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가씨, 왜 이렇게 잘 못 드세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침 식사를 가지고 온 안나는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를 걱정스레 바라보
았다.
사샤의 얼굴은 어제에 비해 눈에 띄게 안색이 나빴다.
“입맛이 별로 없어서요….”
그녀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 안나는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안나가 시중을 든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언제나 접시를 씻은 것처럼 깨끗이 먹어 치우던
사샤였다.
그녀가 이렇게 음식을 깨작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가씨, 혹시 어디가 편찮으신 건 아닌가요?”
걱정스러운 안나의 얼굴에 사샤는 크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어제 좀 못 자서 그래요.”
“약을 준비하거나 주치의를 부를까요?”
“괜찮아요. 조금 더 누워있을게요.”
“하지만 아가씨….”
안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마담 모슬린이 방문하기로 한 날이라서요.”
* * *
서 제국에서 가장 예약이 힘든 드레스 샵의 주인. 만들어 내는 디자인마다 유행 그 자체가
되는 유능한 디자이너.
그녀를 초대하려면 최소 몇 달 전부터 기다려야 한다는 그 마담 모슬린은 우아한 걸음으로
공작저에 들어왔다.
그녀가 입은 보기 드문 색감의 짙푸른 드레스는 활동하기 편해 보이면서도 움직일 때마다 몇
겹의 천이 화려하게 흔들렸다.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마담 모슬린의 얼굴에서는 세월이 느껴졌지만, 그마저도 기품 있어
보였다.
“마담 모슬린, 이쪽으로 오시죠.”
약속한 시각에 맞춰 기다리고 있던 칼라일 에이든이 공작저의 로비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마담 모슬린은 고상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 기울여 인사했다.
칼라일은 마담 모슬린을 에스코트하여 사샤의 방으로 안내했다.
“아가씨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샤의 방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메이드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며 그들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방 한가운데 앉아 있던 곱슬거리는 금발을 늘어트린 여인이 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려 인사를
했다.
눈에 띄게 새하얀 피부와 이목구비는 서 제국의 귀족 아가씨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깊은 갈색 눈과 도톰하고 붉은 입술이 한숨 나오도록 아름다운, 보기 드문 미녀였다.
에른스트의 젊은 소공작이 허둥지둥 자신을 찾은 이유가 있구나, 마담 모슬린은 빙긋이 웃음
을 띠었다.
“마담 모슬린이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라… 폰 에른스트입니다.”
그녀는 어색하게 성을 붙이며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기운 없어 보이는 목소리와 창백한 얼굴빛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지만, 그런 모습마저
도 가련함이 돋보여 아름답게 느껴졌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네, 저도요.”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자, 곧 마담 모슬린을 보조하는 젊은 직원 두 명이 두꺼운 카탈로그와
묵직한 가방을 들고 사샤의 방에 들어왔다.
“그럼 전 나가보겠습니다. 아가씨,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마담과 이야기 나누시고 원하는 대
로 고르시면 됩니다.”
칼라일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먼저 사이즈를 재겠습니다.”
직원들은 사샤에게 다가와 능숙한 솜씨로 그녀의 몸에 줄자를 갖다 대었다.
한 명이 그녀의 사이즈를 재면 다른 한 명이 기록하면서 정확하게 호흡을 맞췄다.
“마담, 다 되었습니다,”
“고생했어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슬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들은 사샤에게 다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후 방에서 나갔다.
“원하시는 디자인은 이걸 보시면서 부담 없이 말씀해주세요.”
마담은 직원이 테이블 위에 놓고 간 카탈로그를 사샤 앞에 펼쳤다.
카탈로그에는 제국에서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부터 오랜 시간 귀족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형태
의 복식까지 몇십 개가 넘는 다양한 디자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는.”
사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뭐가 좋은지 잘 알지 못합니다.”
사샤의 맥없는 말에 마담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마담께서 추천하시는 드레스로 한 두 벌 정도 고를게요.”
“알렉산드라 아가씨는.”
사샤가 고개를 들어 마담을 바라보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마담은 고상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나갔다.
“어떤 색을 좋아하세요?”
“색이요?”
마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사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로 그런 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사샤는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들으셨겠지만 전 출신이 그래서….”
“그래도 분명히 좋아하는 색은 있을 거예요.”
마담은 그녀에게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처 입은 소동물 같은 표정을 짓는 사샤가 마담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이런 말을 드리는 게 결례일지도 모르지만.”
마담 모슬린은 펼쳐 놨던 카탈로그를 덮고 나서 사샤와 다시 눈을 맞췄다.
