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눈앞에 놓인 알렌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사샤는 그에게 얼굴을 잡힌 채로 긴장한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여덟 번의 인생 오버 덕분에 웬만한 상황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대담함이 생긴 데
다, 죽일 거면 죽여 봐라, 라는 자포자기가 더해져 두려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었다.
사샤의 눈에 비치는 알렌은 어제 그녀가 내뱉었던 여자에게 인기가 없다느니, 동정이라는 말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려고 그저 객기를 부리는 꼴로 보일 뿐이었다.
내가 겁먹을 줄 알았다면 완전히 네 실수다.
지금까지 네 놈이 상상도 못 했을 반응만 보여주마.
그렇게 결심한 사샤는 한마디도 지지 않을 각오로 그에게 덤벼들었다.
“호오, 그러신가요, 소.공.작.님?”
그녀는 자신의 턱을 붙잡고 있던 알렌의 손을 탁하고 쳐냈다.
그리고 일부러 소공작이라는 단어를 한 음절씩 강조하며 입꼬리를 올린 채 도발적으로 미소
지었다.
“굳이 제가 말한 발언을 정정해주려고 이 야밤에 찾아오신 거군요?”
“…뭐?”
전혀 동요하지 않는 사샤의 태도가 예상 밖이었는지 여유만만하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얼마든지.”
사샤는 앉아있던 침대에서 기세 좋게 일어났다. 그리고 알렌의 목덜미에 손을 올리고 나서
힘을 줘 그의 얼굴을 자신의 바로 앞으로 끌어내렸다.
“보여줘 봐.”
사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알렌의 허리가 굽혀지자, 처음으로 두 사람은 온전히 시선을 맞
춘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알렌을 보며, 사샤는 언젠가 마르가리타가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 사샤, 남자와 기 싸움을 하게 될 때가 있을 거야.
- 하아, 내가 왜…?
- 살다 보면 그럴 일이 천 번쯤은 있단다. 만약에 네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 엉, 이겨야 한다면?
- 무조건 선빵을 날리렴.
- 선빵?
- 남자가 하려는 행동보다 더한 걸 네가 먼저 하는 거야. 그래야 네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어.
그땐 조언 같지도 않은 이상한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볍게 듣고 무시했었는데 정말
그런 상황이 올 줄이야.
코앞에 있는 알렌의 푸른 눈 속에 자신이 모습이 보였다. 사샤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키진 않지만 네 놈 뜻대로 끌려갈 순 없지. 선빵은 내가 친다.
그런 생각으로 사샤는 눈을 감고 알렌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대었다.
쪽.
불쾌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알렌의 입술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난데없는 그녀의 입맞춤에 당황한 알렌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살짝 실눈을 뜬 사샤가 그를 바라보니 알렌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너, 뭐…!”
잠시 힘을 뺀 사샤에게 그는 뭔가 따지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샤는 알렌의 입을 아예 막아버릴 작정으로 다짜고짜 그의 입 안에 그대로 혀를 밀어 넣었
다.
“읍….”
사샤는 버둥거리는 알렌의 얼굴을 양손으로 꽉 잡아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적극적으로 입을
맞췄다.
한동안 계속되던 격정적인 입맞춤이 잦아들고 나서야 사샤는 알렌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입술
을 떼었다.
“무슨 짓이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멍청히 서 있던 알렌은 정신을 번뜩 차리고 한쪽 팔로 다급하게 자
신의 입을 막았다.
“우리 소공작님께서 여자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보여주시려면 키스부터 해봐야 하는 거 아닌
가요?”
“그동안 이렇게 아…무하고나 입맞춤 해왔나?”
초조한 목소리로 묻는 알렌과 달리, 사샤는 반질거리는 입술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며 무심
히 대답했다.
알렌은 어느새 처음 그녀 앞에서 보여 준 차분함은 찾아볼 수도 없이 격앙되어 있었다.
“첫 키슨데요.”
“…처음이라고?”
사샤의 대답에 그의 표정은 더욱 혼란스러워 보였다.
“내가 지금까지 이런 걸 할 일이 어디 있었겠어요. 엄마 수발들랴, 구멍 난 집안 재정 메우
랴, 여기 와서는 비위 안 거슬리게 쥐 죽은 듯 사느라 바쁜 인생이었는데.”
사샤는 마지막 말을 낮게 깔며 한껏 비꼬는 말투로 빈정거렸다.
두 팔을 벌리며 어이없다는 제스처와 함께.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은데 한 번 더 할까요?”
과장되게 혀로 윗입술을 핥으며 그를 바라보자 알렌의 얼굴은 터져버릴 것처럼 발갛게 달아
올랐다.
사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르가리타가 해줬던 조언대로 상황의 주도권이 완전히 그녀
에게 왔음을 느꼈다.
역시 저 남자는 그저 허세를 부리려고 찾아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까 제 방에 들어오던 기세는 어디 가셨어요?”
“윽….”
“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이, 정신… 나간…!”
사샤가 대놓고 빈정거렸는데도 알렌은 제대로 상대조차 하지 못하고 경황없는 말만을 내뱉은
뒤 도망치듯 방을 나가버렸다.
그런 알렌의 뒷모습을 보며 사샤는 혀를 찼다.
“누가 누구보고 정신이 나갔다는 거야. 지가 들어와 놓고.”
사샤는 한동안 팔짱을 끼고 알렌이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알렌은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사샤는 옳다구나 하며 그대로 몸에 힘을 뺀 채 팔다리를 뻗고 대자로
누웠다.
어쨌든 이번에도 저놈에게 밀리지 않고 쫓아냈다고 생각하니 입맞춤한 수고가 아깝지 않았다
.
순간적으로 마르가리타의 조언이 생각나 그를 붙잡고 막무가내로 키스하긴 했지만,
“첫 키스였는데.”
