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알렌은 그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길 원한다는 의
사를 표시했다.
안나는 또 신이 나서 사샤를 정성스레 꾸며주었다. 사샤는 혼자 먹는 식사가 훨씬 편했지만,
그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알렌이 사준 드레스를 차려입은 사샤는 그와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식당에 도착했다.
“오늘은 일찍 왔군.”
하지만 알렌은 이번에도 먼저 도착해서 석간신문을 읽으며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인간은 안 바쁜가. 일은 언제 하는 거지. 사샤는 살짝 혀를 찼다.
“다녀오셨어요.”
사샤는 드레스 양쪽 끝자락을 잡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사샤의 드레스를 흘깃 보고 나서는 그녀가 앉을 자리를 권했다.
“옷이 제법 잘 어울리는군.”
“덕분입니다.”
당신이 돈지랄로 사준 드레스이니 어울려야죠. 사샤는 떨떠름하게 대꾸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그녀의 대답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읽고 있던 신문에 집중하고 있어 보였다.
사용인들이 식사를 내오고 조용한 저녁 식사가 이어지던 중, 알렌은 지금까지 꾹 다물고 있
던 입을 열었다.
“…하.”
긴장에 가득 차 밭은 숨을 흘리며 알렌은 손에 든 신문을 읽는 둥 마는 둥 초조하게 사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샤와의 저녁 시간이 점점 다가올 때부터 알렌의 심장은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한 사샤가 식당에 들어오는 순간, 그는 며칠간 무채
색처럼 잠잠했던 풍경이 갑작스레 다양한 색으로 덧입혀지는 착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샤는 그가 선물한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채 그의 앞에 섰다.
“…오늘은 일찍 왔군.”
알렌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밝은 청록색의 공단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는 단아하게 몸의 선을 따라 떨어지며 가슴과 잘록
한 허리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걸린 에메랄드 목걸이는 샹들리에의 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사샤의 금발 머리카락 역시 드레스와 어울리게 단정히 땋아 올려 한층 더 성숙함을 강조했다
.
“다녀오셨어요.”
그녀는 드레스의 양쪽 끝자락을 잡고 알렌에게 인사를 했다.
사샤가 고개를 숙이자 깊게 파인 드레스 사이로 쇄골이 알렌의 눈에 들어왔다.
“옷이 제법 잘 어울리는군.”
알렌은 들고 있던 신문으로 눈길을 다급하게 돌리고 나서야 그녀의 옷차림을 칭찬했다.
“덕분입니다,”
사샤가 자리에 앉자 메이드가 저녁 식사를 내왔다.
트러플로 향을 입힌 오리고기 스테이크와 버섯요리가 메인 디쉬였다.
그녀는 기운을 차렸는지 눈앞에 있는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알렌은 간간이 사샤를 흘끗 바라봤지만 제대로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녀와 눈이라도 마주치
면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자신을 억누르기에 급급했다.
결국 다른 이가 보기에는 두 사람은 그저 대화거리가 없어 침묵하며 식사에만 집중하는 것
같은 조용한 시간이었다.
“오늘 밤에, 시간을 내주겠어?”
메인 디쉬가 끝나고 후식으로 소르베와 따뜻한 차가 나와서야 알렌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
었다.
“할 얘기가 있어.”
사샤는 소르베를 먹던 손을 멈추고 알렌을 바라보았다.
“…네 방으로 갈 테니까.”
그는 살짝 말을 흘렸다.
“좋은 와인이 있으니 가져가지.”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사샤의 대답에서도 수줍음이 묻어났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알렌 역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힘겨워졌다.
알렌은 손끝이 떨려오는 것을 참기 위해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니 사샤를 기다리고 있던 안나가 식사는 어떠셨냐며 기대
에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냥, 식사였죠 뭐.”
사샤는 그녀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며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셨나요?”
안나는 더 묻지 않았지만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그녀의 화장을 지워주고 드레스를 갈아입혔
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도 돼요…. 그, 그리고.”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난 사샤는 잠시 머뭇거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와인 잔을 두 잔 준비해줄래요?”
“아가씨….”
안나의 감동 받은 표정이 부담스러웠다.
사샤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무안함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사샤는 안나를 일찍 돌려보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녀에게도 조금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몇 시간 뒤, 사샤는 규칙적으로 울리는 노크 소리에 잠이 깼다.
알렌을 기다리다가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사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알렌을 맞이
했다.
알렌은 처음으로 사샤의 방을 노크하고 들어 왔다. 그 역시 편해 보이는 얇은 흰 셔츠와 바
지를 입고 한 손에는 와인 병을 들고 있었다.
알렌은 사샤가 이끄는 대로 말없이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에 앉은 그의 뺨은 살짝 붉게 물
들어 있었다.
“방이 더운가요?”
알렌의 얼굴을 본 사샤는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평소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같긴 했다. 안나가 켜놓고 간 향초 몇 개가 흔들리며 은
은한 향기를 공중으로 내어 보내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그녀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알렌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잠겨 있었다.
