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그 여자들이 우리 공작가를 삼키려고 하고 있는 거야.
그의 인생 최초로 상사병 때문에 앓아누웠던 소공작은 다음 날 멀쩡해진 몸으로 집무실에 나
타나 어제 칼라일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하려 애썼다.
- 아버지에 이어서 나까지 홀리다니….
알렌은 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만난 이후부터 소공작은 지금까지의 이성적인 모습
이나 냉정함 따위는 잃은 지 오래였다.
- 사람을 현혹하는 비술이나 약 같은 걸 쓴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이
상해질 리 없어.
본인이 이상해졌다는 건 알고 계셔서 다행이라는 말을 칼라일은 간신히 삼켰다.
- 그렇게 생각하지, 칼라일?
- 음….
하지만 에른스트의 녹을 먹는 소공작의 부하는 현 상황을 간언 대신 침묵이라는 가장 무난한
방법으로 대처해야 했다.
- 어떻게든 해야 해, 어떻게 해서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에 빠진 알렌을 보며 칼라일은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공작과 마르가리타의 결혼식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였다.
* * *
- 당장 그 여자를 잡아서 내 앞에 데려와.
공작께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자, 알렌의 정리되지 못한 혼란스러운 마음은 고스란히 증오
로 바뀌어 사샤에게 향했다.
공작께 일어난 사고가 정말 계획된 것이었는지 조사부터 해야 하지 않냐는 부하의 지극히 타
당하고 이성적인 말은 소공작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 …알겠습니다, 주인님.
어쨌든 에른스트 공작가의 가주께 문제가 생겼다. 그 원인일지 모를 여인을 잡아 두는 것은
타당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에 칼라일은 다른 말을 아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직접 사샤를 찾으러 나간 소공작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
왔다.
- 그 여자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흥분한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재에 서서 회계 장부를 보고 있던 칼라일은 고개를 들어 새빨개진 얼굴로 씩씩대는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모노클 속 칼라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자신 같은 여자와 상종이나 해봤냐며, 내가 여자 경험도 없는… … 동정이라고 모욕하더군
.
소공작은 기세 좋게 이야기를 시작하고서는 금방 말끝을 흐리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 그거 맞,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군요.
칼라일은 심각한 어투로 주인의 말에 맞장구쳤지만, 여전히 모노클 안의 눈은 회계 장부를
향해 있었다.
- 칼라일, 저 말의 의도가 뭐로 보이나?
- 음 그건 아마….
말 그대로 당신이 여자도 못 품을 것 같은 모자란 남성이라는 뜻 아닐까요.
칼라일은 머릿속을 스치는 현답 대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의 주인이 바라는 대답을
했다.
- 그녀가 당신을 유혹한 게 아닐까요?
- …역시 그런 거지.
칼라일의 대답에 소공작은 흡족한 듯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참나, 지금 자기 어머니가 실종되고 내 아버지는 깨어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감히 날
유혹해…?
알렌은 사나운 말투와는 달리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팔짱을 낀 채로 집무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 가만둘 수 없겠어.
- 알렉산드라를 공작 시해 모의 죄 및 소공작 유혹 죄로 구금할까요?
진지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칼라일의 손은 마른 헝겊으로 모노클을 닦아내는 데 집중하고 있
었다.
제 주인이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 던진 말일 뿐이었다.
- 뭐? 그,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 그럼 던컨을 부르겠습니다.
던컨은 공작 기사단의 소속 기사로 알렌, 칼라일과 함께 자란 친우이자 실력 있는 신임 기사
였다.
- 아니, 잠깐.
다급하게 제자리에 멈춰 선 알렌이 한 손을 들어 칼라일을 막았다.
- 던컨을 부르는 건 너무 빨라.
초조한 주인과는 달리 칼라일은 느긋한 손길로 모노클의 렌즈에 입김을 불며 꼼꼼하게 닦아
내었다.
- 우선 그 전에 정황을 파악해야 하지 않겠어?
알렌은 좋은 생각이 난 듯, 한 손을 턱에 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내가 그 여자를 직접 조사하겠다, 아주 철저히.
‘음, 오늘 위스키는 뭘 마실까.’
깨끗하게 닦은 모노클을 다시 낀 칼라일은 머릿속으로, 주인이 집무실에 들어오고 난 이래로
가장 진지하게 고민했다.
* * *
“그래서 키스… 아니,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그녀에 대한 조사를 하지 못하셨군요.”
칼라일이 자신의 잔에 남아 있던 위스키를 한입에 삼키며 물었다.
“이제 어떡하실 겁니까.”
열려있는 창문에서 커튼이 흔들리며 시원한 밤바람이 들어왔다.
칼라일은 비어있는 주인의 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라주었다.
“….”
알렌은 그의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알렌은 초조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그녀와의 입맞춤이 떠오르자 또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뛰었다.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무슨 말이야, 내가 왜 그 여자를 사로잡아.”
칼라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공작은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발끈하며 부정했다.
