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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쌍욕 했는데 왜 집착하세요-8화 (8/101)

8.

-    마탑에서 마차 사고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알렌은 아직 사샤에 대한 마음을 참아야 했다.

아버지의 신변에 위해를 끼친 마차 사고의 조사 결과를 보고 받는 것이 먼저였다.

정부가 귀족 남성을 죽게 만들거나, 젊은 부인이 늙은 남편을 사고사나 병사로 위장해 죽이

는 사건은 제국에서도 적지 않았다.

마르가리타가 행방불명된 상태였지만 공작의 귀중품이 들었던 가방도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

다.

그 안에 들어있던 보석과 공작의 소지품은 평민이 족히 10년은 먹고살 수 있는 정도로 귀중

한 것들이었다.

마차 사고가 정말 마르가리타와 관련이 있다면, 그녀의 딸인 사샤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반드시 합당한 벌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그녀가 무관하다면, 사샤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면….

알렌은 몸의 떨림을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파고드는 통증이 느껴져도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마탑에 결과가 나와 있다.

알렌은 조사 결과를 지금 당장 눈앞에서 보고 싶기도 했고, 평생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알렉산드라님과 식사하고 오셨습니까.”

“응. 너도 슬슬 퇴근해. 나머지는 내가 정리하지.”

집무실에서 알렌을 기다리고 있던 칼라일이 그를 맞이했다.

알렌은 목에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서 소파에 던지고 셔츠 단추를 두세 개 풀었다.

“말씀해두신 알렉산드라님의 건은 다 처리해 두었습니다.”

“고생했군.”

“내일부터 인부들과 물건이 들어오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칼라일은 모노클의 위치를 다시 조정하며 말을 이었다.

“마탑에는 언제 출발하십니까,”

알렌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책상 앞에는 마탑에 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공작 대리 업무 서

류가 쌓여 있었다.

“새벽에.”

“왜 굳이 새벽에 가시려는 겁니까?”

칼라일은 눈썹을 조금 찌푸리며 물었다.

알렌은 한동안 소홀히 했던 업무에 다시 집중해서 빠른 속도로 밀린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눈앞에 잔뜩 쌓여 있는 서류도 알렌이라면 몇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당장 새벽에 마탑으로 출발한다는 건, 휴식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안 그래도 빠듯한

일과에 시달리는 소공작이다. 보좌관인 칼라일에게는 마뜩찮은 소리였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조급하게 만드는 건지.

“게이트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만.”

“말로 간다. 며칠 걸릴 거라서 오늘 남은 업무도 전부 처리하고 갈 거야.”

“….”

“이미 말은 준비해놨으니 너도 나올 필요 없어.”

“그래도.”

“요즘 고생한 거 알고 있다. 급한 일은 대부분 마무리되었으니 너도 조금 쉬도록 해.”

알렌은 서류를 펼쳤다.

칼라일이 염려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알렌은 이미 사샤를 만나기 전, 일에만 몰두하던

소공작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칼라일은 잠시 그의 주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지 않아 그는 인사를 하고 소공작 집무

실을 나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잠자리에 들려던 사샤의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인사와는 달리 그다지 죄송하지 않은 얼굴을 한 칼라일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다름 아니라,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

“소공작님께서 내일 출발하시는 시간이 방금 결정됐습니다.”

“마탑인가, 에 가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칼라일이 말한 시간은 겨우 몇 시간 뒤였다.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에 가까운 시간대였다.

“알렉산드라님께서 주인님의 배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요……?”

사샤가 대놓고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며 일부러 말을 길게 끌어 보았지만, 칼라일은 자신의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가 왜요? 라고 물어보려 해도 이건 거의 부탁을 가장한 통보 아닌가. 거절은 받지 않을

게 뻔했다.

사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알겠습니다아.”

어쨌든 배웅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니 실랑이를 하며 시간을 끌 바엔 차라리 이 남자를 빨

리 돌려보내는 편이 나았다.