사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다시 한번 만져보았다.
아랫입술에 손을 올리니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를 여덟 번이나 죽인 놈과 키스라니. 다시 생각하니 자신이 미쳤나 싶었다.
비밀통로 앞에서 소공작에게 참았던 욕을 했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잘못된 걸까.
아니, 그 전부터일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알렌에게 죽었던 여덟 번의 전생과 지금이 뭔가 다르게 흘러가고 있긴 하지만, 사샤는 여전
히 당장이라도 공작가의 기사들이 방문을 열고 쳐들어올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부들
부들 떨렸다.
그저 더는 죽고 싶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중얼거리던 사샤는 긴장이 풀리자 피곤함이 몰려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사샤의 방을 뛰쳐나온 알렌은 오른손으로 입술을 감싸 쥐었다. 아직도 입술이 얼얼하고 뜨거
웠다.
그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애꿎은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 * *
업무가 끝나고 잠들기 전 홀로 위스키를 즐기는 시간은 칼라일 에이든의 얼마 안 되는 낙 중
하나였다.
공작께 우환이 생기고 난 후, 원래도 적지 않던 소공작의 업무가 더욱 늘어나며 그의 보좌관
인 칼라일의 부담 또한 커졌다.
그뿐 아니라 최근에는 골치 아픈 일까지 더해졌었다.
이런 날에는 아껴뒀던 고급 위스키라도 꺼내서 마시지 않으면, 아무리 어릴 때부터 몸담고
있는 공작가에 뼛속까지 충성하는 자신이라고 해도 완전히 지쳐버릴 것 같았다.
방에 돌아오니 벌써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막 씻고 나온 칼라일은 젖은 머리를 말리며 난
로에 불을 붙였다.
그는 위스키를 보관하는 찬장을 열어 가장 아끼는 위스키 병을 꺼내 들고 테이블 위에 올렸
다.
칼라일의 붉은 머리칼에서 흐른 물기가 테이블 위에 떨어져 내렸다.
칼라일이 막 위스키 뚜껑을 열었을 때, 그의 방문이 거침없이 열렸다.
“칼, 이 상황을 어떡해야 하지?”
칼라일의 주인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테이블 앞에 마주 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칼라일의 날카로운 눈매가 게슴츠레해지며 이내 무심한 목소리로 앞에 앉은 이에게 물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십니까, 소공작님.”
“그 여자는, 진짜 마녀일지도….”
무슨 일이 있긴 있었는지 알렌의 셔츠는 단추가 두세 개 풀려 있는 데다 얼굴은 상기되어 있
었다.
“그녀에게 다녀오셨나 보네요.”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들어 보려고 간 거야.”
알렌은 빈 잔을 들어 붉은빛이 도는 황금색 위스키를 자신의 잔에 반 정도 따랐다.
“그런데 다짜고짜 날 붙잡고 이, 입에.”
“당신께 키스를 했군요.”
키스라는 말에 위스키를 따르던 알렌의 손이 뻣뻣하게 멈췄다.
새빨간 얼굴은 당혹감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는 더듬더듬 변명의 말을 찾았다.
칼라일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주인을 응시했다.
“난 그저 그 여자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소리를 한 건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갑자기….”
“우선 그렇다 치고.”
알렌의 되지도 않는 구차한 변명을 단칼에 잘라버린 칼라일이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대로 방을 나왔는데.”
이 한심한…. 칼라일은 오랫동안 모신 존경하던 주인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며칠 전 그녀가 당신께 했던 동정 발언에 대한 사과를 받으러 가신 건데 사과는커
녕 입맞춤 당하고 오신 거군요.”
“그런 게 아니라고!”
칼라일의 깔끔한 정리에 정곡을 찔린 알렌은 시뻘게진 얼굴로 테이블을 치며 일어났다.
그 바람에 잔에 담긴 위스키가 크게 흔들리며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칼라일 에이든은 얼마 전부터 직장 생활에 커다란 애로사항을 겪고 있었다.
공작께서 결혼할 여인과 그녀의 딸을 공작가에 초대한 다음 날부터, 그의 주인인 소공작이
이상해져서 지금까지 하지 않던 기행을 저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소공작님, 이 서류 처리를 부탁드립니다.
- ….
- 알렌 님?
- ……하아.
그는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한숨을 쉬며 집무실에 앉아 있기만 하거나,
- 잠깐 나갔다 오지.
- 어디 가십니까?
- …차라리 몸을 움직여야겠어.
갑자기 자리를 쾅 치고 일어나서 연무장으로 뛰어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기
도 하고, - 이게 무슨 일인가요?
- 아, 잉크를 좀 흘렸어.
- 이 잉크 얼룩으로 전혀 읽을 수 없게 된 서류는 제가 삼 일간 작업한 보고서인 것 같은
데요.
- ….
- ….
결재 서류에 잉크를 엎어 비싼 책상과 서류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알렌은 열이 펄펄 끓는 이마를 짚으며 집무실에 왔다.
-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칼라일은 온몸이 불덩이인 자신의 주인을 부축해 소파에 조심히 눕혔다.
- 어련하시겠습니까. 제가 갖고 있던 해열제라도 드세요.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랍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알렌의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 칼.
알렌은 소파에 누워 한 손을 이마에 올린 채 힘없는 목소리로 칼라일을 불렀다.
- 네, 알렌 님.
- ……분명히 처음 본 게 맞는데 왜 이러는 걸까.
- 네?
- 나 미친 것 같아.
그는 열에 들떠 새빨간 얼굴을 하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 그 여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알렌 폰 에른스트는 자신이 가장 믿는 부하이자 친우에게 난생처음 느낀 그의 혼란스러운 속
내를 털어놓았다.