“저는 이 일을 시작하고 20년간 정말 많은 고객을 뵈었죠.”
“…네.”
“제가 뵙는 대부분의 고객은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마담의 말에 사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상당히 실력 있고 비싼 재단사거든요. 절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남편에게 사랑받는다는
증거이죠.”
“물론 저를 만날 일이 많으셔서 익숙한 표정을 하시는 분도 계셨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선물로 무마하려고 절 부른 경우도 있었죠. 아닌 척하고 계시지만 그
런 분들의 얼굴빛에는 억눌려 있는 슬픔이나 억울함이 전부 드러납니다.”
마담 모슬린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표정만큼은 몹시 진중했다.
어느새 사샤 역시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제가 본 어느 분들의 표정과도 같지 않네요.”
“….”
“아무것도 관심 없는, 뭘 걸쳐도 당신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마담은 잠시 사샤의 새 가구 냄새가 아직 덜 빠진, 화려한 방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고개
를 돌려 사샤를 보았다.
“당신 같은 미인은 쉽게 볼 수 없어요. 저 역시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아름다운 것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그녀는 사샤에게 강조하듯 힘을 줘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당신이 행복하셨으면 좋겠네요.”
마담 모슬린이 돌아간 후 사샤는 안나가 가져온 저녁 식사도 먹지 않은 채 전부 물리고 테라
스 난간에 몸을 기댔다.
하루 종일 머리가 너무 아프고 몸이 무거웠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보름달이 흐릿하게 비추고 을씨년스러운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사샤는 우두커니 선 채로 마담 모슬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 당신께서 행복하셨으면 좋겠네요.
행복…?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의 기억 때문에 언제나 이질감을 느끼고 살아왔다.
단 한 사람 의지했던 어머니는 행방불명되고, 어머니의 남편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의붓오빠라는 놈은 날 여덟 번이나 죽였는데도, 나는 그가 이렇게 한 번 목숨 줄을 연명시켜
줬다고 안심한 채로 헤헤대고 있다.
뭐 하나 내 것 같지 않은 이곳에서 아득바득 오늘 하루도 죽지 않고 버텼구나, 하며 잠드는
내가 행복을?
어머니가 더럽다고, 마녀라고 욕을 먹는데도 제대로 된 앙갚음도 할 수 없는 내가, 행복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얼음판을 조마조마하게 걸어가고 있는 내가……?
사샤는 입술을 깨물며 몸을 감싸 안았다.
어찌나 입술을 세게 깨물었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어….”
사샤는 또다시, 이제는 지긋지긋한 살아 있음을 느끼며 눈을 감아 버렸다.
* * *
“주인님 다녀오셨습니까.”
알렌이 마탑을 떠난 지 사흘 만에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게이트를 타고 와서 훨씬 빠르게 공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작께서는?”
칼라일과 사용인들이 나와 소공작을 맞이하자 알렌은 바로 레오폴드 공작의 용태를 물었다.
“다른 점은 없으십니다.”
“뵈러 가야겠어.”
게이트를 타고 왔기 때문에 마탑에 갈 때처럼 흙먼지를 뒤집어쓴 차림이 아닌 깔끔한 모습이
었다.
알렌은 칼라일과 함께 레오폴드 공작이 요양하고 있는 3층의 침실로 올라갔다.
“소공작님께 인사드립니다.”
공작의 간병을 맡고 있던 사용인이 알렌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허리를 숙였다.
“고생이 많군.”
알렌은 들어오자마자 공작의 머리맡으로 다가가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공작님과 독대하고 싶으니 자리를 비켜줄 수 있을까.”
“네, 알겠습니다.”
칼라일과 사용인이 방문을 닫고 나간 후, 알렌은 공작이 누워있는 침대 옆 작은 의자에 걸터
앉았다.
레오폴드 공작의 옆에 앉자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불규칙적으로 내쉬는 숨은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미약했고, 상반신 전체에는 단
단히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알렌은 공작을 바라보며 마탑에서의 보고를 떠올렸다.
- 레오폴드 폰 에른스트 공작과 관련한 마차 사고의 감식 결과를 보고 드립니다.
마차에는 보호 마법 외에는 어떤 마법도 걸려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알렌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샤의 어머니는 어디 있습니까.”
알렌은 공작을 바라보며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했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알렌은 주먹을 꽉 쥐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제발 일어나서 말씀을 해주세요.”
어느새 그의 이마는 잠들어 있는 공작의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게 가라앉았다.
평소에는 단정하게 쓸어 올려 있던 알렌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공작의 왼팔 위에
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녀를 믿어도 되는 거지요?”
그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