칼라일은 늦은 시간에 실례를 범한 것을 사과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았다.

* * *

남아 있던 서류를 전부 정리하고 외출 준비를 끝낸 알렌이 마탑으로 출발하려 할 때, 계단에

서 누군가 일 층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네가 웬일이지.”

아직 날도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알렌은 출발할 준비를 마친 채 얼굴을 반쯤 가리는 외투를 입고, 한 손에는 말을 몰기 위한

채찍을 들고 있었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사람이 사샤라는 것을 깨닫고 놀란 알렌의 눈이 커졌다.

“배웅해 드리려고요.”

사샤는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지금 가는 걸 어떻게 알고….”

“에이든 씨가 알려주셨어요.”

사실 그 양반이 시킨 거지만요, 라는 말을 삼키며 사샤는 덜 떠진 눈을 비볐다.

요란스럽게 인사를 받지 않고 다녀올 생각으로 칼라일에게만 말했는데, 그가 사샤에게 전달

한 듯했다.

괜한 짓을 한 칼라일 때문에 민망하면서도 예상치 못했을 때 나타난 사샤의 모습에 잔잔하던

물가에 돌이 던져진 것처럼 마음이 동요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잠옷에 가운을 걸치고 나온, 이제 막 잠에서 깬 자연스러운 차림으로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

는 그녀를 보는 알렌의 심장이 날뛰었다.

사샤의 이런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 무의식중에 떠오른 생각에 알렌은 스스로 놀랐다.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모습을 매일 보고 싶고, 다녀오라는 인사를 매일 듣고 싶다고.

그는 천천히 사샤에게 다가가서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쓸어내린 뒤 손끝에 잡히는 그녀의 갈색에 가까운 금빛의 머리카

락을 들어 올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 사샤의 머리카락만이 옅게 반짝였다.

“다녀올게.”

알렌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잠시 갖다 대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문을 열고 정원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서 있는 말을 타고 공작가를 빠져나갔다.

* * *

알렌은 달리는 말의 고삐를 좀 더 죄었다.

마법사의 탑, 마탑은 서 제국과 동 제국의 국경에 있었다.

그곳만큼은 양 제국이 미치는 영향이 매우 미미한, 순수한 마법사들만의 영역이었다.

동, 서 제국이 서로의 운명을 놓고 전쟁을 하던 시절, 마탑의 마법사들 역시 양쪽으로 나뉘

어 각자의 제국을 지원하며 많은 희생자가 나오는 피해를 입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길고 긴 반목 끝에 동과 서 제국의 황제가 종전선언서에 서명을 선

언한 이래로, 마탑 역시 완전한 중립을 선언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고하게 다졌다.

마탑의 최고 권위자인 현자는 제국의 황제만큼은 아니어도 마탑 내에서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

그래서 마탑 소속 마법사는 동서 제국의 제국민이라기보다는 마법사의 탑 소속 마법사로서의

정체성이 훨씬 강했다.

지금의 마법사의 탑에서는 마법에 대한 연구는 물론, 마수를 토벌하는 원정대의 지원이나 동

서 제국 소속 마법성에서 해결되지 않는 일 또는 중립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건에서 고문 등

을 담당하고 있다.

레오폴드 폰 에른스트 공작이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마차 사고 역시 칼라일 에이든이 제국의

마법성과 마법사의 탑에 동시에 의뢰했다.

양쪽에 교차 점검을 받으라는 소공작의 지시였다.

그리고 마법사의 탑에서 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을 받고 알렌이 직접 말을 몰아 가고 있

는 것이다.

게이트를 열면 순식간에 도착할 마법사의 탑을 말을 타고 가는 것은 순전히 알렌의 고집이었

다.

마탑까지 혼자 가는 동안 그는 머릿속으로 정리를 할 작정이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공작가에서는 사샤에 대한 충동을 간신히 절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냉정을 되찾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될 시간이 필요했다.

“막시밀리안.”

