테니
좋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중요한 문제가 있다.
사샤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질문했다.
“그러면 월급은 어떻게…?”
“…정당하게 급여를 책정해주지.”
“그거 좋네요.”
“칼라일에게 말해둘게. 정확한 일정은 그를 통해 전달해주도록 할 테니까.”
알렌이 주는 돈으로 알렌에게서 도망갈 준비를 하는 건 좀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책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찌 되었든 예상외로 일이 잘 풀린 것 같아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사샤는 콧노래라도 부르려는 것 마냥 저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대었다.
‘나랑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저렇게 좋아하는 건가.’
급격하게 기분이 좋아진 사샤를 보며 알렌은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녀의 의도를 잘 알아채고 소공작 집무실에서 일하는 것을 권한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꼈
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황성에 사람을 보내 황제 알현을 요청드렸던 것이 떠올랐다.
“며칠 안에 황성에 갈 거야.”
“황성이요?”
“응, 그전까지 처리해 놓고 가야 할 일도 아주 많고.”
알렌의 얼굴은 연무장에서 훈련하던 때 이상으로 진지해 보였다.
“황성에 가면 일주일은 머물러야 하는데.”
그는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다녀오면 할 말이 있어. 기다려 주겠어?”
알렌이 제자리에 멈추자, 사샤 역시 걸음을 멈추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네, 저도 알렌 님과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알렌과 그녀 사이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앞으로는 정확하게 어떤 욕을 얼마나, 어느 강도로 해줘야 할지 정해놔야 어제처럼 그가 당
황할 일이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성적 취향이 있어서 합의하에 이런저런 플레이를 하는 변태들이 있다는 얘
기를 리타에게 들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미리 정해 놓는 약속은 목숨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려줬었
다.
알렌의 취향을 맞춰주려면 대화와 조율이 필요하다.
“사샤.”
알렌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반쯤 돌렸다. 알렌의 시선을 느낀 사샤 역시 천천히 그를
향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서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알렌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샤의 부드러운 얼굴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갖다 대자, 사샤는
왼쪽 뺨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감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
알렌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다시 입을 다물고는 손을 거두었다.
왠지 어색해진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다시 알렌이 멈췄던 걸음을 떼자, 사샤 역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알렌은 다시 연무장에 들러야 한다고 해서 두 사람은 정원에서 헤어졌다.
사샤가 로비로 들어오자, 문 앞에서 공작저의 남자 사용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께 온 초대장이 있어서 전달 드립니다.”
나에게 초대장이?
아무리 생각해도 사샤에게 초대장을 보낼 사람은 없었다.
아직 열어보진 않았지만 실링에는 가문의 상징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귀족에게서 온
편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샤는 호적만 에른스트에 들어온 것이지, 애초에 귀족도 아닐뿐더러 한 번도 사교계
에 나간 적도 없었다.
그런 자신을 누가 부른단 말인가.
방에 들어온 사샤는 고개를 갸웃하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초대장에 큼지막하게 적힌 화려한
글씨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당신을 마리안네 데어 랑앤첸 영애의 티타임에 초대합니다.]
그 아래에는 작게 랑앤첸 백작가의 주소와 티타임 날짜가 쓰여 있었다.
이게 뭐야.
사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어머, 티타임 초대라니. 이제 사교계에 지인이 생기는 건가요, 아가씨!”
안나가 그녀의 뒤에서 초대장을 흘낏 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안나 씨.”
사샤는 안나에게 초대장을 넘기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안 보이는 데에 치워줘요.”
“어째서요, 아가씨?”
“어떤 귀족 아가씨가 저한테 이런 사교 모임 초대장을 보내겠어요.”
사샤는 양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에른스트 공작님과 결혼한 평민 여자의 딸을 궁금해하는 할 일 없는 사람이나, 갑자기 에른
스트 소공작과 같이 살게 된 여자에게 질투심을 불태우는 소공작 빠순이. 둘 중 하나 아니겠
어요?
“빠, 빠순이요?”
그런 단어는 처음 들어보는 안나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커졌다.
“에른스트 소공작을 은애하는 귀족 영애란 뜻이에요.”
사샤는 원래 단어의 뜻과 상당히 달라진 의미로 순화하여 적당하게 설명해주었다.
“아무튼 어느 쪽이든 제가 가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을 테니 안 받은 거로 하는 게 좋겠어
요.”
“그, 그렇지만….”
초대장을 무시해도 될까요, 라는 안나의 걱정에 사샤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가
볍게 넘겨 버렸다.
어차피 자신은 어느 정도 돈만 모이면 에른스트 공작가를 떠날 사람이다. 괜히 귀족 영애들
과 엮여 봤자 피곤할 뿐이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동일인에게서 초대장이 계속해서 도착했다.
사샤는 그걸 번번이 안나에게 치우게 하거나 직접 버렸다.
사흘 뒤, 메이드 한 명이 곤란한 얼굴로 그녀의 방에 찾아왔다.
“저 아가씨,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군데요?”