“그래야 공작님 사건의 진실을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마녀인지 확인하려고 하시는 거니
까요.”
“아, 그렇지. 그래 맞아.”
그는 칼라일의 말에 그제야 어색한 동조를 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꽃을 보내시죠.”
“꽃?”
뜬금없는 단어에 알렌이 되묻자 칼라일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동 제국과 서 제국, 옛날부터 지금까지 동서고금 불변의 법칙입니다.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꽃만 한 게 없죠.”
칼라일의 안정적인 저음과 뛰어난 언변은 무슨 말을 해도 설득력 있게 들렸다.
“100년 전, 알버트 경은 은방울꽃으로 마타하리를 끌어들였죠.”
“그래, 그랬었지.”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동, 서 제국이 종전 평화 협정을 맺기 전, 양 제국이 서로에게 밀정과 간첩을 보내며 첨예
한 대립을 하던 시기였다.
서 제국 재상에게 접근해 미인계로 기밀 정보를 빼내려던 간첩 마타하리는 오히려 그에게 사
랑에 빠져 동 제국에 유리한 정보를 넘기고 말았다.
결국 반역 혐의로 살해당한 마타하리의 러브스토리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녀의 이름만큼은
아직도 역사에 남아 있었다.
어느새 알렌은 칼라일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황제 폐하도 황후 전하와 혼례를 올리시기 전, 매일 아침 싱그러운 꽃들을 제국에서
가장 빠른 마편으로 황후께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 그랬…, 그게 상관이 있나?”
“그만큼 여성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면 공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겁니다.”
알렌의 지극히 타당한 의문에도 개의치 않고 칼라일은 자신의 말을 술술 이어갔다.
“알버트 경의 마음과 황제 폐하의 마음을 본받아 행동하셔야 합니다.”
“공과 노력.”
칼라일은 자신이 아무렇게나 적당히 지껄여본 궤변에 설득되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알
렌을 가느다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눈앞의 이 사람이 정말 제국에서 손꼽히는 천재라고 칭송받던 그 알렌 폰 에른스트가 맞
는 걸까.
그래도 항상 최고였고, 또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완벽주의자 주인보다 처음 느끼
는 감정에 허둥대는 지금의 바보 같은 주인의 모습이 더 보기 좋았다.
칼라일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얼마간 칼라일과 술을 주고받던 알렌은 그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2층으로 오르던 중 아래쪽을 내려 보자 커다랗게 트인 복도 창문으로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
다.
정원사가 정성을 들여 손질한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그가 정원을 유심히 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꽃이라…”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알렌은 계단을 오르던 발길을 멈추고 자신도 모르게 정원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사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안나가 들어와서 그녀의 방을 정리 중이었다.
안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방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올려둔 꽃병에 한 손 가득 안고
있는 꽃을 한 송이씩 정성스레 담고 있었다.
“저기….”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사샤가 말을 걸자, 안나는 사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예의 바르게 손을 모아 인사했다.
사샤는 공작가에 온 후로 처음 받아 보는 사용인의 아침 인사에 얼떨떨해하며 침대에서 일어
났다.
“이 꽃은 뭐예요…?”
사샤의 눈길이 지금까지 그녀의 방에 존재한 적 없던 알록달록한 식물로 향했다.
“아 그건….”
안나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꼭 비밀이라고 하셨는데….”
설마.
사샤의 머릿속에서 어젯밤 드잡이질 같은 키스를 했던 허연 머리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등
줄기가 선뜩해졌다.
“혹시… 그… 소공작께서 주신 건가요?”
아니라는 말을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꺼낸 사샤의 질문에 안나는 대답 대신 얼굴을 붉혔다.
“사실….”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하는 안나를 보며 사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불쾌
해하며 한쪽 눈을 크게 찌푸렸다.
“소공작님께서 새벽부터 찾아오셔서 꼭 아가씨 방에 놓아달라고 하셨거든요….”
“허….”
“비밀로 해주세요!”
사샤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었
다.
그녀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단 하나였다. 그녀의 목숨 줄이 아홉 번째에서 드디어 연장되고
있는 것 같다고.
꽃보다 차라리 먹을 게 좋았을 텐데. 아침 식사를 하고 난 사샤는 테이블에 앉아 한 손을
턱에 괴고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꽃을 바라보았다.
“리시안셔스라는 꽃이에요.”
안나는 아침 식사가 끝난 쟁반을 치우며 사샤에게 꽃 이름을 알려주었다.
여러 송이의 꽃들이 하늘거리는 꽃잎을 겹겹이 피워내며 은은한 향을 내고 있었다.
풍성하게 핀 연분홍색, 하얀색, 옅은 노란 빛의 꽃들이 그녀의 방에 감도는 칙칙한 기운을
걷어냈다.
“리시안셔스….”
사샤는 안나가 알려준 꽃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똑똑,
그때 누군가 사샤의 방문을 노크했다.
안나는 얼른 달려가 누가 왔는지 확인했고, 사샤 역시 시선을 문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