“알렌,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알렌이 꼬박 이틀이 걸려 마탑에 도착하자, 응접실에서 긴 흑발을 하나로 묶고 베이지색 마

법사용 로브를 입은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사의 탑 소속 마법사 막시밀리안은 서 제국 남작가의 아들이었지만 어렸을 때 마법 사용

자임을 각성하고 이곳에 들어왔다.

정기적으로 마법사의 탑에 방문하는 알렌과는 일찍이 알고 지낸 사이이기도 했다.

“공작님은 여전하시지?”

“…그래.”

“어서 깨어나셔야 할 텐데….”

막시밀리안은 유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알렌 역시 지친 안색에 그늘이 드리

워졌다.

“아무튼 이번에 왔으니 일주일은 있다가 갈 거지?”

“아냐, 바로 가봐야 해.”

“그래? 이번에 동 제국 바스크 지방에서 기가 막히는 와인을 얻어왔는데.”

막시밀리안은 오랜만에 만난 친우와 회포에 젖을 기대가 깨져 못내 아쉬워했다.

“조사 결과는 어떻게 되지?”

“급하기는. 같이 사고 조사 부서로 가자.”

막시밀리안은 알렌과 함께 마탑 3층으로 향했다.

* * *

소공작이 마탑으로 떠나고 다시 잠이 든 사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피곤한데…. 그녀는 못 들은 척 몇 번 침대 안에서 다시 잠들려고 노력했지만 버틸 수 있는

소음이 아니었다.

결국 포기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안나가 아침 식사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네에….”

사샤는 두 눈을 비비며 부스스한 몰골로 힘없이 대답했다.

“얼른 일어나셔요, 아가씨! 문밖에 나가보셔야 해요.”

안나는 상기된 목소리로 빠르게 테이블에 아침을 차리며 그녀를 재촉했다.

“무슨 일인데요?”

“가보시면 알아요, 어서 식사부터.”

안나는 버터를 듬뿍 바른 빵을 내밀며 눈을 빛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지….”

사샤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빵을 우물대며 억지로 목에 넘겼다.

방을 나와 복도로 나가니 셀 수 없이 많은 상자와 짐이 복도에 쌓여 있었다. 복도 끝부터

계단을 따라 아래층 현관까지 이어졌다.

“내일부터 아가씨 방을 옮길 거래요.”

안나는 사샤를 이끌고 복도 끝으로 갔다.

복도 중앙의 소공작의 침실을 지나쳐 걸음을 멈춘 곳이 소란스러운 소리의 진원지였다.

수많은 짐은 전부 이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놓여 있었다.

인부들이 가구를 방 안으로 옮기고 메이드 여러 명이 옆에서 빠르게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아가씨의 새로운 방입니다.”

“아, 에이든 씨.”

언제 왔는지 사샤의 뒤에서 소공작의 비서 칼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옆에는 작은 서재를 중간에 끼고 소공작님의 방이 있죠.”

칼라일은 사샤에게만 들리는 낮은 목소리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덧붙였다.

그녀가 새로 옮길 방은 원래 있던 곳보다 두 배는 넓었다.

실내 장식이나 가구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으리으리했다.

최소한의 필요한 가구만 놓여 있어 휑했던 예전의 방과는 딴판이었다.

부드러운 질감의 캐노피가 하늘하늘 떨어지는 침대 위에 앉자 푹신한 매트리스가 몸을 감아

왔다.

고개를 돌려 복잡한 장식으로 이루어진 테이블을 보니 며칠 전 알렌이 준 꽃이 여전히 놓여

있었다.

꽃은 아직 피어있지만 대부분이 시들어 가는 중이었다.

“휴….”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과 꽃을 보자 사샤의 마음은 더욱 불편해졌다.

물론 소공작 놈을 털어먹으리라 다짐했었지만 그녀는 뼛속까지 소시민이었다.

실제로 눈앞에 그의 호의가 실현되니 기쁜 마음보다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알렌은 도대체 나에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쌍욕을 기대하고 있는 거지. 사샤는 머리가 지끈거

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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