알렌은 목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어 사샤를 보았다.
그녀는 편한 옷에 하늘거리는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원래 이 방에서 이렇게 달콤한 향이 풍겼던가. 알렌의 머릿속이 아찔했다.
사샤가 와인 잔을 들어 그의 앞에 놓자, 알렌이 익숙한 손길로 와인 병을 따서 잔에 따랐다
.
검붉은 와인이 병 입구를 따라 잔 위로 가느다란 실처럼 흘러내렸다.
“귄터 부인은 오늘 자로 사직서를 제출했어.”
“아….”
“오랫동안 우리 가문을 위해 일했지만 선을 넘었지.”
소공작은 이번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걸까.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는데.
사샤가 고민하는 동안 그는 와인 잔을 들어 능숙한 솜씨로 잔을 흔들었다.
붉은 루비 같은 와인이 와인 잔에서 찰랑거렸다.
알렌은 눈짓으로 사샤도 와인 잔을 들게 했고 두 사람은 어색하게 와인 잔을 부딪쳤다.
“마탑에 다녀온 건.”
와인을 한 모금 마신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법사의 탑에 마차 사고의 조사를 의뢰했기 때문이었어.”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사샤는 순간 와인 잔을 놓칠 뻔했다.
“그래서요?”
사샤는 황급하게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알렌의 대답을 재촉했다.
“마탑은 마차 사고에 고의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하.”
“그리고.”
알렌은 숨을 삼켰다.
차마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치사랑의 혈흔에 대해서까지는 말하기 힘들었다.
아직 마르가리타의 시신을 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혈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사샤가
받을 충격만 커질 것 같았다.
어제까지 크게 앓았던 그녀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안기고 싶지 않았다.
“네 어머니는…, 공작가의 사람들과 현지의 치안대가 계속 찾고 있는 중이다.”
사샤는 자신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힘을 줘서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알렌은 마차 사고를 조사하기 위해 마탑에 갔다.
그녀는 여덟 번의 죽음 끝에야 드디어 그의 입에서 마차 사고가 그녀와 어머니와는 무관하다
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리타, 드디어 우리가 결백하다고 인정받았어.
처음으로 저 소공작 놈이 우리의 잘못이 없다고 했어.
마르가리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시야가 흐려지며 눈물이 고였다.
사샤는 놈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입안을 세게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그래요.”
짧은 시간 침묵이 흐르고, 사샤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간신히 입을 열
었다.
알렌은 그녀가 마음을 안정시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한결 차분해진 사샤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알렌은 조금 쓸쓸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구름이 걷히고 창밖으로 들어온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알렌의 머리카락에 눈길이 갔다.
그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앞머리를 내려서 평소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는 사샤는 알렌의 다정한 태도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를 증오한다.
하지만 지금의 알렌은 이전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직접 몸을 움직여 마탑에서 사건의 진상을 알아 오고, 사용인 앞에서 우리 모녀를 옹호했다.
그가 원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고마운 일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답해야 한다.
심지어 자신은 알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
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응?”
알렌은 그녀에게 놀라울 만큼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순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사샤는 마음속 한구석
이 찝찝했다.
아무리 알렌이 원한다고 해도 웃는 낯에 침 뱉는 것은 그녀로서도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소공작님….”
사샤는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달싹였다.
막상 이런 훈훈한 분위기와 상반되는 말을 꺼내려고 하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소공작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아, 그러면.”
“이름이라든지.”
그는 한 손을 들고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알렌 님.”
사샤는 조금 고민하다 그의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처음으로 사샤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알렌의 목덜미가 단숨에 달아올랐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대로 사샤의 가냘픈 허리를 감싸 안고 밤새 귓가에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며, 그녀의 입술
과 새하얀 목에…….
아니, 이래서는 안 돼. 사샤가 먼저 용기를 내서 다가오려고 하고 있잖아, 기다려야 한다.
알렌은 비집고 올라오는 욕구를 참으며 숨을 삼키고, 다시 사샤를 바라보았다.
“저, 정말….”
사샤의 시선이 알렌과 마주쳤다.
그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멈춘 듯 숨 막히는 공기가 흐르고, 사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사샤의 얼굴은 사랑 고백을 하는 아가씨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맙습니다이새끼야.”
“….”
“….”
숨도 쉬지 않은 채 단번에 뱉어낸 사샤는 길어지는 침묵에 살짝 눈을 올려 떴다.
알렌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장난감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있던 그는 잠시 후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라고?”
“고맙습니다, 이 새끼야….”
사샤는 말끝을 흐리면서 다시 한번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줬다.
“역시, 이걸로는 부족하죠?”
“아, 아니 잠깐.”
“훨씬 많이 준비했는데 저도 아직 낯짝이 덜 두꺼운지 좀 쑥스럽네요.”
사샤는 수줍어하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번 더 세게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