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새로운 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책이라도 읽을까 싶어 공작저의 도서관에
가려고 방을 나왔을 때, 사샤는 그녀를 향하는 이상한 시선들을 눈치챘다.
멀리서 메이드 몇 명이 그녀를 보며 자기들끼리 속닥대더니 사샤가 가까이 다가오자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그다음 날에도, 복도에서도, 잠깐 내려간 식당에서도, 안나와 산책을 하러 정원으로 나갔을
때도 비슷한 시선이 느껴졌다.
“안나 씨, 혹시.”
“네, 아가씨.”
“이상한 분위기 느껴지지 않아요? 좀 나에게….”
적의를 갖고 있는 그런.
“사실은, 아가씨.”
안나가 곤란한 표정으로 웅얼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머뭇거리던 안나는 손을 저으며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사샤는 바로 그녀의 양손을 잡
으며 시선을 맞췄다.
“괜찮으니까 말해줘요.”
“저도 듣기만 한 얘기라 잘은 모르는데….”
사샤는 이윽고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말하는 안나의 이야기에 눈을 조금씩 크게 떴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샤와 안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안나는 자신이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다는 사실에 송구스러워했고, 사샤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직접 듣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자신이 공작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고, 원래 주인이 아닌 사샤에게 사
용인들이 충성을 바칠 이유도 없다.
유흥가에 살던 리타와 사샤를 사용인들이 무시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사샤에게 호의를 갖고 진심으로 아가씨 대우를 해주는 안나의 경우가 오히려 특이했다.
괜한 소리를 한 건가 자책하고 있을 게 뻔한 안나를 바라보며 사샤는 언젠가 그녀에게 고마
움을 꼭 표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알렉산드라 씨.”
두 사람이 저택 현관 앞에서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처음 보는 중년의 여인이 사샤의 앞
을 막아섰다.
여인은 좁은 미간과 뾰족한 매부리코의 소유자로 매우 마른 몸매에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할 말이 있는데 따라오시죠.”
여인은 사샤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명령조로 요구한 뒤, 몸을 돌려 저택의 뒤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가씨….”
“안나 씨,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아, 네,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용인 중에 가장 오래된….”
“안 따라오시고 뭐 하죠?”
안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서 나가던 여인이 등을 돌려 날 선 눈으로 두 사람을 째려보
았다.
사샤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안나에게 눈인사를 한 뒤 별수 없이 여인의 뒤를 쫓아갔다.
그녀가 사샤를 데리고 간 곳은 공작가 저택 본관 뒤 건물에 있는 사용인들이 쓰는 휴게실이
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공작님께서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신 지 열흘이 넘었습니다.”
여인은 사샤의 말 따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그녀를 무시하고,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어조
로 자신이 할 말을 다짜고짜 시작했다.
“그 사이 소공작님은 알렉산드라 당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행동하시고 있고.”
테이블 앞에 앉으며 경칭을 생략한 사샤의 이름을 씹듯이 내뱉는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게다가 이젠 아예 소공작 부인 방으로 예정되어 있던 곳을….”
여인은 말끝을 흐리며 이를 갈았다.
“공작님이 당신의 어머니와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실 때부터 수상했습니다.”
“….”
“결국 공작님께서는 이렇게 성치 못하신 옥체로 돌아오셨죠.”
사샤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언제 다시 일어나실지 알 수 없는데 이젠 소공작님까지 당신 같은 여자에게 현
혹됐어요.”
중년의 여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과 마르가리타가 마녀 같은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말 대단한 수법이군요
.”
“…아니.”
정상적인 대화가 아니었다. 눈앞의 여인은 사샤가 뭐라고 반응하든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녀
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았다.
“공작님에 이어 소공작님까지.”
리타의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곤란해 보이던 사샤의 표정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오랫동안 이 가문을 지킨 저로서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여인은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혐오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힐난했다.
“저뿐 아니라 에른스트 공작가의 사용인이 모두 같은 생각을 품고 있죠.”
“…모든 사용인들이요?”
“그래요.”
여인은 자신만만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소공작님이 돌아오시면 사용인이 모두 모여 당신을 규탄하는 안을 올릴 겁니다. 제국의 치
안대에도 공작님의 사고를 정식으로 조사 요청하겠습니다.”
“….”
“그리고 종교 재판소에도.”
종교 재판소라는 말에 마녀사냥으로 몰려 죽었던 전생이 스쳐 지나갔다.
- 소공작님 말씀대로 저 여자는 마녀가 분명합니다.
- 마녀 알렉산드라를 에른스트 공작 시해 모의 죄로 처형한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끔찍한 미래가 두렵다면 소공작께서 자리를 비우셨을 때가 기회입니다.”
종교 재판소라는 말에 사샤가 완전히 겁을 먹은 것으로 보였는지 여인은 한층 만족스러운 미
소를 띠었다.
“난 너와 네 어머니 같은 족속을 잘 알고 있어. 그래봤자 소공작님의 관심도 잠시일 뿐이야
. 그분이 너 같은 천한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할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누가 누굴 사랑한다는 거고 누가 뭘 착각한다는 걸까.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건 저 여인 쪽
이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 머릿속에서 그날의 축축한 지하 감옥이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사샤를 바라보며 여인은 공작가에 대한 걱정을 핑계로 약자를
짓누르는 희열을 느꼈다.