“초대장을 보냈던 분이시라고…, 나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어요.”
사샤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알렉산드라인가요?”
사샤가 응접실을 들어가자마자 적의에 찬 목소리가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날카롭게 울렸다.
“네. 그렇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사샤가 들어와도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마리안네 데어 랑엔첸이에요.”
사샤가 그녀의 곁에 다가서자, 그때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고 매서운 눈으로 사샤를 쏘아보았
다.
“랑엔첸 백작가의 영애이자.”
백작 영애는 기세 좋게 일어나 선전포고하듯 말했다.
“에른스트 소공작님의 약혼자예요.”
그녀는 얼굴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그대로 천천히 입을 떼며 사샤 앞에 마주 섰다.
그런데.
자리에서 다 일어섰는데도 백작 영애와 사샤의 시선은 맞춰지지 않았다.
사샤가 약간 고개를 숙였더니 그제야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백작 영애는 사샤의 어깨 정도밖에 오지 않는 작은 키였다.
“…응?”
“….”
백작 영애는 자신의 시야에 사샤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고…공작가에 우환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녀는 황급히 턱을 살짝 올려 거만한 말투로 말했지만, 눈썹까지는 허세를 부리지 못해서
끊임없이 움찔거렸다.
“공작가를 어지럽히는 여인이 대체 누군지 알아야 하는 건 장차 소공작님의 반려가 될 사람
으로서 당연한 처사죠!”
백작 영애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사샤는 자신의 앞에 도도한 체하며 서 있는 백작 영애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과 젖살이 덜 빠져서 통통한 볼은 아무리 봐도 10대 중반이 될까 말까 한
앳된 얼굴이었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를 부드러운 분홍빛 실크 리본으로 양 갈래로 묶어 놓은 헤어스타일은 안
그래도 어려 보이는 얼굴을 더욱 어린애처럼 보이게 했다.
사샤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알렌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그녀를 다시 훑어보았다.
“아, 그런가요?”
사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맞은편에 앉자, 백작 영애는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않으
며 제자리에 앉았다.
메이드가 곧바로 두 사람에게 차를 내왔다.
“그래서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사샤가 방금 나온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직접 초대장을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이더군요.”
그녀는 한껏 비꼬는 미소를 지으며 한 손으로 머리카락 끝을 쓸었다.
“제 초대를 거절한다는 게 서 제국의 사교계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아무리 당신이라도 알고
계실 텐데요?”
사샤는 백작 영애 앞에서 보란 듯 입을 대충 가리고 하품했다.
당신네들의 사교계 내가 알 게 뭐야….
“아, 죄송해요. 초대장을 확인하고 깜빡 불에 태워버렸네요.”
“뭐, 뭐라고요?”
사샤가 여상한 말투로 도발하자, 당황한 백작 영애의 눈 아래가 움찔거렸다.
“요즘 날씨가 추워졌는데 덕분에 따뜻하게 잘 보냈어요.”
사샤는 일부러 백작 영애를 약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빈정대는 사샤의 말투에 그녀의 두
손이 분노로 파들파들 떨려왔다.
“……공작가에 아주 천한 여자들이 들어왔다더니 사실이었군요.”
천한 여자‘들’?
눈앞에 있는 나야 싸우자고 도발했으니 그렇다 쳐도, 또 아무 죄 없는 마르가리타까지 싸잡
혀 욕을 먹는 거야?
엄마는 나의 부끄러움도 약점도 아닌데.
귄터 부인이야 오랜 시간 에른스트에 몸담았던 사용인이니, 우리 모녀를 내키지 않아 한 것
이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꼬맹이는 대체 뭔데.
짜증이 치밀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언제 봤다고 나에게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일까.
사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자, 그 모습을 흘긋 본 백작 영애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그녀는 신나게 말을 이었다.
“술집 여자라더니 정말 천박하기 그지 없….”
쾅,
사샤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깜짝 놀란 백작 영애는 벙찐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백작 영애든, 약혼자든, 소공작이든.”
사샤의 조용하고 차가운 목소리만이 응접실을 메웠다.
“나는 관심 없으니까, 당신 약혼자 개뼈다귀는 알아서 데려가시죠.”
놀란 토끼 눈을 한 영애에게 가까이 다가간 사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한테 징징거리지 말고.”
“이, 이….”
“한 번만 더 이딴 식으로 찾아오면….”
사샤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조용히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에는 빵 위에 버터를 바르는 용도의 나이프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안 만나 드립니다.”
백작 영애의 눈길이 사샤를 따라 나이프로 천천히 향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이놈이든 저놈이든, 귀족들은 정말 귀찮기 짝이 없다.
게다가 배짱도 없어서 무슨 말만 하면 금방 자리를 떠버리기나 하고, 싸울 맛이 나질 않는다
.
‘철딱서니 없는 애를 괴롭힌 것 같잖아.’
도망치듯 가버리는 백작 영애의 조그마한 뒷모습을 보며, 사샤는 저도 모르게 씁쓸한 뒷맛을
느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