“공작가에서 썩 꺼져, 더러운 계집.”
여인은 완전히 이긴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사샤에게 손가락질했다.
여인의 일갈에 오히려 정신을 차린 사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 왠지 익숙했다.
사샤의 머릿속에 너무나 익숙한, 이곳과 다른 세계에서 크게 유행한 막장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졌다.
재벌인 남자 어머니가 남자의 애인을 찾아와서 우리 아들과 그만 만나라고 협박하는 장면 그
자체 아닌가.
하지만 나는 놈의 연인이 아니고, 저 사람은 알렌의 어머니가 아니다.
근데도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아니, 그것보다.
막장 드라마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걸 안 가져왔잖아, 당신.
사샤는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흠, 옳은 말씀이네요.”
사샤는 팔짱을 끼고 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신이 납득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응?”
“옳은 말씀이라고요.”
여인은 사샤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사샤는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얼굴을 기울였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난 레오폴드 공작님의 의붓딸입니다.”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자신을 가리키며 사샤는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호적에도 이미 올라와서 에른스트의 성을 받았죠.”
“….”
“당신은 대체 누군데 에른스트 공작가의 딸에게 통성명도 생략한 채 말한단 말입니까.”
“…저는 구드룬 귄터입니다.”
그제야 중년의 여자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에른스트 공작가에서 가장 오래 일한 사용인 중 한 명입니다.”
“네, 귄터 부인.”
“소공작께서 아주 어릴 때부터 공작님과 소공작님을 모셨습니다.”
사샤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당당하게 눈을 맞췄다.
“당신께… 이런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사용인들을 대표하여 말하는 겁니다.”
귄터 부인의 목소리는 이미 사샤의 기세에 눌려 한풀 꺾여 있었다.
“그래요.”
사샤는 일부러 그녀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전 당신 말대로 천한 출신에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잘 알고 있군요?”
“그런 주제에 소공작께서 저에게 과분한 대우를 해주시는 것도 인정하죠.”
자리에서 아예 일어난 사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소공작께서 주신 것들, 어차피 제 것 하나 없습니다. 전부 공작가에 귀속되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녀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알렌이 사준 새 옷이 아닌, 공작가에 올 때 가져온 원피스 그
대로였다.
“당신 말대로 이렇게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제가 공작가를 나가고 싶어도 어찌 나가겠습니까
.”
“당신 하고 싶은 말이 대체…!”
“그런데 말이죠,”
일부러 뜸을 들이며 한숨 고른 후 사샤는 입을 열었다.
“제가 부인께 성의를 보이려면, 부인도 제게 성의를 보여 주셔야죠.”
사샤는 그녀의 눈앞에 오른손을 가까이 가져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삼천. 삼천 크마르만 준비해주세요. 저처럼 공작가의 물건 하나 건드리지 말고 순수하게 당
신이 마련해서요.”
삼천 크마르면 시골 영지에 그럴듯한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다.
“뭐라고요?!”
그녀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아, 공작가에서 일하는 분들은 당신과 뜻이 같다고 하셨죠.”
사샤는 그녀의 날 선 반응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분들과 저에 대한 고약한 소문도 흘리고 다니는 거고요.”
“하…!”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그들과 힘을 합쳐도 좋습니다.”
사샤는 다시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천 크마르를 혼자서 내기에 부담스러우시면 당신들 모두 함께 힘을 합쳐서 모아보세요.”
어느새 대화의 주도권은 완전히 사샤가 잡고 있었다.
“일주일 드리면 될까요?”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어!”
권터 부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마른 몸이 눈에 보일 만큼 부들부들 떨렸다.
“당신 제 말이 장난으로 들리나요?!”
“장난으로 들리냐고요?”
그녀의 날 선 외침에도 사샤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뇨, 전혀. 조금도.”
사샤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전 이곳에 와서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진심이었
습니다.”
“윽….”
“그러니까 어설프게 협박질 하지 말고 나처럼,”
그녀의 귓가에 싸늘하게 속삭였다.
“당신의 진심을 갖고 와서 보여.”
* * *
마탑 3층에 있는 사고 조사 부서에 알렌이 들어서자 시끌시끌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고요해졌
다.
“알렌님.”
사고 조사 부서장인 중년의 남성이 직접 나와 그를 맞이했다. 알렌은 마탑에서도 중요 인물
이었다.
서 제국의 황족이나 고위 귀족 중에 흔치 않은 마법 사용자라는 점도 그러했지만, 그보다 그
가 지닌 마법이 몹시 희소하고 지속적으로 연구가 되어야 하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잘 지내셨습니까.”
알렌 역시 그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마탑에서는 원래 신분과 관계없이 서로를 대등한 관계로 대우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격조했습니다.”
“우환이 어서 해결되셨으면 좋겠군요. 우선 마탑에서의 조사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네.”
“이쪽으로 오시죠.”
세 사람은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부서장실로 함께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